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와 문재인의 '교황 방북'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2000년과 2018년, DJ가 꿈꾸고 문재인이 현실로 만든 '교황 방북'

등록 2018.10.19 18:37수정 2018.10.19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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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은 전세계적으로 정신적, 도덕적 차원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인물이며 평화의 상징이다. 그래서 교황 방북은 북미 정상회담 그리고 북한 최고지도자의 서울답방과 함께 역사적, 국제적 차원에서의 의미가 매우 크다. 세계사적인 사건이라고 칭해도 과하지 않을 일이다.

이 중에서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은 지난 6월 싱가포르에서 열렸다. 북한 최고지도자의 서울 답방 그리고 교황의 방북 두 가지는 공식화됐고, 여러 여건을 볼 때 실제로 성사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두 가지는 조만간 열릴 북미 제2차 정상회담과 함께 한반도 평화 정착과 동북아 냉전구조 해체를 불가역적인 상태로 만들 결정적인 역사적 대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 같은 2018년의 상황을 보면 2000년 상황이 자연스럽게 그리고 아주 강렬하게 떠오른다. 교황 방북, 북미정상회담, 북한 최고지도자의 서울 답방. 모두 2000년에 발표됐고 이를 성사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움직임이 전개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0년과 2018년의 상황에 다른 점이 있다. 2000년의 경우 세 가지 행사 모두 성사 직전에까지 이르렀지만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무산됐기 때문이다. 

그때와 지금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 2000년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을 비교해보는 것은 현재의 상황을 역사적인 맥락 속에 위치시키고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교황 방북 문제를 중심으로 관련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2세의 방북이 추진되다


교황 방북 문제가 가장 먼저 거론된 건 2000년 3월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교황청을 국빈 방문했을 때였다. 당시 교황은 요한 바오로2세였으며, 방북 문제와 관련된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교황 : (한국말로) '찬미예수 감사합니다.' 한국교회를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한국의 김수환 추기경, 정진석 대주교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 김대중 대통령 : 교황께서 북한을 방문할 계획이 있으신지요?
▲ 교황 : 현재까지는 그런 계획이 없습니다.
▲ 대통령 : 만일 북한에 가시면 한반도 평화에 대단히 기여할 수 있고, 아시아는 물론 국제평화를 위해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효과를 가져올 것이며, 큰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 교황 : 그렇게 될 수 있으면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2000년 3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만나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 2000년 3월 교황청 국빈 방문 당시의 모습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이처럼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 제안에 관심을 보였던 교황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직전에 집무실 발코니에 나와서 관광객과 순례자들을 향해서 인사를 한 후에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을 축하하는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남북한 간의 대화를 지지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회담 성공을 기원합니다. 남북한 간 대화와 교류가 양측 주민들의 화해와 반세기 이상 헤어져 있던 이산가족들의 재회, 한반도 전체의 안정과 번영을 촉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남북한이 공동선을 추구하겠다는 관대한 의지가 있다면 상호간에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을 극복하고 긍정적인 결과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특정 국가의 정상회담과 관련해서 교황이 특별담화를 발표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는 한반도 평화에 대한 교황의 특별한 관심이 반영된 것이었다.

교황의 특별성명이 발표된 이후에 열린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에게 교황의 방북 초청을 제안했고, 김 위원장이 이를 수락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교황의 방북 초청을 제안하자 김정일 위원장이 "교황의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라고 물은 뒤 제안을 수락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김대중 대통령이 서울로 돌아온 직후인 6월 16일에 박준영 청와대 대변인의 브리핑을 통해서 밝혀졌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의 교황 초청 의사를 이정빈 외교통상부 장관을 통해 교황청에 전달했다. 그러면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가지 정도로 생각해볼 수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한반도 문제에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첫째, 한반도 평화 문제에 대한 교황의 관심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103위 시성식과 1989년 세계성체대회 때 두 차례 방한하여 한반도의 현실을 직접 목도할 수 있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북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서 1989년에 방한했을 당시에 방북을 검토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1995년 북한에서 최악의 식량난이 발생하자 교황은 1996년에 교황청 대표단을 북한에 파견하여 인도적 지원을 했다. 그 이후에도 북한의 인도적 위기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처럼 교황은 한반도 평화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둘째, 천주교 신자이기도 한 김대중과의 인연도 영향을 주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0년 12월 김대중에 대한 사형집행을 막기 위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보낼 정도로 한국의 인권과 김대중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미국 정부와 교황까지 김대중 구명을 요구하는 상황 속에서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에 대한 사형집행을 할 수 없었다.

김대중은 이러한 고초를 겪게 되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민주주의, 인권 지도자로서 알려지게 됐다. 교황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교황은 1989년 평민당 총재 자격으로 유럽을 방문 중이던 김대중의 방문을 받아들여 만남을 갖기도 하였다. 당시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민주주의를 위해 얼마나 희생을 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당신을 만나서 영광입니다. 그리고 한국 카톨릭 교회가 세계에서도 가장 모범적인 성장을 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교황은 종교지도자로서 구체적인 정치현실에 관여하지 않지만 인류 보편적인 양심과 평화와 인권 옹호를 위한 실천을 할 수 있으며 이 경우 매우 큰 울림을 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던 분이었다.
  

1989년 당시 김대중 평민당 총재와 교황 요한 바오로2세 1989년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가 교황청에 방문해서 교황 요한 바오로2세를 알현할 때의 모습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북이 성사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데 그 당시 교황의 북한 방문은 이뤄지지 못했다. 현재까지 밝혀진 사실에 근거해서 보면, 2001년 미국의 부시 정권 등장 이후 북미 관계가 악화되는 과정이 배경이었던 듯하다. 부시 정권의 강경 압박에 북한이 움츠러들었고, 교황 방북 성사를 위한 전제 조건에 있어 소극적인 태도로 전환됐던 것과 관련이 깊다.

교황 방북 관련 내용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배양일 전 바티칸 한국대사는 3년간의 바티칸 대사직을 마치고 난 직후인 2002년 3월 9일 평화방송 라디오 'PBC뉴스와 세상'과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황 성하께서는 북한 방문을 희망하고 계시지만 북한은 지난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교황 성하의 방북을 구두로만 간접 초청했을 뿐 공식 초청장을 보낸 적이 없다."

"교황청은 현재 교황 성하의 방북을 위해서는 우선 최소한의 성직자가 북한에 파견돼 신자들의 실태를 파악하고 교황님의 방북 준비 등과 관련한 당국간 협조를 선행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으나 북한은 현재 성직자의 북한 상주를 시기상조로 판단하고 있으며 부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는 북한이 그리스도교와 서구 문화에 대한 개방으로 초래될 혼란에 두려움을 갖는 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배양일 전 대사는 비교적 상세하게 내용을 밝혔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2002년 7월 5일 김대중 대통령을 예방한 크레센치오 세페 교황청 인류복음화부 장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황께서는 북한 방문을 희망하고 계시지만 여건이 성숙되지 않아 실행되지 않고 있다. 교황청과 북한간에도 교류를 할 것이며 한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남북대화와 화해협력 노력이 결실을 맺기를 바라고 있다. 교황청은 대통령께서 추진하고 있는 햇볕정책을 지지한다."
 
위의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북한이 교황의 방북 문제에 있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 부시 정권의 강경 압박정책이 강화되는 상황 속에서 대외관계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북한이 자신감이 부족했던 것이다. 지금과 비교해 보면 당시 북한은 전체적으로 자신감이 결여된 태도를 보였다. 결정적인 순간에 움츠러드는 경우가 있었다. 이것은 교황 방북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북미 정상회담,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에서도 그랬다.

2000년 미국 대선 직후 플로리다 지역 선거 결과를 두고 미국 사회가 혼란에 빠졌고 중동 문제까지 얽히면서 성사 직전에 있던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이 어려워졌다. 그러자 클린턴 대통령은 자신의 방북 대신 김정일 위원장의 방미를 제안했는데, 당시 북한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네오콘 부시 정권이라고 해도 북미 정상회담에서 도출될 성과를 일방적으로 훼손하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므로 아쉬움이 큰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도 그렇다. 당시 북한은 부시 정권으로 인해 조성된 북미 관계 악화를 이유로 서울 답방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상황 속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내려와서 김대중 대통령과 2차 정상회담을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세계 여론이 남북화해 협력 분위기에 힘을 실어주면서 네오콘 부시 정권이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매우 아쉬운 일이다.

교황 방북, 이번엔 된다

2000년 상황을 돌이켜보면 안타깝다. 그때 클린턴 정권에게 1년 정도의 시간만 더 있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았을까. 북미 정상회담, 교황의 방북, 북한 최고지도자의 서울 답방 모두 2000년과 2001년 사이에 이뤄졌을 것이다.

이와 같은 2000년과 비교해보면 지금의 상황은 확실히 더 좋다. 북한도 2000년의 경험에서 느낀 바가 많았을 것이다. 역사적 경험의 축적, 최고지도자의 스타일 차이, 과거보다 나아진 내구력 등의 요인이 북한의 태도를 더 적극적으로 바꾼 듯하다.

무엇보다, 지금의 문재인 대통령은 2000년의 김대중 대통령의 역할을 하고 있다. 2000년의 대격변의 시작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이었으며 2018년 대격변의 시작은 4.27 판문점 선언부터였다. 남북정상회담을 통한 남북관계 개선으로부터 발생한 동력이 한반도 내외의 선순환의 구조를 창출하는 것이다.

차이점은 더 있다. 2000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색깔론과 지역주의로 인해 국내 지지기반이 지금 문재인 대통령에 비해서 많이 약했다. 현재 문재인 대통령의 국내지지 기반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 비해서 더욱 강력하다. 협상을 시작한 트럼프 행정부의 임기가 반 정도 남아 있다는 점도 2000년과 다른 긍정적인 지점이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요한 바오로2세 교황처럼 한반도 평화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물론 문제가 되고 있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이 고도화되었다는 점은 부담스러우나 북한이 협상을 통한 비핵화 의지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에 결국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2000년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을 비교해서 보면 교황의 방북 가능성은 확실히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제2차 북미 정상회담,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답방, 교황의 방북 이러한 순서대로 이뤄질 가능성이 있는데, 이 모두가 성공적으로 이뤄져서 한반도의 평화구축이 불가역적인 단계에 이르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김대중 #문재인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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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사료연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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