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사랑없이 살 수 있을까?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고

등록 2018.10.22 17:15수정 2018.10.22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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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가 아니면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이다. 경제력이든, 문화든, 학벌이든 일정한 틀 안에 들어야 안정감이 느껴지는 세상이랄까. 다양화되는 세상에서 우리는 더욱 남들과 같아지려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나에게도 그럴진대 타인에게는 오죽하랴. 나와 다른 것에 거부감이 느껴지고, 배타적인 생각이 드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권해본다. 눈에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마음을 얻게 되리라.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 문학동네

 
로맹 가리가 60세에 자신을 숨기고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하여 두 번째로 공쿠르 상을 받은 <자기 앞의 생>은 14살 모모의 성장기이다. 아랍인인 모하메드(모모)는 여러 아이들과 함께 폴란드 태생 유태인인 로자 아줌마의 보살핌을 받으며 프랑스 파리 외곽에 위치한 벨빌의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 7층에 살고 있다. 독일 유태인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로자 아줌마는 평생을 몸을 팔아 먹고살지만 나이가 들자 몸 파는 여자들의 아이를 맡아 기르며 생계를 꾸리고 있다.

자신의 이름이 모하메드이고 아랍인이라는 것밖에 모르는 주인공 모모는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다. 열 살이지만 너무 조숙하다는 이유로 학교에서조차 받아주지 않는 녀석은 마음 둘 데가 없다. 엄마가 찾아오는 아이들을 보며 자신도 관심을 끌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엄마가 찾아오지 않을까 싶어 아파트 여기저기에 똥을 싸기도 한다.


하지만 녀석은 알고 있다. 자신의 곁엔 로자 아줌마가 있으며 서로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작품이 후반부로 넘어가며 상황은 역전된다. 그동안은 로자 아줌마가 모모를 보살폈다면 이제는 죽음이 임박한 로자 아줌마 곁을 모모가 지킨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함은 물론 수시로 혼수상태에 빠지는 로자 아줌마에게 의사는 입원을 권하지만 수용소에서의 기억 때문인지 이를 거부한다. 자신은 필요 이상 살고 싶지 않고, 이제 더 살 필요가 없다고. 죽을 권리를 지키고 싶다고.
 
나는 그녀의 건강이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따금 우리는 말없이 마주 보곤 했는데, 그러다가 결국 세상에 우리 둘뿐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면 더럭 겁이 났다. (중략) 매일 아침, 나는 로자 아줌마가 눈을 뜨는 것을 보면 행복했다. 나는 밤이 무서웠고, 아줌마 없이 혼자 살아갈 생각을 하면 너무나 겁이 났다 -p.77
 
열네 살 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모모는 피하지 않는다. 자신도 지쳤지만 곧 죽을지 모르는 아줌마를 끝까지 돌본다. 뇌혈증인 로자 아줌마는 상태가 악화되고, 더 이상 고통 받지 않도록 안락사 시켜 달라 의사에게 매달리지만 거절당하자 결국 그녀의 뜻대로 죽음을 맞이하게 해줄 나름의 방법을 찾아낸다. 그것이 비상식적이고 해괴해 보이지만 아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로자 아줌마를 지켜주고 싶었다.

이런 모모에게는 이웃이 있다. 같은 건물에 사는 하밀 할아버지는 고단하게 살아가는 모모에게 살면서 알게 된 것들을 하나씩 알려준다. 고귀한 삶과 저급한 삶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은 나름의 아픔과 고귀함이 있음을, 삶이란 그러한 어려움을 견뎌 내는 것임을.
 
하밀 할아버지는 빅토르 위고도 읽었고 그 나이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경험이 많았는데, 내게 웃으며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p.93
 
이뿐만 아니다. 세네갈의 권투 챔피언이었지만 지금은 동성연애자들을 상대로 돈벌이를 하고 있는 여장 남자인 롤라 아줌마는 돈을 나눠주고 음식을 가져다준다. 카츠 선생님, 자움씨네 형제들, 왈룸바 씨와 동료들도 로자 아줌마를 보살피는 데 기꺼이 앞장선다. 빈민가에 함께 살고 있는 이방인이라는 공통점으로 서로의 어려움과 외로움을 이해할 수 있었으리라.

러시아 태생 유태인이며 전직 외교관이었던 작가는 비주류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꽤 관심이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작가는 14살 모모의 눈을 통해 인종이나 종교가 다른 이민자들이 서로 베풀어 살아가는 모습과 인간애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모모의 성장기이면서 동시에 모모의 눈을 통해 보여주는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작품의 원제목은 '앞으로 남은 생'이다. 주인공에게 앞으로 펼쳐질 생은 어떤 모습일까. 작품 중간에 자신의 상황을 안타깝게 듣고 있는 나딘 부부를 보며 '그들은 산다는 것에 대해 도대체 아는 게 없는 것 같았다(p247)'라고 말하는 모모는 이미 삶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삶은 고단함과 외로움이었기에, 지금부터의 삶은 그동안 알지 못한 기쁨과 행복이길 기대한다.

언젠가 모모는 하밀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느냐고. 할아버지는 어릴 때는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게 더 나은 일들이 있다고 대답하지만 모모는 그 의미를 직감한다. 그리고 로자 아줌마의 죽음과 새로운 가족을 만나며 확실히 알게 된다.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1975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꽤 개방적이다. 아직도 완전히 합의되지 못한 우리 사회의 문제를 선입견 없는 아이의 눈으로 보여준다. 여장 남자인 롤라 아줌마는 요즘 말로는 트랜스젠더이다. 그런 롤라 아줌마를 보며 모모는 그녀처럼 좋은 엄마가 될 것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그런 그녀가 엄마가 되는 일을 조물주가 반대하고 있다는 게 유감스럽다 말한다.

또 로자 아줌마의 고통을 보며 법으로 금지된 안락사지만 이를 통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고통스러운 삶에서 구해주고 싶다고 말한다. 여전히 사회적 합의를 이루지 못한 문제를 40년 전 작품에서 다뤄 문제의 본질을 생각하게 하는 작가의 안목이 대단하다.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문학동네, 2003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로맹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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