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때부터 아버지가 없었는데... 빨갱이 소리를 들었다"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희생자 경주 합동위령제... 학살 추정지 발굴도 못해

등록 2018.10.29 11:42수정 2018.10.29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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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숙씨(69)에게 일년에 한번 열리는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희생자 합동위령제'는 각별하다. 위령제에 참가하는 것이 아버지 제사를 모시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1950년생인 최혜숙씨의 아버지 고 최현택씨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봄, 가족과 영원히 이별했다. 최혜숙씨가 어머니 뱃속 태아로 있을 때였다.

최혜숙씨의 증언이다.

"들에서 모내기를 하고 있는데 경주경찰서에서 아버지를 잡아 갔다고 합니다. 거기서 며칠 있다가 트럭에 실려 틈수골인가 어디로 실려 갔고, 그 뒤로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때 아버지 나이 29살, 엄마 나이 25살이었다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없었고, 그래서 자랄 때도 아버지라는 존재는 모르고 살았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빨갱이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46살에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시집도 가기 전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자세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지냈습니다."

 

최혜숙씨가 경주위령탑 희생자 명단에서 선친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다. ⓒ 경주포커스

사무치게 그리웠지만, 단 한번도 불러보지 못했던 아버지를 만난 곳은 2016년 11월 19일 제막한 한국전쟁경주지역 민간인희생자 위령탑이었다. 최씨는 위령탑이 건립된 지 몇 달이나 흐른 지난해 봄에서야 처음 그곳을 방문했다.

"지나가다 누군가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고 혹시나 싶어서 위령탑에 가봤습니다. 그곳에서 꿈에 그리던 아버지 이름을 찾았습니다."

지난해 봄 위령탑 뒷벽에 있는 희생자 명단에서 아버지 '최현택'의 이름을 찾은 최혜숙씨는 그후 틈날 때마다 위령탑을 찾는다. 아버지 산소가 없기에 그는 마치 산소를 가꾸는 것처럼 정성을 다해 위령탑 주변 나무에 물도 주고 풀도 뽑는다.


그 인연으로 가족같은 경주유족회 김하종 회장과도 만났다. 아버지 명단을 확인한 작년 봄이었다. 최씨가 혼자 있다는 누군가의 말을 전해들은 김하종 회장이 달려갔고, 두사람이 만난 것이다

김하종 유족회장의 말.

"2015년부터 경주유족회를 다시 만들고 하느라 근 2년을 꼬박 경주에 살았어요. 작년 봄에 '위령탑에 어떤 여성이 술을 따르고 있다'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가보니까, 저녁 무렵인데 한 여성이 울고 있었습니다. 다가가서 사연을 물어봤습니다. 그래서 만나게 됐지요..."

 

김하종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경주유족회장이 28일 위령제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경주포커스

   
경주 민간인희생자위령탑에 새겨놓은 희생자 명단은 모두 839명이다. 1960년 제4대 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 보고서에 등재된 경주희생자 명부가 대부분이다. 참여정부 때 활동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진실규명한 희생자 명단 79명도 전부 새겨 두었다. 최혜숙씨 부친 이름은 제4대 국회 조사 때 희생자 명단에 포함돼 있어서 위령탑에 모셔졌다.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를 잃은 최씨와, 마찬가지로 초등학교 6학년때 부친과 일가친척들을 우익청년조직 내남면 민보단장 이협우 일당에게 희생 당한 김 회장은 이후 유족회 활동으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최혜숙씨 아버지 최현택씨(안강읍 육통2리)의 사망 경위는 아직도 알수가 없다. 진실규명조차 되지 못하고 있기때문이다. 몇가지 추정만 가능할 뿐이다. 사망시점으로 보면 한국전쟁 발발 직전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안강읍의 경우 1949년 좌익계 야산대의 기습으로 당시 안강읍 국민회장등 우익인사 20여 명이 사망한뒤 국군 제3사단과 경찰 특경대, 우익청년단원에 의한 피의 보복이 이뤄졌다고 한다. 이때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경주유족회 고문 조희덕씨(78)의 부친은 보도연맹과 관련해 희생됐을 가능성이 높다. 진실규명이 되지 않아 추정일 뿐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7월~8월경 경주경찰서는 국민보도연맹원 및 요시찰인들을 예비검속했다. 경주경찰서 유치장, 경주역 등에 구금한 뒤 7월 하순 무렵부터 8월 중하순까지 내남면 노곡리 골짜기, 천북면 골짜기, 울산시 강동면 대안리 골짜기 등 여러 장소에서 민간인들을 집단사살했다. 보도연맹과 관련해 경주지역에서는 최소 200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도 추정하고 있다.

조희덕씨의 선친 조인환씨(당시 32세)는 1950년 6월20일 새벽 강동지서 순경 2명에게 붙들려 간 뒤 행방불명됐다. 경찰관들은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희덕씨의 삼촌을 연행하러 왔다가 삼촌을 찾지 못하자 희덕씨 부친을 연행해 갔다.

당시 9살이었던 조희덕씨는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끌려간 다음날 강동지서 경찰관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돌려달라고 빌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6월 22일 날 안강지서에서 신당리로 끌고 가서 학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선친 제사는 6월 22일 날 지내고 있습니다."

 

조희덕 경주유족회 고문이 28일 위령제에서 축문을 읽고 있다. ⓒ 경주포커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4.19 혁명 직후 경주에서는 유족회 중심으로 진상규명 요구활동이 활발했다. 1960년 11월 13일 계림국민학교에서 진행된 경주지역 합동위령제에서 조희덕씨의 모친 이종덕씨는 제문을 읽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5.16쿠데타 직후 경찰은 어머니를 연행해 모진 고문과 감금을 했다.

이어지는 조희덕씨의 증언.

"1960년 당시 위령제를 할때 저의 모친은 제문을 읽었습니다. 저는 조사를 읽었는데 학생 신분이라 화는 면했습니다. 어머니는 5.16 쿠데타 이후 체포돼 모진 고생을 하셨습니다. 4개월 동안 경찰에 구속됐다가 풀려났는데, 출감할 당시 온 전신이 구타로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후 외부 출입을 못하고 후유증으로 5년을 앓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유족회 활동을 했던 김하종 선생은 그때 돌아가셨는 줄 알았는데 얼마 전 신문을 보고 살아계신 걸 알았고, 바로 찾아가서 만났습니다. 부모님의 한을 풀기위해 함께 노력하고 있습니다. "


조씨는 경주유족회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혜숙씨와 조희덕씨, 김하종 유족회장의 경우처럼,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안강, 강동뿐만아니라 경주지역 곳곳에서 민간인들의 억울한 희생이 줄을 이었다.

1960년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9월 5일 발족한 경주지구양민피학살자 유족회 회원수는 860명에 이르렀고 당시 내남면에서 신고된 피학살자수만 169명이었다.
보도연맹 관련 희생자수를 합하면 학계에서는 한국전쟁을 전후해 경주지역에서만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수가 2000명~3000명 정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위령제에서 진혼무를 추고 있다. ⓒ 경주포커스

 
한국전쟁을 전후해 이처럼 억울하게 희생당한 민간인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경주지역합동위령제가 지난 28일 오전 10시30분부터 황성공원에 있는 '경주지역 민간인희생자위령탑'에서 열렸다.

2009년 처음 시작된 경주지역 합동위령제는 올해 10회째다. 1회부터 8회까지는 경주역, 실내체육관 앞 등을 전전했다. 위령제를 모시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것이다.
2016년 위령탑이 건립된 후에서야 겨우 마음 놓고 추모할 공간이 생겼다. 지난해부터 합동위령제는 추모탑 앞에서 봉행하고 있다.

1960년 4.19 직후 경주유족회를 결성했을때 회원수는 860명에 달했지만, 2015년 경주유족회를 재설립할 때는 78명에 그칠 정도로 유족회원수는 줄었다. 1960년 11월 13일 계림국민학교에서 한국전쟁이후 처음으로 연 경주지구양민피학살자 합동위령제에는 4000여 명(경찰추산 2500명)이 운집했지만, 올해 합동위령제 참여유족은 100여명도 채 되지 않아 보였다. 작년에도 비슷했다.

이처럼 위령제 규모가 축소된 것은 모진 세월탓이 크다. 5.16쿠테타로 집권한 군부는 4.19 직후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던 한국전쟁 전후 양민학살 진상규명활동이나 유족회 활동을 빨갱이 짓이라며 모질게 탄압했다.

1960년 경주유족회를 설립했던 김하종 회장은 '특수범죄처벌특별법' 위반으로 구속돼 7년형을 선고받고 2년을 복역해야 했다. 유족회는 해산했다. 그 이후 민주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유족들은 독재정권의 '빨갱이' 탄압에 몸서리쳤고, 자식의 장래를 위해 억울함을 삼키며 숨죽여 살아내야 했다.

1960년 경주유족회를 만들었던 '청년 김하종'은, 백발의 노인이 된 2015년 경주유족회를 재건했다. 그 사이 유족회 규모는 줄었지만, 빨갱이로 몰렸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 명예회복의 염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김하종 경주유족회장은 28일 합동위령제에서 "국가폭력으로 희생된 아픈 역사를 바로잡는 것은 국가가 해야 할 과제이며 역사의 뼈아픈 교훈이 후세에 올바르게 전달돼 다시는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하루빨리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집단학살 추정 장소에 대한 발굴조사가 하루빨리 이뤄지고, 이를 통해 구천을 맴도는 억울한 죽음이 고향산천에서 안식할수 있도록 정부와 경주시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주낙영 경주시장은 "오늘 위령제가 갈등과 대결의 불행했던 과거를 넘어 평화와 화해의 희망찬 미래로 가는 디딤돌이 되길 바란다"며 "민간인 희생자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염원한다"고 말했다.

김하종 유족회장은 6.13지방선거를 앞두고 주낙영 후보에게 학살추정지 발굴에 대한 경주시의 협력과 지원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주시에서 관련 예산을 편성했다는 소식은 없다. 
 

경주유족회 이정수 부회장이 25일 유족회사무실에서 기자를 만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제정 필요성을 강조하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 경주포커스

 
참여정부때 활동하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중단됐던 '진실화해위'같은 기구를 다시 만드는 등 전국의 유족들이 바라는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활동을 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특별법 제정운동은 한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민간인 희생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특별법안은 총 8건이 국회에 발의돼 있으나 하나도 상임위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유족들의 한맺힌 바람을 이루기는 아직도 요원한 현실이다.
  
"국가폭력은 정부가 해결해주는 게 마땅한데도 그냥 해주는 일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회공론화가 필요하고 사회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하루빨리 특별법을 만들어 진상규명해야 합니다. 유해발굴도 더이상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유족회 막내가 70살이고 유복자가 69세입니다. 더 지체되면 지켜볼 사람도 없습니다."

한국전쟁 직전 선친을 잃은 유족회 이정수 부회장이 피울음으로 토한 절규였다.
#경주포커스 #민간인희생자위령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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