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에요?" 응급실에서도 그놈의 가족 타령

[기승전 결혼?] 함께 살지만 권리·의무에선 '남남'... 현실 외면한 제도 정비 시급

등록 2018.11.08 19:57수정 2018.11.08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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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민우회 회의실에서 결혼 경험 있는 3명의 남성과 민우회 활동가 2명이 만났다. ⓒ pexel


"가족이에요?"

응급실 의사의 질문에 김아무개(29)씨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의사는 위급한 상황이라 급하게 수술을 할 수도 있다며 보호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3년째 여자친구와 살고 있지만, 그 순간에는 '남'이었다. 지방에 사는 여자친구의 부모님을 급하게 호출해야만 했다. 김씨는 "여자친구를 병원에 급하게 데려간 것도, 함께 살면서 간병을 하는 것도 나였다"라며 "하지만 법적으로 보호자도 가족도 아니기 때문에 그 순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라고 했다.

더이상 결혼이 필수인 시대가 아니다. 통계청이 지난 6일 발표한 '2018년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13세 이상 인구 중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48.1%였다. 반면 남녀가 결혼을 하지 않고도 같이 살 수 있다는 응답은 56.4%를 기록했다. 결혼 없이 살아도 된다는 대답이 절반을 넘어선 것은 처음이다.

이처럼 전통적인 결혼관이 파괴되고 있지만 현실은 여전히 결혼제도 안에 갇혀있다. 모든 사회적 혜택이나 제도가 결혼해서 살아가는 전통적인 가족형태를 기준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반자' 늘어가는데, 법은 '정상가족'만 취급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는 커플이 늘어나지만 정상가족만 인정하는 법 때문에 그들은 어떤 혜택도 누릴 수 없다. ⓒ PIXABAY

 
우리사회에서 법적인 부부가 가지는 권한은 막강하다. 배우자 자격으로 수술동의서에 서명할 수 있다. 연말정산을 할 때 소득공제가 가능하다. 일을 하지 않아도 배우자의 직장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 뿐만 아니다. 정부가 주는 배려도 상당하다. 정부에서 실시하는 공공임대주택 정책에서 결혼 7년 이내 신혼부부는 최우선으로 고려된다. 신혼부부처럼 살아가지만 법적으로 부부가 아닌 가구들은 대상이 아니다.

친구(28)와 4년째 동거중인 김아무개(32)씨는 살고 있던 원룸보다 좀 더 넓고 쾌적한 곳에 살고 싶었다. 공공임대주택을 알아봤다가 허탈하기만 했다. 김씨는 "SH(서울주택도시공사)에서 하는 행복주택에 지원하려고 보니 신혼부부 위주로 편성이 많이 돼있더라"라며 "사실상 신혼부부에 준하는 생활을 하고 있지만 법적으로는 아니기 때문에 청년계층으로 지원해야만했다"라고 했다. 김씨는 "행복주택에서 떨어지면서 대출을 알아봤다"라며 "결혼을 했다면 선택할 수 있는 상품들은 많았다, 하지만 개인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전세자금대출 정도였다"라고 했다.

가족으로 묶이지 않아 겪었던 차별도 있다. 김씨는 "통신사들은 대개 가족할인을 많이 한다"라며 "가족끼리 같은 통신사를 쓰면 리필한 데이터를 서로 나눠줄 수 있는데, 우린 가족이 아니어서 줄 수가 없다"라고 했다. 그는 "우리는 같이 살고 있지만 할인의 사각지대에 있다"라며 "사소한 것인데 가족이 아님을 느끼는 사례"라고 했다.


앞으로도 걱정이라고 했다. 김씨는 "나이가 들면 법적인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한 순간들이 올 것"이라며 "내가 아플 때나 파트너가 아플 때 서로가 서로를 책임져줄 수 있는 관계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라고 했다.

남자친구와 4년 동거하다 결혼한 이아무개(32)씨도 "동거할 당시 비상 연락망에 항상 남자친구 연락처를 썼었다"라며 "심리적으로든 거리상으로든 보호자라고 보는 것인데, 법적으로는 보호자가 아니지 않나"라고 했다. 이씨는 "보호자가 필요한 순간에 우리 관계는 존중받지 못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때문에 혈연이나 혼인으로 묶이지 않았지만 생활을 공유하는 관계에 대한 법적인 지원이나 제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온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심심찮게 '동반자 등록', '생활동반자법' 등에 대한 게시글이 올라온다.

우리사회에서 혼인 외의 관계도 동반자로 보자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지난 19대 대선 당시 공약으로 '동반자등록법 제정'을 내세웠다. 비혼 이성커플과 동성커플, 장애인공동체 등 비혈연 공동체와 동거노인 등이 생활 동반자로서 직장, 학교, 의료기관, 금융기관 등 일상생활에서 가족에게 보장되는 권리는 물론 사회복지 수급권, 주택임대차 승계권 등을 보장하는 법이다.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도 19대 국회의원이던 지난 2014년 '생활동반자 관계에 관한 법률'을 발의하고자 했다. 결혼 없이도 서로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가질 수 있는 '동반자'라는 법적 주체를 만드는 내용으로 기존 가족 개념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반대에 부딪쳐 발의조차 못 했다.

"가족 인정은 당연하고, 차별도 금지해야"

가족구성권연구소 이종걸 연구원은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한국사회에 뿌리박혀있던 부계혈통주의, 성별분업구조가 2000년대 중반부터 흔들렸지만 가족정책들이 그런 현실을 담아내지 못 했다"라며 "주거, 상속, 노동 정책 등을 보면 정상가족 안에서만 가능하도록 법적 체계가 이루어져있다"라고 했다.

이종걸 연구원은 '가족 구성권'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 연구원은 "가족을 구성할 권리가 당사자들에게 있지 국가에 있지 않다"라며 "(생활동반자법이 제정되면) 동반자로서 등록이 가능하기 때문에 제도적 차별이 보완된다"라고 했다.

생활동반자법 등을 통해 제도적 차별을 시정하는 동시에 사회문화적인 차별 해소를 위한 대책도 필요하다고 했다. 이 연구원은 "기존 정상가족과는 다른 형태의 가구들이 있지만 현실적인 제도가 뒷받침 되지 않아 '가족상황차별'이 생긴다"라며 "합리적인 이유 없이 가족의 형태, 구성과정, 구성원 등을 이유로 개인이나 집단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했다.

그는 이어 "가족을 구성할 권리 자체를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차별적인 문제를 해소하는 게 필요하다"라며 "가족 형태에 따른 차별 금지를 담고 있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통해 가족상황차별을 없애나가야 한다"라고 했다.
#생활동반자법 #결혼 #부부 #동반자 등록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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