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타회담 막전막후, 왜 지금 알아야 하냐면

[리뷰] 마이클 돕스의 '1945'

등록 2018.11.12 18:16수정 2018.11.12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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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2월은 연합국의 승리가 눈에 들어오던 시점이었다. 이 무렵 미국의 F.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옛 소련의 스탈린은 크림반도 남부의 얄타에서 전후 국제질서를 논의했다. 그야말로 역사적인 이 세 정상의 회동을 역사는 '얄타회담'이라고 이름 붙였다. 

얄타회담의 역사적 중요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회담의 결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질서가 형성돼 나갔고, 더욱 중요하게는 미국과 옛 소련을 축으로 한 대립구도, 즉 '냉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멀리 크림반도에서 있었던 회담 결과는 한반도에까지 영향을 미치기에 이른다. 지금 한반도 분단과 남북 대치는 얄타회담의 결과물이다. 이런 이유로 현대사 역사책에서 얄타회담은 빠지지 않았다. 논픽션 작가 마이클 돕스는 이토록 중요한 얄타회담의 막전막후를 탐사한다. 그 책이 지금 소개하려는 < 1945 >다. 
 

마이클 돕스, <1945> ⓒ 모던 아카이브

 
먼저 작가 돕스를 소개해야겠다. 돕스는 1950년 북아일랜드에서 태어나 생후 8개월 외교관이던 부모를 따라 옛 소련으로 건너갔다.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열린 군사 퍼레이드를 지켜봤고,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기도 했다.

또 미 유력 신문인 <워싱턴포스트>지 기자로서 1989년 중국 천안문 사태와 1991년 옛 소련 8월 쿠데타를 취재하기도 했다. 이력에서 엿보이듯 그의 생은 '냉전'의 강한 영향 아래 있었다. 그는 < 1945 > 말미에 스스로를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말 그대로 냉전의 자식(Child of the Cold War)이다. 외교관 부모를 둔 덕분에 생후 8주가 되던 1950년 소련 땅을 밟았다. 여전히 권력의 정점에 있던 스탈린이 제국주의 악마들에게 비난을 퍼붓던 시절이었다. (중략) '철의 장막' 건너편을 방문한 경험으로 촉발되는 놀랍도록 선명한 감각의 환기를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직도 특정한 색을 보거나 냄새를 맡으면 소련 공산주의를 떠올린다."

그는 자신의 문제의식을 냉전 시기 있었던 굵직한 사건으로 확장시킨다. 대표작이 바로 2015년 한국에 번역 소개된 2008년작 < 0시 1분 전 >(원제 - One Minute to Midnight)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이 작품에서 돕스는 막연히 과거의 한 사건으로만 인식됐던 쿠바 미사일 위기에 생동감을 불어 넣는다. 돕스는 이어 냉전 체제를 잉태한 얄타회담에 주목한다. 그 결과가 바로 < 1945 >다. 

이 책의 강점은 풍부한 디테일과 살아 있는 문체다. 역사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얄타회담이 언제, 어디서 열렸고, 핵심 의제가 무엇이었는지는 대략 안다. 그러나 정작 물밑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는 이들은 거의 없다.

돕스는 얄타회담이 열렸던 1945년 2월부터 8월 히로시마 원폭 투하까지 6개월 동안 벌어진 일들을 생동감 있는 문체로 재현해낸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흡사 대하 역사소설을 읽는 듯하다. 아래 인용할 대목이 특히 그렇다.
 
"운명은 장애인이 된 대통령과 곰보투성이 혁명가(스탈린 - 글쓴이)를 영국 귀족과 함께 흑해 연안에 불러 신세계질서의 기초를 쌓게 했다. 폐허가 된 도시와 급히 복구된 궁전, 황폐화된 시골 풍경과 민족 청소가 이루어진 마을로 구성된 크림반도야말로 3거두의 발밑에 엎드린 대륙을 상징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 본문 66쪽 

미군 희생 줄이려 스탈린과 손잡은 루스벨트 

이제 얄타회담의 막후로 들어가보자.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이 임박한 시점까지 미국의 루스벨트는 옛 소련과의 전시 협력체제에 낙관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이는 잘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미국 여론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기 무섭게 미국과 옛 소련이 적대적으로 돌아섰음을 감안해 본다면 미국 여론의 우호적 태도는 무척 놀라운 일이다. 돕스는 미국 여론의 옛 소련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 그리고 루스벨트의 낙관적 전망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독자들에게 알린다.
 
"1939년 스탈린이 히틀러와 담합해 폴란드를 분할하고 핀란드와 발트 3국을 침략하자 미국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하고, 불과 몇 달 뒤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의 문턱에 도달하자 미국 여론은 완전히 바뀌었다. 같은 해 12월 7일 진주만 공습을 당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공산 러시아는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 되었다. 할리우드 영화는 소련을 용감한 군인, 삶에 만족하는 노동자, 미소 짓는 정치장교의 땅으로 그렸다. (중략) 소련군의 승리가 거듭될수록 강하지만 자비로운 지도자가 이끄는 용감하고 믿을만한 나라라는 이미지가 확대되었고, 루스벨트 행정부도 이를 적극적으로 부추겼다." - 본문 20~21쪽 
"루스벨트의 원대한 계획에서는 승리한 연합국의 친절한 감독 하에 새로운 국제기구가 '항구적 평화'를 책임질 터였다." - 본문 21쪽  

루스벨트는 스탈린의 협조를 끌어내기 위해 정치력을 집중했다. 특히 루스벨트는 스탈린을 잘 다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스탈린이 전쟁 수행에 적극적일수록 미국의 손실은 작아지기 때문이었다. 돕스는 '현실정치인' 루스벨트를 이렇게 묘사한다.
 
"스탈린과 루스벨트의 유대는 냉정한 정치적 계산에 따라 이루어졌다. 루스벨트는 독재자를 박멸하기 위해 또 다른 독재자와 손잡았다. (중략) 루스벨트의 관점에서 보면 소련군의 희생이 늘거나 줄면 미군의 희생은 그와 반비례했다. 정치적 계산은 잔인할 정도로 이기적이고 현실적이었다. 러시아인이 더 많이 죽을수록 미국인은 덜 죽었다. 나치독일이 패배하면 같은 논리는 일본에도 적용될 터였다." - 본문 36~38쪽 

그러나 이 같은 낙관에도 미·소 전시협력 체제는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세 정상의 이해관계가 다 제 각각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스탈린은 폴란드에 관한 한, 연합국에 양보할 의향이 전혀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적어도 스탈린에게 폴란드는 자국의 안보와 직결된, 말 그대로 사활적 이해가 걸려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이미 요구하는 바를 분명하게 밝힌 상태였다. 국경선을 새로 그어 이 골치 아픈 나라를 서쪽으로 거의 300킬로미터 옮기길 원했고, 폴란드가 '어머니 러시아'를 다시는 군사적, 정치적으로 위협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결심했다." - 본문 89쪽
"폴란드의 미래는 소련에 단순한 '명예'가 아니었다. '안보'에 관한 문제이기도 했다. 폴란드는 서쪽에서 소련을 침공하는 데 사용되는 전통적 침공로 위에 있었다. 러시아는 이 통로를 차단하려면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강력한' 폴란드가 필요했다. 스탈린은 영토 문제에서 그 어떤 대규모 양보의 가능성도 배제했다." - 본문 91~92쪽 

폴란드 문제에서 세 정상은 이견을 드러냈다. 폴란드 문제는 무척 복잡했다. 소련은 폴란드 동부 도시 루블린에 정부를 세웠다. 한편, 1939년 나치와 옛 소련이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면서 폴란드를 분할하자 런던에 망명정부가 들어섰다. 스탈린은 루블린 정부를 승인했지만, 미국과 영국은 런던 망명정부를 인정했다. 폴란드 문제를 둘러싼 세 정상의 미묘한 입장차는 큰 균열로 이어지기에 이른다. 돕스는 이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세 정상은 서로 건배하며 사실상 확실해 보이는 승리를 축하했다. 밤이 깊어가면서 축하연설에도 불협화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 - 본문 61쪽 

20세기판 '그레이트 게임'


냉전은 일반적으로 미국을 축으로 하는 자유 민주주의 진영과 옛 소련을 정점으로 한 공산주의 블록의 대결이라고 알려져 있다. 냉전이 미·소 대결인 건 맞지만 꼭 이데올로기 대립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세기 영국은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러시아와 치열한 각축을 벌였다.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이다. 얄타에서도 그레이트 게임은 재현될 조짐을 보였다. 19세기 그레이트 게임이 인도로 가는 통로를 확보하기 위한 싸움이었다면, 20세기판은 이란을 포함한 중동의 석유를 놓고 벌어진 세력 다툼이었다. 그리고 20세기판에서 미국은 영국을 대신해 소비에트 러시아와 대결했다. 스탈린은 이 같은 시도를 대단히 불온하게 여겼다. 
 
"이란에서 미국, 영국, 소련이 충돌하면서 20세기판 그레이트 게임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이번에는 인도로 통하는 육로가 아니라 중동의 방대한 석유 매장량이 목표였다. 영국은 페르시아에서 먼저 승리했고, 이제는 이를 당연히 지키고 싶어 했다. (중략) 미국은 영국과 소련 사이에서 공정한 중재자를 자청하며 '열린 문' 정책을 추구하려 했다. 물론 스탈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영국과 미국이 짜고 전략물자를 빼앗으려 한다고 여겼다." - 본문 375~376쪽 

여기서 저자 돕스는 스탈린이 민족주의를 부추겨 영·미에 맞섰다고 지적했다. 아래 인용할 설명은 저자 돕스의 연구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민족문제인민위원장 출신인 스탈린은 국내에서든 국제적으로든 민족 문제를 카드로 활용하는 방법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다. 스탈린은 영토를 재편하고, 민족간 마찰을 부추기며, 분리주의 운동을 약화시키거나, 말 안 듣는 민족을 강제 이주시키고, 영토 수복 명분을 지어내는 데 이골이 났다. 어떤 민족 분쟁에서 뭐가 옳고 그른지는 스탈린이 알바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절대권력 추구, 그리고 소련을 거대한 다민족 국가로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란을 상대로 민족카드를 꺼내기는 쉬웠다. 이란 북부에는 사실상 국경 너머 소련의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주민과 민족적 기원이 똑같은 아제르인 수백만 명이 살고 있었다. (중략) 이란에 정치적 압력을 가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아제르 민족주의에 불을 지피는 것이었다." - 본문 376~377쪽 

이 밖에도 저자 돕스는 핵 우위 선점을 위한 미·소간 경쟁, 점령지에서 불거졌던 사소한 충돌사태 등 독자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일들을 상세히 소개한다. 한정된 지면에 담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냉전은 베를린 장벽 붕괴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지난 날의 역사를 아는 건 중요하다. 떠나온 항구를 아는 배가 더 멀리 항해할 수 있어서다. 더구나 냉전 체제가 종식되었어도 미국과 러시아는 여전히 전세계를 무대로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다. 한반도도 예외는 아니다.

지금 비핵화를 둘러싸고 북·미간 기싸움이 치열하다. 이 와중에 러시아는 비핵화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 만약 미국이 러시아의 협조를 얻는 데 실패하면, 비핵화는 요원하다. '그레이트 게임'은 진행형이라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얄타회담은 새로운 중요성을 갖는다. 

이 책은 우리나라 정치·역사학계에도 적지 않은 함의를 던진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학계에서도 얄타회담을 활발히 재조명했고, 연구 성과물도 많다. 그러나 미·소 갈등과 뒤이은 한반도 분단에 시선이 고정돼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한반도 분단이 냉전 체제의 영향을 받은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체제가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를 규정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시야를 확대할 필요는 분명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 1945 >는 실로 의미 있는 저작이 아닐 수 없다. 

1945 - 20세기를 뒤흔든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6개월

마이클 돕스 지음, 홍희범 옮김,
모던아카이브, 2018


#마이클 돕스 #얄타회담 #0시 1분전 #쿠바 미사일 위기 #냉전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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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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