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혹 잘못되면 그자리에서..."
목숨을 건 마지막 여행이 시작됐다

[탈북청년 13 최종회] 함경북도에서 온 김필주 이야기 (하)

등록 2018.10.30 07:49수정 2018.10.30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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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입국한 3만 명의 탈북자 중 대다수가 청년이다. 하지만 학교, 직장 어디를 가나 따라다니는 '탈북'이라는 꼬리표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청년들에게 큰 무게이다. 북한이라는 뿌리 없이 이들의 삶을 말할 수 없지만, 이제는 탈북자보다는 한국인 청년으로 불리고 싶은 7인을 만났다. 각 스토리는 <미디어눈> 에디터들이 탈북청년들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기사에 사용된 이름, 나이, 지명은 북에 남겨진 가족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 일부 수정이 있었음을 사전에 밝힌다. - 기자말

(지난 회 <앞만 보고 달렸다, 뒤돌아보면 죽는다>( http://omn.kr/1bojg )에서 이어집니다.)

택시를 잡았다. "너, 북한 사람이지?" 진흙 범벅인 몸을 보고 택시기사가 중국어로 물었다.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베이 초센(북조선 사람) 아니에요." 다행히 택시기사는 내가 말한 곳에 나를 내려 주었다. 어머니가 준 중국 돈을 택시 기사에게 내고 거스름돈을 받아 공중전화를 사용하는 곳에 들어갔다. 

중국 땅을 다시 밟기까지 잊지 않으려고 하루에도 몇 번 되뇌었던 전화번호를 눌렀다.

"oo댁 아들 김필주입니다. 저 여기 있습니다……."

얼마쯤 흘렀을까. 어머니가 나오셨다. 그렇게 중국에서의 4년이 시작됐다.

#6 다시 중국


신분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돈을 벌 방법을 찾다가 노래방 웨이터 일을 시작했다. 꾸준히 일을 나가다가 몸이 너무 피곤해서 30분 정도 지각을 한 날이었다. 사장님이 나를 보더니 갑자기 "너, 북조선에 왔지?"라고 물었다. 아니라고 둘러댔지만 분위기가 이상했다. 사장님은 조금 전에 공안이 왔다 갔다고 말했다.

"너희 엄마, 잡혀갔다."

손재주가 좋은 어머니는 사람을 대하는 일에도 굉장히 능했다. 단골손님이 많이 생긴 덕에 돈을 어느 정도 모을 수 있었지만, 이런 어머니를 보고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어머니를 신고한 것이다. 아무리 중국 땅이 넓다 해도 등록되지 않은 사람은 신고 한 번에 추방된다. 이번에는 어머니를 다신 보지 못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언제쯤 이런 삶이 끝이 날지 눈앞이 깜깜해졌다.

하지만 어머니는 북송될 때마다 어떻게든 다시 돌아오셨다. 자그마치 네 번이나 말이다. 게다가 중국에서 올림픽이 열리면서 대대적인 북송 작업이 시작됐다. 더는 중국에서 버티면서 살 힘도 없었고 살고 싶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물었다.

"아들아, 우리 한국 갈까?"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탈북할 땐 한국으로 가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세뇌 교육으로 남한에 적대적인 감정이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에서 지낸 4년의 세월 동안 북한 정권에서 벗어나 살면서 남한 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흐려졌다.

라오스, 베트남, 태국, 몽골 등 한국을 가기 위한 길은 다양했다. 이 중에서 몽골을 거치는 것이 가장 위험하지만 가장 빨리 한국에 가는 방법이었다. 이래도 저래도 죽는 거라면 한시라도 빨리 결론이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몽골행을 결심하고 곧바로 15일 정도를 준비했다. 브로커를 구하고 나니 함께 갈 일행 6명이 생겼다. 큰 상점에 가서 필요한 장비를 샀다. 그 물건 중에는 약도 있었다.

여행하기 전날 어머니는 그 작은 약병 하나를 내게 주었다. 어머니는 온몸을 떨고 있었다. 이 약이 만약을 대비한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아들아…. 혹시라도 잘못되면 그 자리에서 같이 죽어버리자."

목숨을 건 마지막 여행이 시작되었다.
 

삽화: 김하늘 에디터 ⓒ 미디어눈

  
#7 목숨을 건 몽골행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동안 해를 넘겨 20살이 됐고 나의 소년 시절은 가고 청년기가 시작됐다. 끊임없이 펼쳐진 사막 앞에서 막연한 두려움보다 이 순간을 지나서 한국 땅을 밟게 될 생각에 즐겁기까지 했다.

새아버지를 벗어나 처음 탈북을 시도할 때의 마음이 떠올랐다. 브로커는 북두칠성을 향해 사막을 건너가다가 몽골 국경수비대가 보이면 무조건 잡히라는 말을 해주었다. 그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브로커는 한국이 몽골과 교류를 맺어 몽골에 자원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몽골은 발견된 탈북자를 한국으로 이송해준다고 했다.

칠흑같이 어둡고 깜깜한 사막의 밤하늘을 뚫고 크고 작은 별들이 밝게 반짝였다. 북두칠성을 따라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몸은 힘들지만, 자유로움을 느꼈다. 막연한 불안함도 함께 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잡념의 흐름을 끊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렸다. 개 짖는 소리였다. 개가 있다면 분명 근처에 사람이 있다는 얘기다. 소리를 질렀다.

우리 일행은 개가 짖는 방향을 향해 달렸다. 철조망 너머 몽골군이 보였다. 지친 몸으로 있는 힘껏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소리쳤다. 대화가 통할리 없었지만, 몽골군도 무언가를 열심히 말하는 듯했다. 그러다 일행 중 한 명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조그만 태극기였다. 환한 달빛 아래 하얀 태극기가 선명하게 보였다. 몽골군이 알 수 없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우리를 안내했다.

악취가 나는 수용소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모두 탈북자들이었다. 패잔병처럼 쓰러져 있던 어떤 사람의 다리에선 동상 때문인지 진물이 질질 흐르고 있었다. 또 다른 누구는 온몸에 붕대를 둥둥 감고 있었다. 한국에 가면 가장 먼저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소리도 들렸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알고 보니 대부분 일주일에서 길게는 한 달을 사막에서 헤매다가 온 사람들이었다. 어떤 일행은 동행한 13명 중 3명만 살아남았다고 했다.

"목이 말라서 소변을 먹으며 버티다가 쓰러졌는데, 운 좋게도 순찰대가 발견했어요."

옛날 독일, 소련 영화에서나 보던 일이었다. 우리 일행은 중국에서 출발하고부터 24시간이 채 안 돼 군인들을 만났으니 정말 운이 좋은 것이었다.

비행기가 보였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였다. 탑승 직전까지 온몸이 떨렸다. '한국 땅을 밟아 자유를 찾는가, 아니면 이대로 잡혀서 돌아가 죽느냐.' 불안감이 감돌았다.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흔들리면서 날기 시작했다. 엄마와 우리 일행은 그제야 말문이 트였다. 한국에 가까워진 비행기에서 승무원의 안내방송이 들렸다. 한국말이었다. 내가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승객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곧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마시고 내리실 때는 잊으신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시고…. "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뜨거운 것이 머리까지 쭉 올라왔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8. 한국, 내 꿈이 뭐냐고? 

북한을 벗어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넘고 사막을 건넜다. 살기 위해서였다. 북한에서는 출신 성분에 따라서 내 삶은 정해져 있다. 외할아버지가 전주 출신인 나는 적대계층이었다. (* 종교를 갖고 있거나, 남한이나 중국 등지에 가족 내력이 있어서 감시의 대상이 되는 계층)

열여덟 살이 되면 군대에 가고 28~29살쯤에는 중매를 통해 결혼했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대부분 국가에서 배치해주는 농장이나 직장으로 배치받는다. 부모님이 농부였으니 나는 농사일을 하고 있었을 거다. 그렇게 정해진 삶을 살다가 죽는다. 여기서 누군가 내 꿈이 뭐냐고 물었다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꿈같은 소리 하네."

그런데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한국 땅에 발을 내디디며 꿈이란 걸 꾸게 되었다. 탈북해 있는 동안 제대로 못 했던 공부를 하고 싶었다. 남들 다 가는 그 학교란 곳에 꼭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다.

하나원 적응훈련을 마치고 사회로 나가게 되면 바로 대학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북한 기준으로 중학교 2학년 중퇴, 한국 기준으로 초등학교 6학년 중퇴였던 나는 학력을 인정받기 위해 검정고시를 먼저 준비했다. 그리고 긴 노력 끝에 한 대학에 중국어 전공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9. 학생증

학생증을 받은 날, 너무 기뻐서 잠이 안 왔다. 중국에 사는 4년 동안, 매일 아침 일어나면 누운 자리를 확인했었다. 어제 잤던 곳이 맞는지, 혹시 간밤에 잡혀서 어디 다른 곳에 온 건 아닌지. 이제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내게 학생증이 생겼으니까. 열심히 학교에 다녔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한국에 왔는데 죽기 살기로 하면 안 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갑자기 시작된 학교생활이 쉽지만은 않았다. 

탈북자들에게는 '정착 나이'라는 게 있다. 탈북을 한 해부터 한 살이 되는 건데, 대학에 입학했을 때 내 정착 나이 6살이었다. 지금껏 살아온 곳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체제에서 6살짜리가 스물몇 살짜리 애들과 상대하는 것 같았다. 한국 친구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외래어로 이야기하는 것도 골치 아팠고, 교육 수준도 높았다. 그들과의 경쟁에서 자꾸 한계를 느꼈다.

학교 친구들은 중국어는 물론이고 영어까지 잘하고 시험에도 익숙했다. 전공 공부는 재미가 없었지만, 남들보다 한 발 더 뛰면 된다는 마음으로 억지로 3년을 버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약한 생각이 들었다. 한국 사회는 '학연, 혈연, 지연'이라던데, 내가 가진 것이 하나라도 있을까?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다. 

어느 날 같은 친한 동생이 학교에 안 나왔다. 빨리 취직해서 독립하고 싶다며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였다.

"형, 나 취직이 안 돼서 휴학했어." 

그 친구가 휴학한 이유를 듣고서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런 똑똑한 아이들이 취직을 못 한다니... 취직을 못하면 몸으로라도 때워야 할 텐데. 이렇게 똑똑하고 열심히 생활하는 친구들도 취직이 어렵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혈우병이란 불치병까지 있는 몸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뭐가 있을까? 절망이 나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10. 방황, 그리고 연극

6개월간 피시방을 전전하며 방황이 시작됐다. 죽어버리면 어떨까 싶다가도 중국에서 네 번이나 북송당해서 살아 돌아오신 어머니가 자꾸 눈에 밟혔다. 군인들에게 잡혀 울며 살려달라고 외치던 기억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럴 즈음 남북청년 교류 활성화를 위해 활동하는 시민단체의 대표를 만나게 되었다. 그분은 내게 생각지도 못한 활동을 제안했다.

"우리 모임에 탈북자를 연기할 사람이 없는데, 혹시 연극 한 번 해볼래요?"

연극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너무나도 어이없는 제안이었다.

'그래, 이미 밑바닥 인생인 마당에 못할게 뭐 있어.'

덥석 시작한 연기였는데 생각보다 재밌었다. 처음 하게 된 작품의 주인공은 나와 많이 닮아있었다. 목숨을 걸고 한국에 왔지만, 탈북자들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겪는 어려움과 내적인 갈등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었다.
 

삽화: 김하늘 에디터 ⓒ 미디어눈

 
태어나 처음으로 발성 연습을 하고 대본을 소리 내어 읽고 또 읽었다. 글자를 눈으로 읽고, 입으로 내뱉었다. 주인공의 감정을 이해하려고 이입하다 보니 어느새 내가 주인공이 되어 내 얘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연습에 나갈 때마다 마음이 후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첫 연극을 끝내고 나서 다른 작품에도 더 참여하게 됐다. 마지막 작품에서는 남한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변신한 탈북 출신 주인공이 되었다. 나도 성공한 삶을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역할에 몰입하며 열심히 준비했다. 그 날따라 무대 아래에 유난히 눈을 자주 마주치는 관객이 있었다. 그 관객은 연극이 끝난 뒤 내게 찾아와 말을 걸었다.

"방금 연극 내용이 다 실화예요? 제가 그동안 탈북자에 대해 정말 모르고 있었네요. 고맙습니다."

가슴이 따뜻해졌다. 누군가 내 얘기를 들어주고 이해해준다는 느낌을 처음으로 받았다.

북한에 있던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가장 빠르게 익히는 것 중 하나가 표준어를 쓰는 거다. 한국 사회에서 내가 탈북자라는 걸 사람들이 알았을 때 순간적으로 바뀌는 호기심과 의심이 뒤섞인 표정들, 거기에 쉽게 위축된다. '어디 출신인 걸 떠나서 그 사람의 얘기를 들어주는 일이 무척이나 사람 마음을 참 따뜻하게 하는 일이구나.' 의미 있어 보였다.

#11.  나의 인생 2막, 새로운 꿈을 갖다 
 

무대 위 김필주 ⓒ 김필주

  
연극을 하며 나의 가치를 깨달았다. 나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누군가에게 위로를 주며 또 다른 꿈을 꾸게 됐다. 연극을 심리 치료에 활용하는 청소년 심리 상담사가 되고 싶다는 꿈이다. 상처와 고통이 가득했던 나의 청소년기를 돌아보며 그때의 나처럼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3년 다니던 학교를 자퇴하고 다른 학교 심리학과에 다시 진학했다. 오래 돌아온 길인 만큼 꼭 꿈을 이루고 싶다. 

탈북민의 상당수가 20~30대의 젊은 청년들이다. 지금도 과거의 나처럼 많은 탈북 청년들이 힘들어하고 있다. 한국 청년들도 다르지 않다. 대학 생활 동안 만났던 많은 한국 청년들도 저마다의 사정으로 청년의 시절을 힘들어했다. 북한의 청년, 탈북 청년, 한국 청년 모두에게 이 청년의 시절은 소년의 티를 벗고 청년이 되기 위해 각자가 견뎌야 할 성장통이 있나 보다. 

나의 20대를 돌아보며 그때의 나처럼 방황하고 상처 받은 청년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30대가 된 지금도 공부가 끝나지 않았지만, 내가 배운 심리학과 문화 예술의 힘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는 청년들과 청소년을 위로하고 싶다. 지치고 힘든 당신에게 나 같은 인생도 있었노라고, 한국에서 배우고 자란 당신이 포기하면, 나 같은 탈북민들은 어떻게 살아가겠느냐고 위로하고 싶다.

엄마가 떠나고 혼자 남겨졌던 밤, 중국 공안들에게 잡혀 불안에 떨던 밤, 북송당할까 악몽을 꾸며 버텨온 중국에서 4년의 밤, 한국에서 겪었던 좌절의 밤. 하지만 매일 밤이 지나면 빛나는 아침이 찾아온다. 앞길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청년의 때, 곧 밝을 내일을 기다리며 오늘의 아침을 깨운다. 나는 대한민국 청년 김필주다.
 

합격통지서를 들고 ⓒ 김필주


'탈북청년' 연재를 마칩니다. 탈북청년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신 독자님들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은성 작가 ⓒ 미디어눈

 
덧붙이는 글 취재: 박연희, 윤형 에디터, 글: 윤형 에디터, 삽화: 김하늘 에디터

미디어눈 팀 블로그에도 연재중입니다. https://brunch.co.kr/@medianoon/31
미디어눈은 "모든 목소리에 가치를"이라는 비전으로 활동하는 청년미디어입니다.
#미디어눈 #탈북청년 #청년 #탈북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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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목소리에 가치가 있다고 믿는 에디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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