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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텔 벗어나 달리는 두 아이... 이 영화 엔딩이 가슴 울린 이유

[리뷰]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현실에서 마법으로 이어지는 엔딩

18.10.17 11:54최종업데이트18.10.17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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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다 프로젝트>의 포스터. ⓒ 오드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에는 미국 플로리다의 한 모텔에 사는 어머니 핼리(브리아 비나이트)와 딸 무니(브루클린 프린스)가 나온다. 핼리를 받아주는 모텔은 매직 캐슬 모텔 하나뿐이다. 매니저 바비(윌렘 대포)가 이들의 딱한 사정을 이해해주기 때문이다. 관광지인 이곳에 즐비한 다른 모텔들은 이들 모녀에게 숙박 제공 자체를 거부한다.

핼리는 이미 사회의 부적응자이다. 그녀는 아마도 현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영화 말미에서 아동국 직원들이 집안을 뒤지는 동안 그저 멍하니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자신의 작은 공간에서조차 그녀가 아무런 통제력을 가지지 못하는 냉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그녀는 딸과 헤어지게 될 상황을 자각하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지만, 그건 그저 물에 빠진 자의 허우적거림일 뿐이다. 그녀는 어른에게 응당 기대되는 수준의 상황판단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에게 하나밖에 없는 친구인 애슐리가 사과를 받아주지 않자 폭력을 행사하고, 소중한 딸이 있는 공간에서 성매매를 한다.
 
핼리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을 연상시킨다. 세상은 거대하고 폭력적이고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 그 거대한 황량함으로부터 홀든은 순수의 마지막 보루인 여동생 피비를 지키려고 한다. 물론 별다른 방법은 없다. 그저 현실을 부정하고 도망치려고 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핼리는 소중한 딸 무니를 지키려고 한다. 하지만 그 방법은 마치 땅속으로 머리를 밀어 넣고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는 타조와 같다. 생활비를 벌기 위한 성매매를 하려고 해도, 그녀에게 주어진 공간은 모텔의 작은 방뿐이다. 그래서 그녀가 성매매를 하는 동안, 딸 무니는 시끄러운 음악을 들으면서 욕실에서 물장난을 한다.
 

아들의 작은 세계를 지켜주고 퇴장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인생은 아름다워>의 한 장면. ⓒ 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핼리는 딸 무니에게 수영복 사진을 찍자고 제안한다. 둘은 휴대폰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면서 즐겁게 논다. 알고 보니 핼리는 성매매 광고에 올릴 자신의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이 장면은 로베르토 베니니의 불후의 명작 <인생은 아름다워>와 겹쳐졌다. 이 영화에서 아버지 귀도는 아들에게서 수용소의 현실을 감추는 데 성공한다. 

수용소를 버리고 달아나는 나치가 학살극을 벌이는 밤 동안, 아이는 숨바꼭질 게임을 한다.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로, 곧 총살을 당하게 될 골목길로 끌려가는 아버지를 천진한 아이는 숨어서 바라본다. 웃음을 참으면서. 다음 날 아침, 꼬마에게는 1등 상인 탱크가 나타난다. 그런데 이런 마법이 정말 가능할까?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귀도의 마법이 아들에게 보호막을 치는 것은, 영화 <라따뚜이>의 레미와 링귀니가 맺는 우정과 마찬가지로 판타지일 뿐이다.

현실의 핼리에게 마법은 무리다. 욕실과 침실을 나누는 문 하나, 그리고 시끄러운 음악으로 마법의 보호막이 쳐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호밀밭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겠다는 홀든의 망상과도 같다. 한참 어린 여동생 피비조차 그런 게 장래희망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마찬가지로, 무니도 문 뒤에서 엄마가 무언가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딸 아이가 있는 공간 바로 옆에서의 성매매, 그것은 다른 어른들에게는 역겨울 정도로 무책임한 것이다. 애슐리는 자기 아들이 핼리의 딸과 어울려 다니다가, 성매매 공간에 노출될까 두렵다. 그런 부모의 마음을 핼리는 모르는 걸까. 생활비가 필요해 어쩔 수 없이 한 성매매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친구' 애슐리에 대한 집착은 이내 분노로 바뀐다. 핼리는 애슐리의 눈에 멍이 들도록 때린다. 애슐리는 폭력에 대해 보복하지 않는다. 핼리라는 혹을 떼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로는 싼 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정도로 핼리의 세계는 '정상'의 세계와 분리되어 있다.
 
애슐리에게 애원하고, 또 곧바로 폭력을 행사하는 핼리의 모습은 그녀가 세상을 어떻게 대하는지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 핼리는 세상에 속하고 싶고 함께 어울리고 싶다. 하지만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그걸 지적하는 세상에 용서를 구하는 대신, 세상을 버린다. 
 

마지막 선물을 사는 아키라와 사키. <아무도 모른다>의 한 장면. ⓒ Cinequanon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를 보자. 서로 배다른 형제인 아이 넷을 데리고 셋방으로 이사 오는 엄마. 아이들이 많다는 걸 알면 방을 내주지 않을까 두려워, 그녀는 장남 아키라만을 데리고 집주인에게 인사를 한다. 다른 아이들은 가방에 숨어 집안으로 들어오거나, 늦은 밤에 몰래 합류한다.

이 아이들의 아버지(여러 명)들은 이들을 버렸다. 아니, 아예 아이들의 존재를 부인한다. 생활비가 떨어진 아키라는 막내 유키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어른들을 찾아가지만 그들은 모두 자신이 유키의 아버지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부정한다. 이에 비하면, 이들의 어머니는 적어도 아이들을 버리지 않았다. 영화의 초반부까지는 말이다.

아이들을 버리고 난 후, 어머니가 행복하게 지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제 버려졌다. 무니를 빼앗아가려는 아동국 직원들에게 생떼를 부리는 핼리는 적어도 딸을 사랑한다. 무니에게도, 핼리는 최고의 엄마이자 최고의 친구다. 근처 호텔 식당에서 아침을 훔쳐 먹는 장면을 보자. 어머니인 핼리와 대화할 때 무니의 화제는 자기 또래 친구들과 수다 떨 때의 화제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무니에게 핼리는 자신보다 더 멀리 보는 보호자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자신과 같은 눈높이에서 놀아주는 친구에 가깝다.

이 영화의 엔딩은 지금까지 내가 본 모든 영화의 엔딩 중에 최고 수준이었다. <내일의 기억>이나 <한공주> 정도를 제외하면 이 영화의 엔딩보다 분명하게 더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엔딩이 생각나지 않는다.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한 장면. 무니에게 핼리는 어머니보다 친구에 가깝다. ⓒ 오드

 
깊은숨을 두어 번 들이쉬는 잰시. 작은 꼬마 아이가 자기 집 문 앞에서 우는 또 다른 작은 아이의 손을 잡고 갑자기 뛰기 시작한다. 플로리다의 주택가, 관광지, 상점가를 지나, 사람들이 존재하며 살아가는 그 공간을 두 아이는 마치 외계의 존재라도 되는 듯이 가로질러 나아간다. 핸드헬드 카메라로 두 아이의 뒤를 쫓는 카메라.

두 아이의 달리기와 호흡을 같이 하던 음악은, 이들이 디즈니랜드의 성을 향해 사라지면서 화면과 함께 동시에 꺼진다. <인생은 아름다워>가 줄곧 마법의 공간을 보여주다가 현실로 끝났다면,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줄곧 현실의 공간을 보여주다가 마법으로 끝난다. 냉철하게 판단하자면, 비겁하고 무책임한 엔딩일 수도 있다. 이제 와서, 도대체 무엇이 가능하다는 건가. 하지만 나는 이 엔딩이 너무도 사랑스럽다. 머리는 아니라고 하지만, 가슴을 울리는 걸 어떻게 할까.
플로리다 프로젝트 인생은 아름다워 호밀밭의 파수꾼 아무도 모른다 최고의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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