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18 09:54최종 업데이트 18.10.18 09:54
광화문을 지나 서촌 입구 체부동에서 백운동천(白雲洞川) 길을 따라 자하문을 향해 걷는다. 10여 분을 걸어 수성동 계곡 입구를 지나면 통인시장이 나오고 그 다음이 바로 옥인동이다. 이 옥인동이 시작되는 즈음이 옥인동 19번지인데, 이곳에서 일제강점기 때 저명한 미술인 세 사람이 동시대를 살았다.

바로 동양화가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1897-19)과 서양화가 행인(杏仁) 이승만(李承萬, 1903-1975), 그리고 천하의 매국노로 서예에 능했던 일당(一堂)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이다. 이 세 사람은 각각 자신의 분야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시대의 인물들이었다.
 

이승만, 이상범, 이완용 집이 있던 옥인동 19번지의 현재 모습. ⓒ 황정수


이완용은 정치적 위세를 바탕으로 서화협회 고문을 맡았으며, 이상범은 '청전화숙'을 중심으로 동양화가들을 결집시켰고, 이승만은 특유의 원만한 품성으로 서양화가들을 서촌지역으로 모여들게 하였다. 특히 이승만의 옥인동 집은 서양화가들의 집합소였다. 이곳에 많은 서양화가들이 모인 것은 근처에 많은 화가들이 살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을 모일 수 있도록 판을 놓아준 이승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집은 옥인동과 통인동 경계에 있었는데, 앞문으로 나가면 옥인동이요, 뒷문으로 나가면 통인동이라 할 정도로 넓었다. 백 칸이 넘는 저택으로 집안에는 넓은 잔디밭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이승만은 무료하면 스케치북을 들고 정원 한가운데 나가 그림을 그리곤 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 바로 옆집이 매국노 이완용의 집이었다. 이완용은 동네 산책을 즐겼는데, 늘 일본 순사를 거느리고 다녔다고 한다. 이완용은 이승만의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고, 일본 유학을 주선하는 등 호의를 베풀었으나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이승만의 집 다른 한 쪽은 이상범이 누하동으로 이사하기 전에 살던 집이었다. 스승인 안중식이 세상을 떠나자 이상범은 머물던 경묵헌(耕墨軒)을 나와 가족들이 살고 있는 옥인동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에 두 사람은 그다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여름 장마 때 두 집 사이에 있는 흙담이 무너져버렸다. 다시 담을 쌓아야 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그냥 터놓고 한집같이 지내게 되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가까워져 50년 동안을 친밀하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정치인 이승만과 화가 이승만   
 

대부분의 근대사진이 어디 것인지 알 방법이 없어 부득이하게 교수신문 기사(<소설가 구보씨의 일생> 책 소개)에 실린 화가 이승만 사진을 캡처했다. ⓒ 교수신문 화면 캡처

화가 이승만은 서울에서 태어나 교동보통학교를 거쳐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다닌다. 고보 재학 중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로 휘문고보 미술 교사로 있던 고희동의 지도를 받으며 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졸업 후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에 있던 고희동이 주동이 되어 설립한 '고려화회'에 출입하며 이제창·장발·안석주·구본웅 등과 함께 활동한다. 얼마 후 도쿄미술학교에 진학하고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와바타미술학교에 들어가 공부한다.

결국 2년 후 집안 사정으로 미술학교 진학을 단념하고 귀국하여 미술에 전념한다. 이승만은 화단 활동을 위해 조선미술전람회(아래 조선미전) 출품을 준비한다. 1925년 <매일신보>는 제4회 조선미전을 앞두고 전람회에 출품할 작품을 제작하고 있는 유망한 작가 십여 명을 탐방하는 기사를 싣는다.

그 중의 한 명이 이승만이었다. 그런데 기사 내용이 참으로 재미있다. 사람들은 이제 막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청년 화가 이승만을 정치가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의 이름에 빗대어 우스운 말들을 하고 있었다.

"'이승만(李承萬)' 얼른 들으면 상해 임시정부에서 대통령 노릇을 하던 철학박사 '이승만(李承晩)' 그 사람 같이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늙은 정치가! 이 사람은 금년 이십삼 세의 청년화가! 동명이인은 분명하나 그래도 그의 친구들은 그더러 입버릇으로 '이박사!'라고 부른다. 작은 키에 아담한 낯빛! 입을 벌릴 때마다 생긋! 생긋! 웃는 표정은 아무리 완고한 사람이라도 무섭게 굴 수가 없을 것 같다."

지금까지도 '화가 이승만'은 대중적 인지도가 높지 않아, 초대 대통령을 지낸 '정치가 이승만'과 혼동하는 이들이 많다. 당시 이승만은 일본에서 돌아온 전도유망한 청년화가로 조선미전에 처음으로 출품하려고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제4회 조선미전 4등상 이승만 '라일락 꽃', 조선미술전람회 도록에서 촬영 ⓒ 황정수

 
신문 기사에 따르면 그는 화실에서 파묻혀 수채화로 정물을 열심히 그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해 이승만은 조선미전 서양화부에서 4등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단한다. 이후 매년 연속해서 4차례나 특선을 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보인다.

이승만은 희귀한 성씨인 태안 이씨

이승만은 '행인(杏仁)'이라는 재미있는 호를 썼는데 '살구 씨'라는 뜻이다. 그의 키가 작고 몸이 왜소해 친구들이 별명을 '살구 씨'라 부른 데서 따왔다고 한다. 또한 호 만큼이나 이승만의 집안도 특별하다. 그의 성씨는 이씨 중에서도 가장 드문 편에 속하는 희귀한 성씨이다. 자료에 따라 '전주 이씨'라 잘못 전하는 곳도 많지만, 사실 그의 정확한 본관은 '태안 이씨(泰安 李氏)'이다.

태안 이씨는 현재 전국에 3천~4천 명 정도 밖에 없는 희귀한 성씨 중의 하나이다. 그의 집안은 역관 출신의 중인이었다. 서촌에 자리 잡은 것도 집안 내력이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서 개화기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역관들이 그렇듯이 이 집도 대단한 재력을 축적한 집안이었다. 이승만 또한 이러한 집안 특유의 현실 적응 분위기에서 자라 일찍 개화하여 신학문을 배운 것으로 보인다.

태안 이씨는 희귀한 성씨임에도 미술에 재능이 있는 집안이었는지 같은 시대에 능력 있는 화가 두 명을 더 배출한다. 서양화가 이제창(李濟昶, 1896-1954)과 동양화가 현초(玄艸) 이유태(李惟台, 1916-1999)가 그들이다. 이제창은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였는데, 이승만보다 한 항렬 위였으며 나이는 7년 위였다.

이유태는 한 세대 아래 항렬로 김은호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하여 도쿄제국미술학교로 유학을 다녀온 재원이었다. 세 사람 모두 일본 유학을 한 것을 보면 태안 이씨들이 부유하고 개화된 의식을 가진 집안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동경파와 옥동패의 대립

이승만의 옥인동 집을 중심으로 서양화가들이 어울렸다는 것은 당시에 화가들 사이에 여럿이 어울려 지내는 세력이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1909년 고희동이 유학을 다녀오며 시작된 근대 서양화단은 점차 전공자가 늘며 화가들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일본 유학이 늘고 조선미술전람회가 창설되며 서양화가들의 수는 급격히 늘어났다. 더욱이 여러 미술단체들이 생겨나며 화가들은 서로 어울리는 부류들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화가로서 글을 잘 썼던 구본웅은 당시 화단의 대표적인 세력을 '동경파(東京派)'와 '옥동패(玉洞牌)'로 나누었다.

동경파는 도쿄미술학교 등 일본의 미술학교로 유학을 한 화가들을 묶어 지칭하는 것이다. 도쿄미술학교 출신인 고희동과 그의 후배들인 김관호, 김찬영을 중심으로 여기에 나혜석, 이종우와 같은 후배 화가들을 '일본 유학생'이라는 연결고리로 묶어 '동경파'라 불렀다.

이들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라는 자부심이 강한 이들이었다. 이들이 모여 특별한 미술 운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서로를 의식하며 이후 다가올 근대화된 한국 미술계를 양분하게 되는 한 축이 되었다.

또 다른 세력은 이승만의 옥인동 집을 중심으로 어울리는 일군의 화가들이었다. 특히 이승만의 집에 있는 화실은 열댓 칸이나 될 정도로 커서 서양화를 그리는 친구들이 자주 들러 때때로 함께 그림을 그렸다.
 

<한국 근대미술의 역사>( 최열 지음) 책에서 촬영. ⓒ 황정수

 
마치 화가들의 아지트처럼 많은 이들이 드나들었다. 이들을 '옥동패'라 불렀다. '옥동패'라 한 것은 옥인동에 사는 이승만과 사직동에 사는 김중현의 동네에 화가들이 자주 모이는 것을 보고 구본웅이 동네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옥동패'로는 정규익, 안석주, 이승만, 이제창, 김중현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동경파에 비해 좋은 대학을 다니지 못했거나 유학을 다녀오지 못한 화가들이었다. 이들 외에도 김종태와 윤희순, 고려미술회의 박영래, 도쿄 유학생인 김복진도 자주 어울려 옥동패로 불렸다. 이들 중 여러 명은 서촌 지역에 살아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좋은 여건이 되었다. 그러나 점차 일본에 유학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이러한 분류는 무의미하게 되었다.

옥동패의 좌장은 단연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전형적인 서울 사람이다. 보통 서울 사람을 이야기할 때 '서울깍쟁이'라 하여 까다롭고 인색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정확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 서로 예의만 지키면 불편함이 없는 정확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승만은 좋은 의미의 서울 사람이었다.

가까이 지냈던 소설가 조용만의 말에 따르면, 이승만은 옥같이 맑고 티끌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또한 더럽고 추하게 사는 것을 싫어하였고, 오만하다고 할만치 깔끔하여 남에게 허리 굽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인자하고 친절하여 남을 돕기를 좋아하는 면도 있었다. 또한 '좌담의 명수'라 할 만큼 언변이 좋아 사람들을 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고도 한다. 이러한 그의 성격이 옥동패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삽화가로서의 이승만

이승만은 한국미술사에서 특이한 지점에 있는 작가이다. 그는 일본에 유학하여 서양화를 공부하였으나 한국에 돌아와서의 활동은 서양화보다는 신문 소설의 삽화로 유명세를 얻은 '삽화의 명수'였다.

그가 삽화에 전념하게 된 것은 신윤복의 풍속화에 심취하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신윤복의 풍속화를 현대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신문의 삽화를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신문의 역사소설 삽화를 계속해서 맡으며 명성을 쌓아갔다.

그는 <매일신보> 학예부 기자로 신문 연재소설 삽화를 전담하였는데, <동아일보>의 이상범, <중앙일보>의 노수현과 함께 삽화계 3대 천왕으로 알려질 만큼 신문 삽화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이 세 사람은 우연하게도 모두 서촌에 살았다.

특히 이승만은 역사 소설을 많이 쓴 소설가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 1901-1981)와 짝을 이루어 작업을 많이 하였다. <금삼의 피>(1935)의 삽화를 그리게 된 것을 계기로 <임진왜란>(1954-1957), <세종대왕>(1969-1975) 등 풍속화풍의 삽화를 도맡아 하였다.
 

이승만 소설 '세종대왕'의 삽화, 개인 소장품 촬영 ⓒ 황정수


이 작품은 이승만이 박종화가 <조선일보>에 연재한 역사소설 '세종대왕'의 삽화로 그린 것이다. 박종화와 이승만은 짝을 이뤄 1969년부터 1977년까지 2456회를 연재하여 최장기 연재소설의 기록을 세운다. 뒷면에 '1969년 5월 28일 조선일보사 조사국'이란 직인이 찍혀 있으며, 펜으로 '세종대왕 75회'라는 당시 편집국 직원의 글씨가 적혀 있다.

다급한 상황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다양한 백성들의 움직임을 여러 명의 인물들을 동원하여 묘사하고 있다. 군사 한 명과 일반인 대여섯 명이다. 어떤 이는 갓마저 잃어버리고 혼비백산하는 것으로 보아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모르지만 난리가 난 모양이다. 비록 조그만 삽화 그림이지만 사람들의 활달한 움직임을 잘 묘사하였다. 또한 사람들의 배치 등 구성도 잘되어 이승만의 재기 넘치는 삽화 실력을 느낄 수 있다.

행인 이승만의 딸을 만나다
 

묵로 이용우가 이승만에게 그려준 '기수영창(其壽永昌)', 개인 소장품 촬영 ⓒ 황정수

10여 년 전 한 지인의 소개로 서울 우이동 지역에 사는 한 노년에 이른 여성 한 사람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명문 고녀 출신으로 교양이 높은 이였다. 자신의 아버지가 유명한 화가로 집이 매우 부유하였으며, 이상범, 노수현, 이용우 등 동양화가들과 김중현 등 많은 서양화가들이 드나들었다는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다. 그의 아버지가 바로 행인 이승만이었다.

자신도 아버지를 닮아 그림을 잘 그려 이상범에게 칭찬을 들었는데 계속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이승만의 인품과 골동품을 좋아했던 이야기까지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 집에는 이승만이 그린 작은 풍속도 몇 점이 걸려 있었고, 이용우의 거북이 그림 등 여러 작품이 있었다. 부친에 대한 이야기 끝에 노년에 이른 딸의 얼굴이 환해지는 모습을 보며 이승만의 인품을 짐작할 만 하였다.

서촌에 많은 화가들이 활동하였던 데에는 이승만의 타고난 좋은 품성이 중심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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