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갔다 돌아온 한인민박, 방문을 열었더니

[비혼일기] 다시 막막한 제자리... 책 '내성적인 여행자'가 내게로 왔다

등록 2018.11.06 13:24수정 2018.11.11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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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비혼, 돌아온 비혼, 자발적 비혼 등 비혼들이 많아진 요즘, 그동안 '비혼'이라는 이유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조금 더 또렷하고 친절하게 비혼의 목소리를 내고자 용기를 낸 40대 비혼의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예측 가능한 길과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길. 어떤 길이 더 안전할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기질상 예측이 가능한 길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래서 여행을 갈 때도 가급적이면 일정이나 루트를 정하곤 한다. 그래야 더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안심이다. 하지만 살수록 느끼는 점은 아무리 준비를 해도 변수는 늘 있다는 사실이다.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생긴다는 것 
 

정여울 지음 '내성적인 여행자' ⓒ 해냄

요즘 나는 또다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길에 놓여 있다. 일단, 잘 되기 바랐고 잘 될 것 같았던 연애가 깨졌다. 글 쓰는 일로 밥 벌어 먹고 사는 게 힘들어서 이제 다른 일을 해봐야겠다 싶어 1년 동안 고시 준비하듯 공들인 시험에서도 떨어졌다.

안전한 길을 바라고 열심히 달렸건만, 다시 막막한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이런 때, 여행을 떠나면 좋으련만 경제 사정이 여의치 않아 입맛만 다시고 있던 때 <내성적인 여행자>가 나에게 왔다.
 
이 책은 바로 '내가 의도적으로 찾으려했던 길들'과 '나도 모르게 발길이 그쪽으로 옮겨진 우연의 길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여행의 기록이다. 이 길 위에서 나는 필연과 우연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생의 빛나는 접점을 발견했고, '내가 가려고 하지 않았던 모든 길들'이 슬프도록 아름다운 것임을 깨달았다. - <내성적인 여행자> 10p
 
동유럽 여행을 갔을 때가 생각났다. 여행 4일차, 아침부터 호기롭게 혼자 헝가리 거리로 나섰다. 제법 잘 다니다가 중간에 완전히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분명히 목적지가 저 위에 보이긴 하는데 아무리 걸어도 좀처럼 닿지 않았다. 한 시간쯤을 헤매다 다리가 아파서 길에 있던 벤치에 털썩 앉았다.

한 숨 쉬고 있노라니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길을 찾느라 보이지 않았던 그 거리는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아기자기하면서도 깨끗하고 예쁜 골목들과 동화 속에 나올 것만 같은 집들이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펼쳐져 있었다.

내가 목적지만 봤더라면, 길을 잃었다는 것에 속상해하기만 했더라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풍경이었다. 그제야 난 길을 잃지 않고 목적지에 이르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누군가 그랬나 보다. 길은 잃어야 제 맛이라고. 그 다음부터는 조금 헤매도 느긋하게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며칠 뒤, 빈에 도착했다. 여행이 보름을 넘어가니 시차도 완벽하게 적응되고 긴장감도 사라져서 온전히 즐기는 여행자 모드가 되었다. 그런데 이틀째 되던 날,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다. 일정을 마치고 한인민박에 들어갔는데 묵고 있는 방 앞에 내 캐리어가 떡 하니 나와 있는 것 아닌가.


깜짝 놀라서 방 문을 열었다가 기겁했다. 런닝셔츠 차림의 아저씨들 몇 명과 아줌마들이 화투판을 벌이고 있었다. 옆에는 소주병들이 즐비하고. 도무지 이 상황이 뭔지 모르겠는데 한 아저씨가 나한테 소리를 쳤다.

"아줌마! 왜 문을 벌컥벌컥 열고 그래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게다가 다짜고짜 "아줌마"라니! 불쾌하고 화가 나서 "여기 제가 묵었던 방이에요"했더니 그제야 한풀 꺾이면서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이 방 오늘부터 우리가 써요. 주인이 다른 데 숙소 정했다니까 주인한테 물어봐요."

외출할 때 열어놓았던 내 가방에 함부로 손 댄 것도 기분이 나빴고, 한 마디 양해도 없이 이런 식으로 숙소를 옮기는 것도 기가 막혔다. 속에서 천불이 났지만 심호흡을 하고 주인 아주머니를 찾아갔다.

"너무 미안해요. 원래 저 친구들이 내일 모레 오기로 했는데 오늘 다짜고짜 쳐들어왔지 뭐에요. 다른 데서 묵으라고 해도 막무가내여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어요. 내가 이 근처 깨끗한 방 잡아 줄 테니까 거기서 묵어요."

나 외에 다른 몇 명도 똑같은 신세였다. 코에서 뜨거운 김이 나왔다. 순간, 이런 일을 어디에 신고해야 분이 풀릴까, 어떻게 본때를 보여줘야 속이 시원할까, 오만가지 생각과 독한 말들이 머릿속에서 3차 대전을 치르고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필요한 건 냉정함. 그리고 침착함.

'화를 내면서 따지고 나면?'

나에게 아무 득이 없었다. 무엇보다 난 얼마 남지 않은 여행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 아주머니의 기가 막힌 행동에 화는 나지만, 내가 지금 화를 낸다고 해서 원상복구가 될 리도 없고 잃을 게 더 많았다.

'예상치 못한 일을 만나는 것, 그게 여행 아닌가. 기분은 나쁘지만 여행이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자. 이 아줌마 때문에 내 즐거운 여행을 망치지 말자.'

그러고 나니 마음속에 일어난 산불이 조금씩 진화되었다. 덕분에 아주머니에게 점잖게 컴플레인을 할 수 있었다. 그날밤 아주머니는 밑도 끝도 없이 혹시 짤츠부르그에 갈 계획이 있으면 기차표를 싸게 예매할 수 있게 해주겠단다.

마침 일정에 있어서 솔깃해하자 아주머니는 내국인들만 이용하는 사이트를 통해 싼 기차표를 예매해 주었다. 예산보다 50%나 싼 금액이었다. 그리고 그 열차는 내가 동유럽에서 탄 가장 쾌적하고 좋은 컨디션의 열차였다.

짤츠부르크로 가는 길에 '내가 그 아주머니에게 화를 내고 그냥 나와 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봤다. 그날 밤 당장 숙소를 구하는 것도 난감했을 테고, 그러면 아마 더 화가 났을 게 분명하다. 머릿속으로 그 아주머니를 혼내줄만한 다양한 옵션을 생각하며 부글부글한 채로 아까운 시간을 낭비했을지도 모른다. 여행을 망치기 싫어서 바꾼 생각 덕분에 난 아주 즐겁게 짤츠부르크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나를 다독이는 시간이 필요한 이유

그때 이후로 나는 가끔 길을 잃은 것 같아 당황스러워도 예상치 못한 장애물을 만나 화가 나더라도, 이런 일로 내 여행을 망치지 말자고 결심했을 때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고 좋은 일들이 생겼듯이, 삶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다독인다.

난감하거나 화나는 일이 오늘 내 하루를 망치지 않도록, 나한테 별로 소중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이 나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지 않도록 허용하지 않기. 여행에서 배운 알토란같은 지혜다.
 
우리를 짜증나게 하고 화나게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켜주는 사람들이다.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더욱 잘 알게 된다. 장소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고생시키고, 전혀 다른 모험 속으로 몸을 던지게 하는 장소야말로 치유의 장소이자 성장의 장소다. - <내성적인 여행자>, 정여울, 68p

다시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길에 놓인 지금. 어쩐지 편안하다. 내가 목표한 길로는 가지 못했지만, 해보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잘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주 드라마틱한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느낌이다. 조금 더 지나면, 어쩐지 필연과 우연이 어우러져 빚어낸 아름다운 길도 발견할 것만 같다.
 
때로는 어딘가에 도착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여행의 과정 자체다. 여행의 목적지보다도 여행을 떠나는 과정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여행의 정수를 온몸으로 빨아들일 줄 안다. <내성적인 여행자> 46p

내성적인 여행자

정여울 지음,
해냄, 2018


#비혼일기 #내성적인 여행자 #정여울 #여행의 유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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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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