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신매매 피해 노동자들이 영화에 출연한 이유

인도네시아 인권활동가 마이지다 살라스 이야기②

등록 2018.10.23 17:30수정 2018.10.23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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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국무부가 인신매매(TIP) 보고서에 따라 매해 선정하는 올해의 '인신매매 방지 활동 영웅'에 선정된 인도네시아 인권활동가 마이지다 살라스(Maizidah Salas, 이하 살라스)가 지난 주 한국을 방문했다. 기자는 외국인이주노동운동연합회와 아시아이주노동자포럼(MFA)이 주최한 '고용허가제 논의를 위한 아시아시민사회 회의'(10월 16~17일)와 '2018 광주인권도시포럼(10월 18일~ 21일)'에 참석한 살라스와 4일간 동행하며 인신매매 방지 활동을 하게 된 경위 등에 대해 들었다...기자말

살라스는 산업기술연수생으로 신분증 압류, 강제 적립, 외출 금지 등의 인권 침해 환경 속에서도 크게 위험하다고 느끼지 않았다고 했다. 비록 한국으로 올 때보다 더 많은 빚만 안고 강제출국 당했지만 한국을 좋게 생각했을 정도였다.

현대판 노예제도라 비판받던 산업기술연수생 제도는 2004년 외국인 고용허가제가 도입되며 폐지되었다. 20년 전과 비교하면 이주노동자 현실은 마땅히 좋아져야 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이주노동자들로부터 듣는 소식은 암울했다. 살라스로부터 다시 한국을 찾은 이유를 들어보자. 

한국에서 못 다 이룬 꿈, 다시 떠난 이주노동

누군가에게는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던 어쩔 수 없는 선택마저도 또 다른 누군가에는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한국에서 가장 가난한 집 아이들이 일하며 공부하는 모습을 부러워했었고, 그로 인해 큰 자극을 받았다. 

한국에서 마음먹었던 대로 공부하려고 해도 빚만 안고 귀국했던 터라, 또 다시 이주노동을 선택해야 했다. 송출 브로커는 한국에서 공장생활을 했으니 대만에서도 공장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대만에도 방직이나 원단을 다루는 섬유산업이 발달해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배운 기술이 도움될 거라는 말도 했다. 그렇게 대만으로 가기까지 모든 서류 준비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출국 전 교육에서 군사훈련이 없었을 뿐 송출 과정은 대만이라고 해서 한국과 다를 게 없었다. 여권은 송출업체에서 압류해 버렸고, 출국 전까지 계약서는 무슨 내용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대만에 도착하고 나서야 계약서를 보여주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처음 배정받은 공장은 섬유와는 전혀 관련 없었다. 무슬림 입장에서는 피하고 싶은 돼지고기 가공 공장이었다. 돼지고기를 자르고, 창자에 뭔가를 집어넣고, 20~40킬로들이 고기박스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르는 일을 반복해야 하는 공장이었다. 


쉽지 않은 힘든 일이었지만,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문제는 숙소였다. 공장 건물과 건물 사이 계단 아래에 설치된 숙소는 남자들이 지나다니며 기웃거리기 일쑤였다. 같이 자는 동료가 있었지만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일로 관리업체에 연락했지만, 그런 이유로는 사업장 변경이 안 된다고 못 박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장 아들이 정수기에서 물을 먹으려고 하다가 무슨 이유에선지 나에게 컵을 집어던졌다. 그 모습을 사장 부인이 보았다. 사장 부인은 자기 아들이 잘못된 행동을 한 이유를 캐묻지 않고 나를 해고했다.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두 번째 배정받은 회사는 원단 절단업체였다. 한국에서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사장은 일을 능숙하게 하는 나를 신임했는지, 2주 만에 핸드폰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줬다. 석 달째 되었을 때 관리업체에서 찾아왔다. 처음 배정받았던 공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그 공장에서 외국인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출국해야 할 거라고 협박했다. 돼지고기 가공 공장으로 돌아가기 싫었다. 

결국 한국에서와 같은 결심을 해야 했다. 업체를 이탈하고 산 속에 있던 빌라에서 친구들과 생활하며 공장 일을 했다. 대만에서 업체 이탈 후에 겪은 일들을 다 이야기하려면 한도 없다. 여자로선 수치스러운 끔찍한 일도 겪었고, 반복되는 치근거림이 싫어서 어떤 날은 논두렁에서 잠을 자고 일을 가기도 했었다. 고작 한 달 일하고 불법체류자라고 월급도 못 받고 내쫓기는 일은 예사였다.

그때 나를 도와주고 함께 해 준 사람들이 지금도 알고 지내는 이주노동자 지원활동가 동지들이다. 그들은 교회가 운영하는 쉼터에서 이주노동자 권리에 대해 이야기했고, 권익 투쟁을 제안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싸우자던 그들은 늘 당하기만 하던 나와 달랐다. 

그때 만났던 이주노동자들 중에 나중에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조합(SBMI)에서 간부로 일하던 사람이 있었다. 4년 7개월을 대만에서 일하고 귀국했을 때 그가 나를 불렀다. 자카르타에서 4년을 훈련받았다. 노동운동가로, 조직 활동가로 훈련받으며 고등학교도 졸업했고, 대학도 법학을 전공하여 마쳤다. 
 

지역사회 역량 강화 교육 이주노동자조합 지부에서 지역사회 역량 강화 세미나를 진행하는 살라스 ⓒ 살라스

 
인신매매 피해 이주노동자들이 영화에 출연한 이유

대만에서 성폭행과 구타, 임금체불 등을 겪으면서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느꼈다. 해외에서 피해를 입은 이주노동자들은 피해 사실을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지역사회에서는 성공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지, 피해자로 돌아오는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피해자를 비난만 하면서 그 누구도 자신의 일처럼 나서지 않는다는 걸 경험했던 사람이다. 그런 내가 고향에서 귀국한 이주노동자들을 조합으로 묶으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조합이 운영될 수 있냐고 물었다. 

송출업체의 농간으로 인신매매에 준하는 강제노동이나 성폭력 피해를 당했던 이주노동자들이 더 이상 숨지 않고 피해 구제와 예방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면서 조합이 활성화되었다. 지금까지 피해자들이 직접 출연한 영화를 세 편이나 만들었고, 현재 네 편째 제작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했고, 소규모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창업 교육도 하고 있다. 그와 함께 더 이상 피해자들을 비난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역사회를 설득하고, 중앙과 지방정부가 나서도록 싸우고 있다. 

내가 지부장이 되고 15년이 지난 지금 회비를 내는 회원만 천 명이 넘는다. 인도네시아 전체로 봐도 가장 규모가 탄탄하다. 누구든지 24시간 와이파이를 이용할 수 있는 단체 건물을 갖고 있고, 그곳에서 조합원들이 출자한 식료품 가게도 운영하고 있다. 
 

이주노동자조합 식료품 가게 조합원들이 직접 운영하고 있는 식료품 가게 ⓒ 살라스

 
미 국무부 인신매매 방지 영웅 선정이 가져다 준 결과

상을 받았을 때 인신매매와 싸우는데 전념해 온 국제 사회 10개국 수상자들과 함께 인도네시아를 대표할 수 있어서 자랑스러웠다. 노조 중앙본부나 자카르타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아닌 지역 활동가로서 받았는데, 인신매매 방지를 위해 더 큰 열의를 갖고 싸우라는 채찍으로 받아들였다. 
 

트럼프 대통령 장녀 이방카와 기념 사진 세계 인신매매 방지 영웅으로 선정된 후, 일부로부터 몰상식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 살라스

 
사실 상을 받고 나서 마음 상하는 일도 없지 않았다. 미 국무부 인신매매(TIP) 보고서는 각국 정부 보고의 신뢰성과 유용성, NGO와 언론의 주장 근거 취약성, 일관성이 결여된 미국 중심 시각이 섞여 있다는 취약점을 안고 있다. 이 때문에 한편에서는 인신매매 숫자와 등급 결정에 의문을 제기한다. 미국의 외교 압박 수단일 뿐이라며 평가절하 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방카 원숭이가 되니 좋으냐"며 대놓고 비꼬기도 했다. 

그런 빈정거림과 비난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다. 미 국무부로부터 상을 받고 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졌다는데 만족한다. 수상 이후에 조꼬위 대통령 부인의 초청을 받았고, 노동부를 포함하여 세 부처 장관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그들에게 이주노동자 출국 전 교육과 귀국 후 사회재정착 지원 필요성을 역설했다. 시민운동을 하면서 장관이 먼저 달려와서 경청하는 경우를 처음 경험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중부 자바와 말랑주에서는 주지사와 부지사가 아주 적극적으로 나서서 귀환 이주노동자들을 어떻게 지원할 수 있는지를 물어왔다. 말랑주 같은 경우는 내년부터 임기가 시작하는 부지사 당선인이 직접 초청하더니, '세계인권도시포럼' 참석차 한국에 와서까지 만나자는 연락을 해 왔다. 한국에서는 아시아시민사회회의 외에도 인도네시아 선원노조에서 실태 조사를 요청해 왔다. 내가 다시 한국에 올 일이 있을 줄 상상도 못했었다. 그런데 현실이 되었다. 
 

2018 세계인권도시포럼 인도네시아 말랑 주 부지사 당선인(Chusnunia Chalim, 우측 세 번째)와 살라스(우측 두 번째) ⓒ 살라스

 
한국에 와서 말랑주 부지사 당선인과 인도네시아 선원노조 위원장과 함께 두 시간 넘게 식사를 하면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인도네시아에서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기로 했다. 관료들이 이렇게 적극적인 경우는 별로 없다.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진전이다.  

세계 인신매매(TIP) 보고서와 미 국무부가 주는 상을 평가절하 해도 좋다. 하지만 인신매매 방지를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최소한의 기준과 규정도 갖추지 않은 나라에서는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인도네시아 정부나 국민들이 그런 노력을 얼마나 기울여 왔는지 먼저 물어봐야 한다. 

현대판 노예제도 폐지한 대한민국, 이주노동자 현실은…

한국도 TIP 보고서에서 항상 1등급을 받았던 것은 아닌 걸로 알고 있다. 1등급을 받는 지금도 개선해야 할 점이 많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고용허가제 논의를 위한 아시아시민사회회의'나 광주에서 만났던 인도네시아 선원이주노조위원장이 전해준 이야기들은 TIP 보고서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재료다. 

대한민국 이주노동자 인권 현실은 20년 전보다 훨씬 나빠졌다. 내 경험에 따르면 산업기술연수생들은 최소한 제대로 된 기숙사에서 숙식을 제공받으며 일했다. 반면, 고용허가제 노동자들은 숙식비를 공제한다고 들었다. 농어업 분야에서 숙소라고 하는 곳들을 사진으로 봤을 때 믿기지 않았다. 숙소에 자물쇠도 없고, 있다 해도 고용주가 임의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내가 대만에서 살아봤기 때문에 그런 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제도도 바뀌고 경제도 발전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선원이주노동자조합에서 보여준 사진은 끔찍했다. 내가 한국에 와 있는 동안 인도네시아 선원이 두 명이나 선상에서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고작 나흘 동안에 벌어진 일이다. 물론 그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는지 모르지만, 선원이주노동자들에게 사망 사고조차 일상이다. 대사관에서는 이주노동자 사망사고나 권익 옹호 활동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주노동자들은 한국 사람을 부러워한다. 이주노동자 중에도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합법체류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을 부러워한다. 한국에 오고 싶어서 한국어공부를 하는 예비 이주노동자들은 체류 자격이야 어떻든 이미 한국에 와 있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인신매매는 제대로 된 정보도 없으면서 막연한 동경이 있는 곳에서 일어나기 쉽다. 그렇다고 그런 사람들을 함부로 다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지금 고용허가제는 사람을 함부로 다루고 있다. 바뀔 것은 바뀌어야 한다. 인도네시아로 돌아가서도 한국 고용허가제가 갖고 있는 문제점들을 계속해서 살피면서 대응해 나가도록 하겠다. 
 

고용허가제 철폐 캠페인 아시아시민사회회의 참석자들과 함께 고용허가제 철폐 캠페인 벌이는 살라스 ⓒ 고기복

     
#이주노동자 #산언기술연수생 #인도네시아 #세계인신매매(TIP)보고서 #고용허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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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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