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로 몰려 죽은 장교 '큰형', 육군 가족이라 죽은 '작은형'

[박만순의 기억전쟁 ③] 김만수 가족의 비극... "큰 형은 왜 죽었을까"

등록 2018.11.04 11:58수정 2018.11.04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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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수 나와!", "이놈의 반동 새끼, 김광수 빨리 나와." 

총과 몽둥이를 든 청년들이 전남 장성군 삼서면 소룡리 마을을 들이닥쳤다. 무장을 한 청년들은 자신들이 작성한 명단을 토대로 가옥을 수색하며 청년들을 잡아들였다. 붙잡아 들이는데 구체적인 설명은 없었다. 무조건 사람 이름을 부르고, 몽둥이찜질을 했다. 당사자가 없으면 노부모를 연행했다.

소룡리 구장을 지냈고, 마을에서는 바른 소리 잘하기로 유명한 김오득 집안을 건너뛸 리 만무다. 청년들이 와서 둘째 아들 김광수를 찾았다.

김광수는 장성잠업중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교사 발령장을 받고, 대기 중이었다. 흐린 불빛이기는 했지만 총과 몽둥이를 들고 온 청년들은 인민군과 지방 빨갱이(지방좌익)들이었다. "이 밤에 어디로 데려가려고 이러세요?" "정의로운 해방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인민군 양성소에 가서 훈련받기 위해 가는 것이오" "잔말 말고 따라 와" 하며 눈을 부라렸다.

가족들은 발을 동동 굴렀지만, 누구도 인민군과 지방 좌익 일행을 뒤따를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다음 날 동네 사람들이 술렁거리며 삼서면 우치리 계곡으로 몰려갔다. "무슨 일이래요?", "빨갱이 새끼들이 동네 청년들을 우치리 계곡에서 죽였데요" 당시 일곱 살이었던 김만수(75세, 서울 노원구 월계3동)는 부모를 따라 우치리 계곡으로 갔다.

계곡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만수의 눈을 가렸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살육의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계곡 여기저기에 나뒹굴어진 시신들의 손은 전기줄로 묶여 있었다. 김광수의 시신은 쉽사리 확인되었다. "아이고" 곡이 터지기 시작했다.

30분간 곡을 한 후 시신을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팔다리를 잡고 단가에 싣는데, "다리를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종아리가 빨갛더라고요"라고 김만수는 당시를 회상했다. 마을 청년 십수 명이 1950년 9월 27일 인민군과 지방좌익에 의해 죽은 것이다.
   

김광수의 국가유공자증지방좌익에 의해 학살된 김광수의 국가유공자증 ⓒ 박만순

 
"내 큰아들 휴가 나오면 니놈들 다 죽었어"

둘째 아들을 땅에 묻은 후 아버지 김오득은 정신을 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지병이 있었던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죽음에 화병까지 얻었다. "어떤 놈들이 내 아들을 죽였어?", "이놈들 다 죽인다"며 춤을 추었다. 미친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죽은 우치리 계곡으로 춤추며 2km를 가면서 횡설수설했다. 

김오득의 외침은 단순히 정신을 놓아서가 아니라 한이 서린 피맺힌 소리였다. 김광수가 죽은 지 3일이 지난 1950년 9월 30일 밤에 지방 좌익패들이 김오득 집에 다시 들이닥쳤다. 그렇지 않아도 미운털이 박힌 집안인데, "큰아들이 나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소리에 괘씸죄를 적용한 것이다.

집에 들이닥친 패들이 식구들을 마당으로 불러내었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잠을 깬 김만수가 마당으로 나가보니 식구들이 모두 무릎 꿇고 있었다. 좌익패들은 몽둥이로 가족들을 사정없이 두드려 팼다. 아버지, 어머니, 형수, 누님 2명, 김만수가 오들오들 떨었다. 좌익패들은 아버지를 마당 옆 밭으로 끌고 가, 칼로 쑤셨다. 말릴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인민군과 지방좌익 패들은 왜 김오득·김광수 부자를 학살했을까? 김만수는 "큰형이 군인 장교였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어요. 또한 아버지가 마을에서 구장을 봤고, 땅이 많다는 것이 그 이유였죠"라고 말한다.

이른바 군인 가족이라는 성분에 지주였던 게 겹쳤던 것이다. 그러나 부자의 땅이 논밭 합쳐서 약 1만평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지주라는 것이 이들 부자 죽음의 주 요인은 아닐 듯하다. 핵심 원인은 '군인가족'이라는 점에 있지 않았을까.

빨갱이로 몰려 학살된 육군 중위 김일수 
 

김일수육군 장교 김일수 ⓒ 박만순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공주형무소로 이감된 김일수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조만간 감형되어 광주형무소로 이감되면 석방될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김만수의 넷째 숙부가 공주형무소로 면회 가서 갖고 온 소식이었다. 가족들도 모두 희망에 부풀었다.

그런데 6.25가 터진 후 공주형무소 재소자들은 트럭에 실려 공주군 왕촌 살구쟁이로 끌려갔다. 1950년 7월 9일 살구쟁이에서는 학살이 벌어졌다. 이곳에서 육군 중위 김일수도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 했다. 그는 빨갱이로 몰려 이승만 정권에 의해 집단학살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김일수가 빨갱이로 몰려 대한민국 국군에게 학살당한 사실도 모른 채, 이로부터 80일 뒤 김일수의 동생과 아버지는 군인 가족이라는 이유로 학살당했다. 김일수는 어떤 일로 빨갱이로 몰려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었던 걸까?

정말 그는 최능진에게 권총을 주었을까?

김일수는 '묻지 마라 갑자(甲子)생'이다. 즉, 1924년생으로 일제강점기에 징용과 징병대상으로 물을 것 없이 무조건 일본제국주의에 끌려가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강제징용 서류에 의하면 그는 1945년 3월 9일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갔고, 1945년 9월 6일 귀국했다.

그런데 그는 어떠한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일본에 가서 군대로 갔고, 만주에서 복무했다. 해방 후 1947년 1월 13일 제3기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그는 단기반으로 3개월 만에 육사를 졸업했다. 서울의 군수부대에서 근무하게 된 김일수는 최능진과 교유(交遊)하게 되었고, 이후 국군의 숙청대상이 되어 장교에서 파면되고, 마포형무소에 수감되게 된다.

김일수 동생 김만수 증언에 의하면 "형님이 권총 한 자루를 빼돌려 최능진에게 주어 구속되었다"고 한다. 이 사실은 정확한 고증과 김일수 판결문 확보 등 세밀한 조사를 통해 추후 밝혀져야 할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김일수가 최능진과의 관계로 인해, 1949년 11월 동료 장교 4명과 함께 파면되고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최능진은 어떤 인물이고, 그와 연루된 군인들이 어떤 피해를 입은 것일까?

'평화호소대회'를 주장했다고 사형
 

육사 졸업장3기로 육사를 졸업한 김일수 졸업장 ⓒ 박만순

 
1899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한 최능진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한 독립운동가다. 도산 안창호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7년에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연루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른다. 해방 후에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치안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소련과 북조선로동당과의 갈등으로 월남하게 됐다.

미군정에 의해 경무부 수사국장으로 발탁된 그는 1946년 조병옥의 친일 경찰 등용과 부패에 항의하다가 경찰 간부직에서 밀려났다. 친일파를 청산시키기는커녕 친일파를 육성하고 비호하는 이승만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승만과 같은 지역구인 동대문갑구(甲區)에서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이승만과 그를 지지하는 우익단체 및 경찰에서는 난리가 났다. 이승만을 무투표로 당선시키기 위한 전략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다. 동대문경찰서의 날조로 선거관리위원회는 투표 2일 전인 1950년 5월 8일 그의 후보등록을 취소시켰다. 결국 이승만은 무투표로 당선되었고, 이승만과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최능진은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서재필을 지지해, 이승만의 분노를 더욱 샀고, 1948년 10월 조작된 '혁명의용군사건'으로 2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 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그는 한국전쟁 직후 북한군에 의해 형무소 옥문이 개방되어 풀려났다.

그는 북한군 점령 시절 서울에서 '즉각 정전', '평화협상을 통한 통일'을 주장하며, '평화호소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김일성의 반대로 인해 위 행사는 무산되었다.

그런데 1950년 9월 말 수복한 대한민국 정부는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최능진을 검거했다. 결국 최능진은 적에게 이로운 행동을 했다며,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1951년 1월 20일의 일이다. 그에 대한 사형집행은 초고속으로 이루어져 선고 20여일 만인 1951년 2월 11일 형이 집행되었다.

최능진에 대한 '국방경비법 위반 사건'은 불법이었음이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밝혀졌다(진실화해위원회, 「최능진의 국방경비법 위반 사건」, 『2009년 하반기 보고서』)
또한 대법원에서도 2016년 최능진에 대한 국방경비법 위반사건에 대해 재심을 실시해, 무죄 결정을 내렸다.

1948년의 혁명의용군 사건 역시 조작혐의가 짙다. 위 사건의 주동자로 알려진 오동기 소령은 불구속 입건되었고, 서세충은 고령이라는 이유로 석방되었다. '대한민국을 전복하고 김일성과 합작하여 공산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쿠데타를 계획했다'는 사건치고는 너무나 싱거운 결론이었다.

김일수가 '혁명의용군 사건'에 연루된 것 같지는 않다. 이 사건 발생시기와 김일수가 파면된 시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 이후 군내 좌익세력을 숙청한다는 명분으로 대대적인 숙군을 실시했다. 당시 군병력의 10%인 4700명이 그 제물이 되었다.

김일수 역시 이 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김일수가 최능진과 어느 정도의 교유관계인지는 불분명하다. 또한 김일수가 당시 어느 정도의 실정법을 위반했는지도 불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그가 죽을 정도의 죄를 짓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사면이 거론되었고, 공주형무소에서 김일수가 석방될 꿈을 꾸었던 것이다.

불갑산으로 피난 못 간 게 다행

큰 아들은 빨갱이로 몰려 전쟁 초기에 대한민국 군·경에게 학살되었고, 아버지와 작은 아들은 군인가족이라고 반동으로 몰려 지방좌익에 의해 학살되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김만수 가족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남쪽으로 후퇴했다가 수복한 군인들은 김만수 가족이 거주하고 있던 전남 장성군 삼서면 소룡리 약 30호 가옥을 부수고 불태워 버렸다. 북한군 패잔병과 빨치산이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다만 노인들 집과 임산부 집은 예외였다.

겨울 난리에 대부분의 마을 주민들은 불갑산으로 피난을 갔다. 불갑산은 전남 함평군, 장성군, 영광군에 인접한 곳으로 빨치산의 주요 활동무대가 되기도 했다. 11사단 20연대 5중대는 빨치산을 토벌한다며 1951년 2월 20일 일명 '대보름작전'을 개시했다. 함평군의 해보·나산·신광면, 장성군의 삼서·삼계면, 영광군의 묘량·불갑면 등 7개면에서 출발해 불갑산을 싹쓸이한 것이다. 이 와중에 불갑산에 있던 민간인 1천여 명이 빨갱이로 몰려 국군에 의해 집단 학살당했다.

그런데 김만수 가족은 불갑산으로 피난을 가지도 못했다. 소위 '반동집안'으로 몰려서였다. 역사의 아이러니랄까. 오히려 불갑산으로 피난을 가지 못해서 집단학살의 화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이다.

어머니의 유언 
 

김만수증언자 김만수 ⓒ 박만순

 
전쟁의 상처는 오랜 기간 김만수 가족을 괴롭혔다. 김만수는 전남대학교 재학시절 ROTC에 신청서를 냈지만 낙마했다. 그 이유를 추적하던 끝에 큰형 김일수의 행적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넷째 매형이 장성군 공무원으로 근무했는데, 신원조회 관련 문서를 보고 사정을 파악한 것이다.

1998년 어머니가 작고하면서 유언 아닌 유언을 남겼다. '큰 아들 일수의 죽음에 대한 진실규명'이 그것이다. 공식적인 유언은 아니었지만 셋째 아들 김만수는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마음에 간직했던 형의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의지는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본격적으로 타올랐다. 2007년 계룡대와 육군사관학교, 국가기록원을 찾아가 형에 대한 모든 기록을 추적했다. 국가가 할 일을 개인이 찾아 나선 것이다. 덕분에 큰 형 김일수가 왜 죽었는지는 '대전·충청지역 형무소사건'의 진실규명 결정을 통해 어느 정도 밝혀낼 수 있었다.

하지만 김일수가 정확히 어떤 이유로 군 장교에서 파면되고 구속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 이유가 명확히 밝혀져야 김일수에 대한 진실규명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김일수에 대한 온전한 진실규명, 이는 국가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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