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익, 나혜석, 윤이상... 이들의 공통점

[아빠와 함께 쓰는 파리여행기 24] 우리보다 먼저 파리를 다녀간 한국인들

등록 2018.11.02 16:15수정 2018.11.02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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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선에서 내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파리 제1구의 셍트안느로(Rue Sainte-Anne)에 있는 한국 식료품점인 K마트에 들르기로 했다. 아빠가 그걸 원하셨다. 가게는 팔레루아얄 왼쪽에 있는데 우리가 하선한 장소에서는 도보로 한참 걸어야 했다. K마트의 인근 메트로역 이름은 '피라미드(Pyramides)'다.
 
"우버를 부를까요?"
"아니다, 걸어가자. 구경도 할 겸."


튈르리정원을 거쳐 셍트안느로로 접어드니 일본 레스토랑이 자주 눈에 띈다. 프랑스인의 일본 사랑이 만만치 않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있는데 정말 그런가보다 싶었다. 하지만 인근엔 한국 식당들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이곳 일본식당은 가지 말라는 인터넷 글을 보았어요. 대개 중국인들이 영업하는 거라 맛이 좀 그렇대요. 차라리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 식당에 가는 게 낫다더군요."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저 일본 식당 상호는 'Tomo'인데 친구 붕(朋)자를 썼다. 일본인이라면 친구 우(友)자를 썼을 텐데 아무래도 식당 주인이 중국인이란 얘기지."


한자에 약한 나는 아빠의 말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K마트는 손님들로 붐비고 있었다. 한국인도 있었지만 프랑스인이 많았고, 동남아인도 보였다. 값은 서울보다 약간 비싸다는 정도였다. 아빠는 김치와 고추장, 된장, 두부, 양념, 참치 통조림 등의 식재료를 사셨다. 그리고 아파트로 돌아가는 길에 들른 프랑스 식품점에서 나는 내일 아침 먹을 샐러드, 드레싱, 과일, 훈제 연어 등을 샀다.
 

파리의 식품점 ⓒ 강재인


"오늘 저녁은 내가 하마."

그렇게 선언하신 아빠는 그날 저녁 참치와 두부를 넣고 김치찌개를 끓이셨다. 젊은 시절 등산 다닐 때 끓이던 방법이라면서. 하지만 나는 그게 아빠가 내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그러시는 것인 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어떠냐?"

아빠가 내 눈치를 살피며 물으셨다. 목소리를 한 옥타브 올려 맛있다는 점을 강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음식을 준비한 상대방을 기분 좋게 만들지 않을까 싶었다.


"맛있는데요."

내가 목소리를 한 옥타브 올려 호들갑을 떨자 아빠도 좋아하시는 눈치였다. 식사가 끝난 뒤 방안의 음식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창문을 활짝 열었다.

"어디 산책하러 좀 나가시겠어요?"
"그럴까?"


아빠가 흔쾌히 동의하셨다.

함께 아파트 밖으로 나가니 거리는 온통 카페투성이였다. 노천 테이블에서 수많은 파리지앵들이 커피나 와인 또는 간단한 음식을 시켜놓고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작은 골목길이어서 그런지 건물들에 공명된 그들의 수다가 마치 개구리 울음소리처럼 와글와글 들렸다.

"허허, 굉장하구나."
  
파리에 카페가 많은 까닭
 

아파트 주변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파리의 카페들 ⓒ Zoetnet, Flickr

 
아빠는 조금 놀라신 눈치였다. 지난번 가본 '카페 드 플로르'나 '카페 레 되 마고'처럼 넓은 광장에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다. 아파트 주변에 다닥다닥 붙은 카페나 빈틈없이 건물들이 들어찬 마레의 아파트 지역을 구경하고 나서야 나는 파리에 왜 그렇게 카페가 많은지, 그리고 왜 파리지앵들이 카페에 나와 앉기를 좋아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파리는 전 시가지가 대략 20미터 높이의 건물들로 연결돼 있다. 이 건물들 사이로 불르바르(Boulevard)나 아브뉘(Avenue) 같은 대로가 뚫려 있으면 괜찮지만, 뒤쪽의 로(Rue)나 작은 골목길로 들어가 높이 20미터의 건물들이 잇대어진 아파트들 사이에 놓이면 마치 감옥에 갇힌 듯한 느낌이 든다.

옆 골목으로 돌아서면 거기도 높이 20미터의 아파트들이 빈틈없이 잇대어져 있고, 뒤로 돌아 방사선으로 난 골목길로 가면 거기도 높이 20미터의 건물들이 죽 늘어서 있다. 나는 출구가 없는 미로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았다.
  

20미터 높이의 아파트들이 사면발방으로 뻗어 있는 파리 시가지 ⓒ Aleksandr Zykov,flickr

  
너무 답답해 미칠 것 같다는 심정으로 걸어 나오다가 사거리의 광장을 만나면 비로소 답답한 가슴이 뻥 뚫렸다. 파리의 광장은 이래서 필수적인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파리의 아파트들은 잇대어 지어졌기 때문에 햇볕이 방에 잘 들지 않는 것은 물론, 통풍도 잘 되지 않는 편이었다. 이런 아파트에 갇혀 살면 답답함 때문에 자연스럽게 카페로 나오게 되지 않을까?

"아빠! 어디 좀 앉으시겠어요?"
"그러자꾸나."


아빠와 나는 비교적 한산한 카페에 들어가 와인을 주문했다. 기분 좋은 밤이었다. 적당히 선선한 밤 기온과 와인... 아빠가 술잔을 기울이며 물으셨다.

"파리를 관광한 소감이 어떠냐? 허전한 느낌 같은 것은 없데?"

나는 아빠가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그냥 쳐다보기만 했다.

"옛날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갔을 때, 기차역에서 내리자마자 람블라(La Rambla)거리를 찾아갔다."

아빠는 람블라 거리의 카페들을 보시기 위해 그곳에 갔다고 한다. 스페인내전을 앞둔 1930년대의 그 거리엔 유럽과 미국의 작가와 시인, 지식인, 무정부주의자 및 분리주의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높은 이상과 불 뿜는 열정 속에서 밤마다 피어오르던 음모와 혁명의 불길은 결국 그들 자신의 소멸을 가져온다는 아이러니를 맞게 된다. 죽음과 종신징역의 운명 아래서 당대의 주역들이 호흡하던 공간을 한번 꼭 보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그런데 아빠가 방문하셨던 1970년대 말에는 람블라의 낭만적인 카페들이 상당수 문을 닫고 대신 자동차판매점의 쇼룸이나 가구점, 또는 옷가게 같은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가슴이 허전하던지. 머릿속에 자리 잡은 환상과 현실이 어긋날 때 생기는 허전한 느낌 말이다."
"전 이번 파리 여행에 만족해요. 프랑스 문화와 역사를 만나는 대목이 많아서 좋네요."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헤밍웨이는 이런 말을 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은 자기 집과 파리 두 곳뿐이다(There are only two places in the world where we can live happy: at home and in Paris).'"
 

파리에 대한 극찬이다. 장 메랄(Jean Méral)이 쓴 <미국 문학에서의 파리>란 책을 보면 1824년부터 1978년까지 파리를 무대로 한 미국 소설이 2백 편 넘게 생산됐다고 한다. 그런 점은 영어 단어에서도 느껴진다. 가령 미국에서 쓰는 resumé(이력서), connoisseur(감식전문가), amateur(아마추어), gourmet(미식가), raison d'être(존재 이유), bouquet(꽃다발) 같은 단어는 다 불어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본 사요궁 말이다. 그곳에 있는 사요국립극장에서 최승희가 무용공연을 한 것이 1938년이라고 했잖아? 최승희처럼 우리 이전에 파리를 밟은 한국인들은 누가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니?"
"궁금하죠. 하지만 파리에 오는 한국인이 하도 많으니까."
"아니, 요즘 관광객 말고."
"누가 있었죠?"
 

파리 땅을 처음 밟은 한국인

파리 시가지를 처음 밟은 한국인은 1883년 보빙사절단의 정사였던 민영익과 그 수행원인 서광범, 변수 등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미국 보스턴대학에서 공부하던 유길준이 귀국길에 파리를 들렀는데 그것이 1885년이고.
 

한국인으로서 파리 시가지를 처음 밟았던 보빙사절단의 정사 민영익 ⓒ wikimedia commons

  
유길준 뒤엔 김옥균을 암살한 홍종우가 있었다. 그는 유길준이 파리를 방문한 지 7년 뒤인 1890년부터 약 2년 반 동안 파리에 살았다. 일본에 건너가 신문사 식자공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자비유학을 했다고 한다. 프랑스어도 일본에서 배웠던 모양이다.

프랑스 법을 공부하려고 소르본대학 근처에 숙소까지 마련했지만 입학이 잘 안 되었던지 대학에 다니는 대신 기메(Guimet)박물관 촉탁으로 취직해서 <춘향전>을 <향기로운 봄(Printemps parfumé)>, <심청전>을 <다시 꽃피는 고목(Le bois sec refleuri)>라는 제목으로 번역본을 냈다는 것이다. 이로 보면 꽤 지식이 있었던 모양인데 파리 생활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게 아쉽다고 아빠는 말씀하셨다.
  

약 2년 반 동안 파리에 살았던 홍종우 ⓒ wikimedia commons

 
"민영환도 파리에 왔었다는 얘기가 있던데요?"
"맞아. 유럽 6개국 특명전권공사로 파리를 방문한 것이 1897년이었지."
"그다음은 누구예요?"


해방 후 동국대 총장을 역임한 백성욱이다. 그는 1920년 파리의 보베(Beavais)고등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또 문교장관을 지낸 김법린이 1921년 소르본대학에 입학해 철학을 공부했고, 철학자 정석해가 1924년 역시 소르본대학에 입학해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다가 화가 나혜석이 파리로 유학 온 게 1927년이고.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문필가였던 나혜석 ⓒ wikimedia commons

 
"어떻게 왔어요? 자비였어요?"
"남편 김우영이 만주 안동현의 부영사였는데, 일본 정부로부터 특별 포상을 받아 부부가 함께 해외 위로여행을 왔다더라. 그 길로 나혜석은 미술을 공부하다가 1928년 파리에 온 천도교 교령 최린과 사랑에 빠져 남편과 이혼했다."
"그 시절에도 그런 일이 있었군요. 다음은 누구예요?"


해방 후 프랑스 공사, 농림부 장관 등을 역임한 공진항으로 1931년인가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했다. 그 다음은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일본 고등문관 외교관 시험에 수석 합격한 장철수라는 사람이다. 해방 전 조선인으론 유일한 직업외교관이기도 했다. 그 장철수가 1930년대 초 파리의 일본대사관에 근무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다음은 1938년 사요국립극장에서 무용공연을 한 최승희와 그 남편 안막.

그 다음은 6.25의 전쟁 상처를 안고 파리로 온 화가들이었다. 이를테면 이성자(1951), 김환기(1956), 남관(1958), 권옥련(1958), 이응노(1958), 한묵(1961), 방혜자(1961), 김창렬(1968) 등이다. 한편으론 안응렬, 이휘영, 김붕구, 오현우, 이환, 방곤, 박이문 등의 불문학자들도 유학을 왔다고 한다.

"작곡가 윤이상도 파리에서 공부하지 않았어요?"
"그랬지. 1956년 파리음악원에 입학해서 음악 이론을 배웠다더라."
"피아니스트 백건우는요?"


"1980년대 이후지.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 지휘자 정명훈 등도 파리에 왔었고. 현재 활동하는 화가로는 우리가 잘 모르는 분들도 많고. 또 파리에 유학한 학생들도 상당히 많을 거고."
"정말 많겠네요."
"거기다 수많은 관광객을 생각해봐라."


본래 땅 위엔 길이 없었지만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라고 루쉰(魯迅)이 말했는데, 이제 서울과 파리 사이엔 아주 큰 길이 만들어진 것이다. 첫걸음을 뗀 지 135년 만에. 깊어가는 파리의 밤공기 속에 갑자기 시간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파리를 디딘 수십만 또는 수백만 한국인들의 발자국들에 담긴 시간을 모두 합친 무게감이...
#파리한국인 #파리역사 #파리여행 #파리인물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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