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도 무해한 사람, 진짜 있었네

[명랑한 중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등록 2018.11.02 19:53수정 2018.11.02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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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에 비례해 현명함이 저절로 생긴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늘 갈등하고 잘못하고 후회하고 배우며 살아갑니다. 오늘 실수하고 내일은 그만큼 지혜가 쌓이는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중년의 좌충우돌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인천 지역 주간지에 글을 보내고 있다. 미술작품 작가를 둘러싼 이야기를 소개하는 글이다. 연재를 시작한 지 6개월이 넘었지만 편집자에게 전자우편으로 기사를 보내기만 할 뿐 신문사 관계자 얼굴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지난주 편집자에게 전화가 왔다. 신문사 15주년 기념식에 외부 필진 자격으로 초대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어떤 곳에서 어떤 사람들이 일하는지 궁금하던 차에 연락이 와 흔쾌히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주겠다'고 약조했다.


'자리를 빛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 됐다. 드레스를 입고 가는 건 좀 오버고. 그래도 처음 뵙는 자리이니 성의 있는 모습으로 가고 싶었다. 고민 끝에 파마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머릿결이 좋지 않아 십 년 동안 파마를 안 했다. 변화가 없어 지루했는데 이번 기회에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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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머리를 풀었는데, 머릿결 때문인지 얼굴이 문제인 건지 잡지와는 매우 다른 형태가 나왔다. ⓒ unsplash

 
패션잡지에서 예쁘게 파마한 모델 사진을 부욱 찢은 다음, 그걸 들고 친구가 운영하는 미용실에 갔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자르고 돌돌 말기 시작했다. 다 말고 나서 머리에 스탠드 갓 같은 걸 쓰고 있으니 기대도 되고 좀 웃기기도 했다.

지루한 기다림이 끝났다. 드디어 머리를 풀었는데, 머릿결 때문인지 얼굴이 문제인 건지 잡지와는 매우 다른 형태가 나왔다. 너무 정성껏 말아서 그런가. 앞으로 십 년은 절대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빠마'가 나왔다.

머리를 해준 친구가 허둥거린다. "괜찮네, 잘 나왔어." 나 역시 허둥거리며 미용실을 나왔다. 집에 와서 거울을 자세히 보니 자리를 빛내지는 못해도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순 있을 것 같았다.

착한 사람 승희
 

그곳에서 연재를 하게 된 건 글쓰기 수업에서 만난 학인 덕택이다. 내게 아주 고마운 사람. 눈망울이 선한 그는 이미 7년 전부터 그곳에 글을 싣고 있었고, 그의 추천으로 나도 글을 싣게 된 거다.

기념식 당일, 우리는 낮에 만나 영화도 보고 예쁜 카페에서 차도 마셨다. 그리고 시간 맞춰 신문사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퀴즈가 한참 진행 중이었다. 맞추면 경품이 우수수. 난센스 문제와 상식 문제가 번갈아 나왔다. 재밌었다.


진행을 맡은 사람이 내 글을 편집한 분이라고 동행한 학인이 귀띔해줬다. 편집자의 7080식 옛날 유머에 웃다보니 퀴즈가 끝났다. 나는 하나도 못 맞혔고 속상하게 경품도 못 받았다. 본사 직원들, 칼럼니스트, 만화·만평가, 외부 필진 등 총 30~40명 정도 모였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편안한 분위기에 연령층도 다양했다.

그동안 신문사가 유지되는 데 여러 가지로 도움을 준 사람들이 앞으로 나가 한마디씩 했다. 여태까지 해온 것처럼 약자와 소수자의 편에 서서 권력에 물러서지 않고 할 말은 하는 신문사로 성장하자며 서로 독려하고 다짐했다. 이럴 땐 왜 자꾸 주먹이 불끈 쥐어지는지. 정식 직원도 아니고, 기자도 아니고, 그저 문화면에 작은 글 하나 쓰는 주제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시인 한 분이 앞으로 나가더니 시를 한 편 써왔다며 낭송했다. 창간 15주년을 축하하는 시겠거니 생각했는데, 아니다. 제목이 '착한 사람 승희'다. 익숙한 이름. 내 글의 편집자 그 이승희. 

나는 승희씨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그래서 듣고 있자니 살짝 웃음이 났다. 옆을 슬쩍 보니 맙소사, 내 옆의 그녀가 울고 있다. 나를 그 신문사에 소개한 그 학인 말이다. 송아지같이 동그란 눈이 벌겋게 변하더니 맑은 우박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나 빼고 다들 공감하는 듯 고개를 쉴 새 없이 끄덕였다. 시를 낭독하는 시인도 목이 메는 듯 읽다가 잠시 멈칫했다. 이건 왠지 교회 부흥회 분위기. 시가 끝나고 하마터면 '아멘'이라고 할 뻔했다. 고개를 돌려 승희씨를 봤다. 그 착하다는 승희씨는 하필 감동적인 순간에 전화가 와서 통화 중이다. 허리를 구부리고 전화를 받는 모습이 좀 착해 보인다.

대학 총학생회장 출신이라는 그는 "편집국장이 필요하면 편집국장을 하고, 사장을 구하지 못하면 사장을 하고, 사장이 새로 오니 편집국장을 하고, 편집국장이 새로 오니 논설실장을 하고... 그래도 자기는 마음이 편해서 좋다"('착한 사람 승희' 중)는 사람이란다. 신문사를 지키기 위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어떤 역할이든 최선을 다해 해냈으며, 그렇게 고생하면서도 싫은 소리 한번 잘 안 했다고. 

그뿐이랴. 직원들과 후원자들이 모여 MT라도 가면 그는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 뒤치다꺼리를 하고, 아침이면 제일 먼저 일어나 해장국을 끓이고 남은 김치로 전을 부쳐 아침을 차렸다. 신문배달에서 사장까지, 그의 희생과 고생을 7년 넘게 봐온 학인은 옛날 생각에 젖어 끝없이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순순히 내어줄 수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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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가면을 썼다 벗었다 하며 혼란을 겪다가도, 진짜배기를 만나면 불쑥 내 안의 순수함이 깨어나곤 한다. 내 안의 선한 마음을 일깨워주는, 그 누구에게도 무해한 사람. 거울처럼 나를 비추는 사람. ⓒ unsplash

 
개인주의가 외려 미덕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이 있다니. 삶 자체로 주변 사람들을 눈물 흘리게 하는 승희씨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매력은 주로 톡 쏘는 독성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나쁜 남자나 장미의 가시처럼. 이런 매력은 처음엔 강렬해서 시선을 끌지만 너무나 날카로워서 가까이 갈수록 다치기 십상이다. 그런데 승희씨 이 사람은 정반대의 사람인가 보다.

식전 행사가 끝나고 삼삼오오 모여 준비한 저녁을 먹었다. 그는 와인 병을 들고 빈 잔이 보이는 곳에 리필을 하고 다녔다. 누군가 와인의 도수를 묻자, 쓰고 있던 안경을 이마 위로 올리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잔글씨를 읽는다. 나이가 50대 전후인 듯하다. 그 나이가 되도록 사람들의 신뢰를 잃지 않는 비결은 뭘까. 

시간이 오후 열 시를 넘어 서둘러 나오는데 승희씨가 보이지 않는다. 인사도 못 하고 운전대를 잡았다. 백미러를 보며 후진을 하려다 소스라쳤다. "깜짝이야." 나를 놀라게 한 '빠마 귀신'은 바로 나다. 머리는 부스스하고 입가에는 초고추장이 번져 영화 <배트맨>의 조커 같다.

가끔 내가 어떤 사람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착하게 굴려고 하다가도 '저 사람 때문에 손해를 보면 어쩌지' 싶어 이것저것 계산하거나, 부탁에 응하려 하다가도 '나를 착취하려는 건 아닐까' 하고 촉각을 곤두세운다. 순진하게 보였다가는 나만 다칠 것 같아 '나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일깨워 주듯 독한 말도 한다. 착해지고 싶은 마음과 만만한 사람은 되고 싶지 않은 이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보면 진짜 내 모습이 무엇이었나 까마득해지곤 한다.

사람을 한 번 보고 단박에 판단하긴 어렵다. 하지만 그를 20여 년 지켜봐왔다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지인들이 전해준 일화를 들으며,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느껴졌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이것저것 손익을 계산하지 않는 사람,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 궂은 일을 기꺼이 도맡는 사람, 그래서 그 조직의 기둥이 되어주는 사람. 그 누구에게도 무해한 사람. 나는 그날 승희씨를 처음 보고 알게 됐고, 자연스럽게 내 삶을 돌아보게 됐다.  

원고료 인상을 약속받은 것도 아닌데 오늘은 괜히 마음이 부자가 된 듯하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이 재산이니까. 그리고 다음에 이런 자리가 생기면 반짝이 의상이나 미러볼을 들고 가서 자리를 빛내줘야겠다. 나도 나를 보며 놀라는데 본의 아니게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
#시사인천 #착한 사람 #명랑한 중년 #주간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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