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군을 진압하고 만든 정원

[김천령의 한국 정원 이야기 24] 경남 함안 무기연당(상)

등록 2018.11.04 20:38수정 2018.11.04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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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양루에서 본 남강과 함안천 물이 거꾸로 흐르는 함안은 반역의 땅으로 여겨졌다. ⓒ 김종길

 
함안 땅, 이곳에는 강이 거꾸로 흐른다. 우리나라 지형이 대개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데 비해, 함안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다. 남쪽에는 여항산, 서쪽에는 방어산, 동쪽에는 청룡산이 있어 물길이 남강이 있는 북쪽으로 흐른다.

그리하여 물이 거꾸로 흐르는 함안은 반역의 땅으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이 반역의 땅을 바꾸려 땅의 이름을 새로 붙였다. 북쪽의 낮은 땅에는 죽산, 대산이라는 높은 이름을 붙였고, 남쪽의 높은 땅에는 병곡, 비사곡이라는 낮은 이름을 붙였다.


함안에는 역성혁명과 왕위 찬탈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모여들었다. 우연이 아니었다. 이성계에 반대해 벼슬을 버린 조순, 고려 말 고려동에 담을 치고 평생 담 밖으로 나서지 않은 이오,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은둔한 조려, 연산군의 폭정에 맞서다 부관참시를 당한 이인형, 이들은 모두 함안 사람이었다.

오히려 반역자를 피해 벼슬을 던지고 은둔한 이들이었다. 그중 이곳이 반역의 땅이 아니라는 걸 단적으로 드러낸 가문이 있으니, 바로 무기연당의 주씨 가문이다.
 

무기연당 무기연당은 종가에 딸린 별당 정원이다. ⓒ 김종길


역수의 땅에서 충신의 땅으로

경남 함안군 칠원읍 무기리. 이곳에는 그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조선시대 별당 정원이 있다. 무기연당이다. 무기연당의 주씨 가문은 무기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왔다. 종가는 '주씨 고가'로 불리는데, 17세기 중반 주명헌이 터를 잡으면서 시작됐다. 무기연당은 주명헌의 손자 주재성에 의해 18세기 초부터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주씨 고가는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0호로, 무기연당은 중요민속자료 제208호로 등록되어 있다. 대개 중요민속자료로 살림집이나 단일 건축물이 등록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별당 정원이 등록된 곳은 영양 서석지와 무기연당밖에 없을 정도로 드문 편이다. 그만큼 그 가치를 독립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이 별당 정원 덕분에 함안은 '역수(逆水)의 땅'이라는 오명을 벗고 '충신의 땅'이 되었다.
  

무기연당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조선 시대 별당 정원이다. ⓒ 김종길

 
무기연당의 내력을 더듬어보자면 여말선초까지 거슬러가야 한다. 무기연당의 주인인 상주 주씨의 중시조는 공민왕 때 진사를 지낸 유학자 주유(周瑜, 1347~1427)이다. 주유는 조선이 개국하자 경남 합천에 있는 문림마을로 낙향했다. 무기연당이 있는 칠원 땅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그의 손자인 주장손(?~1490)이 칠원에 사는 권우의 딸과 혼인하면서부터였다.

이후 주장손의 장남과 차남은 합천에 남았고, 삼남인 주문보(1467~1532)가 1500년경 외가가 있는 칠원의 무릉마을에 정착하여 입향조가 된다. 주문보의 두 아들 중 장남은 주세곤(1491-1524)이고, 차남은 조선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을 세운 그 유명한 주세붕(1495~1554)이다.


무릉마을에 살던 주씨 일가가 지금의 무기연당이 있는 무기마을로 옮겨온 것은 주명헌 때였다. 주명헌은 무기연당을 처음으로 조영한 주재성의 할아버지로, 주세붕의 형인 주세곤의 6대손이다.
  
종가에 딸린 별당 정원의 이름

무기연당은 종가에 딸린 별당 정원이다. 흔히 별당 정원이나 별업은 일반 정원과는 달리 주요 공간에 종속된다. 그래서 정원을 둘러싼 주변 지리와 마을, 그리고 정원의 주요 공간인 종가의 입지를 함께 살펴봐야 정원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무기연당 무기연당은 주명헌의 손자 주재성에 의해 18세기 초부터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 김종길

 
무기연당이 있는 무기마을은 상주 주씨의 집성촌이다. 작대산(천주산)에서 흘러내린 산줄기를 등지고 칠원천을 마주하고 있는 배산임수의 지형이다. 무기마을의 '무기'는 '무우기수(舞雩沂水)'의 줄임말로 공자가 살던 노나라 도성 남쪽에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논어〉 '선진' 편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가 네 제자에게 장래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물었을 때 오직 증점만이 늦봄에 봄옷이 이루어지면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했다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마을 이름이 언제부터 무기라고 불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주재성이 1729년에 지은 부친의 행장에 아버지 주각이 "현 동쪽 무기리에서 태어났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상주주씨유래보>에는 "산정(山亭)골에서 발원된 계류가 마을 앞을 굽이쳐 흐르는 모양이 춤추는 형상이라고 무기(舞沂)라 이름 하였다고 전해온다"라는 내용이 있다. 지금은 마을 인근에 공장이 들어서고 하천을 콘크리트로 정비해 곧게 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상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구불구불한 자연천이었다.

이인좌의 난이 평정된 후 지은 정원

이 별당 정원이 들어선 데에는 조선 사회를 뒤흔든 사건이 있었다. 1728년 영조 4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이었다. 그때가 무신년(戊申年)이라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경종 때 소론은 노론과의 대립에서 일단 승리했으나 경종이 갑작스럽게 죽고 영조가 즉위하자 소론은 정치적 위협을 느꼈다.

이에 소론의 강경파들은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들을 포섭해 영조와 노론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 명분으로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이 독살되었다는 의혹을 내세워 영조를 폐하고 밀풍군 이탄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다.
 

하환정에서 본 연못 국담 주재성은 연못의 이름을 ‘국담(菊潭)’으로 짓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 김종길

 
3월 15일 이인좌가 충청도의 청주성을 함락하고 경종의 원수를 갚는다며 서울로 북상했다. 그러나 경기도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게 격파되어 이인좌는 체포됐고 한양으로 압송되어 능지처참됐다. 영남 지방은 정희량이 이인좌의 동생인 이웅보와 더불어 3월 20일 안음(지금의 경남 함양군 안의면)에서 일어나서 거창, 합천, 함양을 점령했으나 경상도관찰사 황선이 지휘하는 관군에게 격파 당했다.

이때 48세였던 주재성은 충과 효가 인간의 도리이며 도망치지 말고 임금과 부모를 지켜야 한다고 창의문에서 역설하면서 관군을 도왔다. 그는 함안 일대에서 의병을 모아 분치령(分峙嶺)을 지켜 반란군의 길을 막았다.

사재를 털어 솥뚜껑 4백 개와 쌀 4백 곡(斛, 10말)을 바쳐 난을 평정하는 데 일조했다. 난이 평정된 후 회군한 군사들은 주재성의 집 근처에 못을 파고 정충비를 세웠다. 주재성은 연못의 이름을 '국담(菊潭)'으로 짓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하환정 1728년 군사들이 국담을 조성한 후에 주재성은 연못 한편에 하환정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 김종길

 
1728년 군사들이 국담을 조성한 후에 주재성은 연못 한편에 하환정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이로써 은행나무와 연못, 정충비로 단출했던 무기연당의 구성은 하환정이 지어지면서 온전한 별당 정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주재성은 만년에 하환정에서 거쳐하며 벗을 불러 시를 지으며 교묘한 마음을 잊고 스스로 즐기는 삶을 살았다.

주재성은 난이 평정된 후 분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그러나 당시 그 대상자가 9,000여 명에 달해 큰 의미는 없었다. 주재성의 장남 주도복의 노력으로 그가 죽은 지 3년 후인 1746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영조로부터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겸경연찬찬관에 증직된다. 주도복은 그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사랑채인 감은재(感恩齋)를 짓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1783년에 주도복의 아들 주봉조가 장계를 올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정려를 청했다. 주도복은 어머니가 아프자 손가락을 끊어 약을 달인 효자였다. 정조는 주재성의 정려를 허하고 주도복에게 관직을 내리도록 명을 내렸다. 그리하여 1860년에 종가의 대문에 충신과 효자 두 개의 정려, 충효쌍정려가 나란히 걸렸다.
 

충효쌍정려 1860년에 종가의 대문에 충신과 효자 두 개의 정려, 충효쌍정려가 나란히 걸렸다. ⓒ 김종길

 
※ 다음에 이어지는 무기연당 하편에서 무기연당 정원의 구성과 관람법 등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무기연당 #함안 #주씨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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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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