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만 보고 달렸다, 뒤돌아보면 죽는다

[탈북청년 12] 함경북도에서 온 김필주 이야기 (상)

등록 2018.10.30 07:49수정 2018.10.30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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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입국한 3만 명의 탈북자 중 대다수가 청년이다. 하지만 학교, 직장 어디를 가나 따라다니는 '탈북'이라는 꼬리표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청년들에게 큰 무게이다. 북한이라는 뿌리 없이 이들의 삶을 말할 수 없지만, 이제는 탈북자보다는 한국인 청년으로 불리고 싶은 7인을 만났다. 각 스토리는 <미디어눈> 에디터들이 탈북청년들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기사에 사용된 이름, 나이, 지명은 북에 남겨진 가족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 일부 수정이 있었음을 사전에 밝힌다. - 기자말

#1 나의 살던 고향은

내가 살던 고향은 함경북도 북동부에 있는 새별군(현재 경원군)이란 동네다. 우리 동네에서 4~5km만 가면 두만강 하류가 흐르는 국경지역이 보였다. 두만강 하류의 강폭은 한강의 두 배정도로 넓었고 물살이 사나웠는데, 워낙 날씨가 추워 겨울이면 강이 꽁꽁 얼곤 했다.

열일곱, 굶어 죽지 않으려고 처음으로 탈북을 생각했던 나이다. 고난의 행군(*북한이 김일성 사망 이후인 1990년대 중후반 국제적 고립, 자연재해 등으로 겪게 된 극심한 경제난) 후 여전히 배고픔에 시달리던 때였다. 어느 날 어머니가 잠시 중국에 다녀올 것이라고 하셨다. 같이 살던 새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어머니도 없이 배고픈 땅에 남겨지는 것은 지옥과 같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나를 데려갈 수 없다고 했다.

"어머니, 나도 데려가요. 여기 있는 것보다 차라리 두만강 건너다 빠져 죽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진심이었다. "그래, 가자…." 어머니는 마지못해 나를 데려가기로 했다. 어머니의 손목을 꼭 붙들고 그렇게 국경을 넘었다.
 

삽화: 김하늘 에디터 ⓒ 미디어눈

 
#2 첫 탈북 그리고 북송

어머니는 강한 사람이었다. 쌀죽도 못 먹어서 하루에도 굶어 죽는 사람이 여럿 생기는 어려운 때에도 장사를 해서 우리 가족을 먹여 살렸다. 어머니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집을 떠날 때 혼자 남겨진 새아버지에게 죄책감을 안 느꼈던 것 같다.

"엄마는 이 집에서 할 만큼 했다. 이제 내 살길 찾아가련다."


이전에도 중국에 와봤던 어머니는 머물 곳을 구하고 바로 일을 시작했다. 어머니가 일하는 동안 나는 열심히 중국어를 공부했다. 중국어를 할 줄 알아야 신분을 숨기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겨울 어느 날, 집에서 김장을 갓 끝낸 배추김치를 찢어 먹으려던 참이었다. 군복을 입은 변방대(*국경경비대) 사람 세 명이 집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쿵쿵 쿵쿵. 문 두드리는 소리에 맞춰 내 심장도 뛰기 시작했다. 쿵쿵 쿵쿵.

"너 집이 어디니?"라는 중국어가 들렸다. "너 고향이 어디야?" 낮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탈북을 시도한 뒤 죽기 살기로 공부했던 중국어가 입에서 한마디도 떨어지지 않았다. 어설프게 간신히 중국어를 뱉었는데 눈치를 챈 변방대 사람이 한국어로 말했다. "옷 입어라." 조선족 출신이었다. 어머니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두려움에 떨며 어머니만 바라보았다. 어머니도 체념한 듯 보였다. 어머니는 잠시만 옷을 입고 나오겠다며 나를 데리고 방에 들어가서 있는 대로 내게 옷을 껴입혔다. 움직이기조차 어려울 만큼 여러 개의 옷을 껴입어서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흘렀다. 군인은 어머니와 나를 집 밖으로 끌고나와 변방대 보호소로 데려갔다.

나중에서야 알았는데 어머니는 북송되면 감옥에서 맞아 죽든 추워서 죽든 둘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계셔서 일부러 옷을 많이 껴입히셨던 것이다. 게다가 감옥에서 옷을 식량과도 맞바꿀 수 있기 때문에 입고 있는 옷이 자산이라고 하셨다.

나중에 알게 된 또 다른 사실은 우리를 신고한 것이 새아버지라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배신감을 느낀 새아버지는 북한에서부터 어머니와 내가 탈북을 했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냈다. 그리고 그걸로 모자라 수소문 끝에 중국에 있는 어머니의 친척 집을 알아낸 뒤 중국으로 건너와 중국 공안에 신고했다. 새아버지를 포함해 우리 세 명은 북으로 이송됐다.

#3 피가 나야만 살 수 있다

나는 선천적으로 피가 잘 멈추지 않는 혈우병을 앓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내가 열두 살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지만, 다행히도 그때까지 잘 버티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변방대 보호소에 잡혀 있던 중 갑자기 코피가 줄줄 흘렀다.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많이 긴장해 있던 탓이었다. 그런 나를 보고 어머니는 말했다.

"아들아, 신이 도왔다."

어머니는 피가 나는 내 모습에서 탈출의 기회를 봤던 것이다. 그 이유는 병원으로 호송되는 것이 마지막 탈출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탈북자들이 북송되기 전에 쇠꼬챙이나 옷핀 같은 걸 챙겼다가 일부러 삼켜서 쓰러진다.
 

삽화: 김하늘 에디터 ⓒ 미디어눈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어머니의 기대와 달리 멈추지 말아야 할 코피가 멎고 말았다. 어머니는 한숨을 크게 쉬더니 감시카메라를 등지고 내 코를 주먹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퍽 퍽 퍽.

피가 나야만 살 수 있다. 북송의 두려움은 고통을 압도했다. 어머니를 따라 나도 내 코를 힘껏 때렸다. 피가 바닥에 쏟아졌다. 피가 나자 어머니는 있는 힘껏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보호소를 지키고 있던 공안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우리의 계획과는 달리 나를 병원에 보내지 않았다. 다행히 어머니가 밤새 간호해준 덕분에 코피는 멈췄다.

다시 해가 떴다. 어머니는 이번에는 내게 죽어가는 척 연기를 하라고 했다.

"아이고 필주야, 우리 필주 죽어가네! 아이고 내 아들 죽네!"

우리를 끌고가던 군인은 내게 정신 차리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다가가 몸을 뒤지며 가지고 있는 돈이 있는지 확인하고, 저항하는 어머니를 때렸다. 우리의 몸부림에도 별다른 방도가 없었고, 결국 북으로 이송됐다.

새아버지는 어머니와 나를 중국에서 잡아오기 위해 탈북한 것이라고 자백하고 면죄부를 받았다. 나도 새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어머니는 감옥에서 얇은 옷만 입은 채 한 겨울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새아버지와 일분일초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았을 어머니였지만, 집 말고는 돌아올 곳이 없었다.

#4 다시, 탈북

어머니와 나는 중국으로 다시 갈 생각밖에 없었지만, 이미 북송을 겪고 감시의 눈초리가 심해져서 탈북은 더욱 어려워졌다. 우리는 새아버지 몰래 달아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어머니는 급하게 북송되면서 중국에서 받아야 할 돈을 다 못 받았다고 새아버지에게 말했다. "아이고, 큰 실수 했네." 새아버지는 아쉬워했다.

어머니는 내게 중국 돈 10원과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주고 먼저 집을 떠났다. 둘이 같이 떠나면 새아버지가 의심을 하고 안 보내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머니가 적어준 전화번호를 셀 수 없이 되뇌며 외우고 난 후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쪽지를 갈기갈기 찢었다.

다행히 새아버지는 나를 어머니를 다시 만날 유일한 수단으로 생각했는지 평소보다 잘 대해 주었다. 3월 말, 겨울이 끝나가면서 두만강 물이 녹기 시작했다. 북송 과정에서 무릎에 무리가 와 움직이는 것이 불편했지만, 하루빨리 두만강을 넘고 싶단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새아버지에게는 카드놀이를 하러 친구 집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두만강으로 향했다. 미리 어머니와 연락을 하고 강 근처에서 브로커도 섭외해뒀다. 기대에 부풀어 브로커를 만났는데, 브로커가 청천벽력 같은 말을 했다.

"올해는 얼음이 유난히 일찍 녹아서 가기 힘들겠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집으로 돌아가느니 강물에 빠져 죽는 게 낫단 생각이 들었다. 브로커는 내가 잘못되면 어머니한테 할 말이 없다며 곤란해했다.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나는 어떻게 되든 내가 책임을 지겠다는 서약서를 썼다.

탈북하려면 국경을 지키는 군인들이 밥을 먹는 30분을 이용해야 했다.

"지금이다, 나가라!"

브로커가 말했다. 식은땀이 흘렀다. 다행히 강물은 꽁꽁 얼어있었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평소였으면 10분이면 충분히 건넜을 거리였지만, 아픈 다리 때문에 속도를 내기 힘들었다. 30분 정도 얼음을 딛고 건너 중국 땅에 도착했다.

어머니가 준 돈을 꼭 쥐고 택시를 탔다. 중국말이 서툴렀지만, 기본적인 말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택시가 출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택시와 달리 다른 사람들을 꽉 채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출발하려는 것이다. 옆에 모르는 아저씨 한 명과 아이가 탔다. 갑자기 조선말이 들렸다.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걸었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때마침 택시가 출발했다.

십 분쯤 흘렀을까 길을 따라 잘 가는 듯하던 택시가 갑자기 어딘지 모르는 곳에 섰다. 또다시 변방대 군인들이 눈앞에 서 있었다. 옆에 탔던 아저씨가 나를 신고했던 것이었다. 당시에 탈북자를 신고하면 중국에서 한 달 치 월급 정도 되는 돈을 포상으로 주었다. 중국 땅을 밟은 지 10분 만에 모든 게 수포가 되었다.

#5 국경 밖에서 또 잡히다... 하지만

변방대에 끌려온 나를 군인들이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탈북자가 드문 건 아니지만, 갑자기 신고를 받고 잡혀간 탓에 탈북자 수용소가 아닌 군인들 초소로 바로 오게 됐다.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로 자꾸 말을 걸었다. 어떤 군인은 여성의 나체가 담긴 잡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피아오량, 피아오량. (아주 예뻐)" 그게 내가 이해한 중국말 전부였다. '미친놈들.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속으로 생각했다.

나를 3층으로 올려 보내더니 침대에 수갑을 걸어 내 손목을 채웠다. 손목엔 수갑이 채워졌지만, 머릿속엔 도망칠 생각뿐이었다. 어디서 들은 말이 생각나서 엄살을 떨며 수갑을 널널하게 채워달라고 말했다. 수갑을 풀어보려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손목을 조금씩 움직였다. 하지만, 수갑이 오히려 더 조여지고 말았다.
 

삽화: 김하늘 에디터 ⓒ 미디어눈

 
눈물이 흘렀다.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하니 땅이 꺼질 듯 울음이 나왔다. 펑펑 울었다. 시끄러운 탓인지 한 군인이 찾아와 말을 걸었다. 직위가 높아 보였다.

"여기 왜 왔냐?"
조선말이었다. 서러운 맘에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여기 왜 왔냐고?"

어머니를 찾아왔다고 한 번만 살려달라고 빌었다. 어머니가 어디 있느냐고 군인이 물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머니가 어딨는지는 정말 몰랐다. 어머니가 준 번호만 머릿속에 있었고, 어렴풋이 친척 집이 있다는 게 머리를 스쳐 지났지만 말할 수 없었다.

"딱한 사정을 알겠다만, 신고를 받았기 때문에 그냥 놔줄 수 없다. 순찰하다 잡혔으면 몰라도…. 미련 버리고 나갈 준비나 해라."

군인이 말했다.

"만 18세가 되어서 북한으로 돌아가면 감옥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죽은 목숨이랑 다름없습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왔던 길로 되돌아가면 북한에서도 최소한 목숨은 건질 수 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했다. "하……." 군인은 한숨을 뱉으며 밖으로 나갔다.

30분쯤 지났을까? 이번에는 군인 6명이 우르르 다시 들어왔다. 말실수라도 한 것인지 너무 불안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를 하면서 군인들이 나를 쳐다봤다. 왠지 모르게 측은한 표정이었다. 한국말을 했던 군인이 다시 찾아왔다.

"오던 길로 보내주기로 했으니 다시는 여기 오지 마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중국 군인들이 나를 끌고 두만강으로 갔다. 북한으로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절뚝거리는 다리를 끌고 아주 천천히 걸었다. 걷는 동안 저들을 따돌릴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처음으로 기도란 걸 했다. 종교란 걸 몰랐지만, 갑자기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다. 어머니를 폭행하고 내가 다섯 살 때 일찍 이혼하면서 좋은 기억은 하나도 없는 아버지였다. '살아생전에 나한테 잘해 준 거 없잖아. 죽게 생겼는데 나 한 번만 도와줘. 제발.'

도망갈 궁리를 하며 정말 천천히 걸었다. 중국 국경에서는 중국 군인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동시에 멀리 북한 쪽에서 군인들이 군견을 끌고 순찰하는 모습이 보였다. 두만강을 절반쯤 건넜을 때 섬이 하나 있었는데 홍수 때문인지 뿌리째 뽑힌 나무가 쓰러져 생긴 구덩이가 있었다.

구덩이 밑으로 몸을 숨기고 쥐 죽은 듯이 있었다.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중국 군인들이 지프차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젖 먹던 힘을 향해 중국 쪽을 향해 뛰었다. 앞만 보고 달렸다. 뒤돌아보면 죽는다. 가까스로 다시 한번 중국 땅을 밟았다.

(다음화에 탈북청년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 <목숨을 건 마지막 여행이 시작됐다>( http://omn.kr/1bopq )가 이어집니다.)
 

은성 작가 ⓒ 미디어눈

 
덧붙이는 글 취재: 박연희, 윤형 에디터, 글: 윤형 에디터, 삽화: 김하늘 에디터

미디어눈 팀 블로그에도 연재중입니다. https://brunch.co.kr/@medianoon/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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