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파견 노동자들이 KAL 빌딩 점거한 사연

[김광민 변호사의 노동법 쉽게 읽기 4] 근로계약서의 작성과 해석원칙

등록 2018.11.13 10:11수정 2018.11.13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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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전쟁 중인 베트남에서 근로기술자로 일하는 덕수. ⓒ JK필름

1971년 9월 15일 '한진상사' 소속으로 베트남에 파견되었던 노동자 수백여 명이 대한항공(KAL) 빌딩을 점거했다. 이들은 KAL 빌딩 입구의 대형 유리문을 부수고 1층에 있던 대한항공 국제선 사무소에 불을 지르기까지 했다. 경찰의 즉각적 투입으로 농성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지만 조직화된 노동운동이 없던 시절 노동자 수백 명이 특정 기업 사옥을 점거한 사건은 매우 충격적 장면이었다. 그들은 빌딩을 점거하고 "피와 땀의 대가를 지불하라"는 구회를 외쳤다.

노동자들이 임금을 피와 땀이라 부르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KAL 빌딩을 점거했던 이들에게 체불임금은 진짜 피와 땀이었다. '한진 파월 귀국 기술자 미지불임금 청산투쟁위원회' 소속이었던 그들은 민간인 신분으로 베트남 전쟁에 파견되어 근무했던 노동자들이었다. 한국은 베트남 전쟁에 군대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민간인도 보냈다. 민간인들은 대부분 특정회사 소속으로 돈을 벌기 위해 베트남에 갔다. 

베트남 전쟁을 통해 재벌의 반열에 오른 한진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는 '대한상사'에 채용되어 베트남에 갔다 부상을 당해 한쪽 다리를 저는 장애를 입게 된다. '국제시장'의 '대한상사'가 '한진상사'를 모티브로 그려진 것이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다. '한진상사'는 베트남 전쟁 이전부터 미군과 사업을 이어갔고 베트남 전쟁에서는 미국 군수물자 수송사업을 따내는 등 큰 사업적 성과를 얻었다. '한진상사'는 1971년까지 베트남에서만 1억5천만 달러를 벌어들여 재벌로 도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에서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인 '한진상사'였지만 정작 목숨을 걸고 전선에서 활약한 노동자들에게는 인색했다. 베트남으로 파견된 노동자들은 '한진상사'와 근로계약을 체결했는데, 사전에 준비된 근로계약서에 서명만 하는 방식이었다.

근로계약서는 임금을 매우 독특하게 규정하고 있었다. 초과근무수당의 비율 등 계산방법은 전혀 언급되어있지 않았다. 단지 "임금은 별표 임금표와 같다"고만 규정하고 있었는데, 별표에는 기본임금 이외에 각종 수당의 지급액을 미리 표시하여 지급총액이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베트남에서의 초과근무는 엄청났다. 근로계약서에 따르면 근무시간은 1주 60시간, 1개월 260시간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휴일도 없이 하루에 20시간 일하고 다음 날 하루를 쉬는 격일제 근무로, 한 달에 300시간을 근무해야 했다. 결국 한 달에 40시간을 초과하여 연장근무를 한 것이다. 이에 더해 하루 20시간의 근무 중 6시간 30분이 야간근무에 해당되어 한 달에 야간근무 시간만 97시간 30분에 달했다.


초과근무, 야간근무, 연·월차 수당만 엄청나게 발생하는 구조였다. 근로계약서의 의도는 이처럼 엄청난 각종 근무수당을 지급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이 미지급되었다고 주장한 각종 수당 등은 149억 원에 달했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300달러가 되지 못했음을 고려해 본다면 엄청난 금액이었다.

전쟁 속 초과근무수당, 주지 않아도 된다는 법원

노동자들은 미지급 임금을 달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취업계약서 말미에 임금내역표라 하여 통상임금, 연장수당, 야간수당, 휴일수당, 월·연차수당 합계 등이 구분기재 되어있었으나, 계약서 본문에는 각수당의 지급기준율에 대한 아무런 규정도 없고 노사관계에 있어 우월한 입장에 있는 한진 측이 멋대로 기준 없이 만든 이러한 내역표는 근로기준법의 입법정신에도 위배되어 무효일 뿐 아니라 한진 측이 기술자들에게 약속한 월급, 즉 내역표의 합계금액을 통상임금으로 보고 이를 기준으로 제반수당을 별도로 지급해야 한다"며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준 판결은 단 한 건뿐이었다. 총 12건의 민사소송 중 11건은 모두 '한진상사'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임금내역표에 기본급, 연장·야간·휴일 수당 등 각종 수당과 임금총액이 구분기재 되어 있고 매월 그 액수대로 수령할 때 다툼이 없었다면" 각종 수당을 별도로 청구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근로계약서에 각종 수당이 사전에 규정되어있다면 실제로 근무한 것과 상관없이 그만큼만 주면 된다는 논리였다.

근로는 노동자의 노동력과 사용자의 임금이 교환되는 하나의 거래다. 근로계약은 이러한 거래를 약정하는 행위고 근로계약서는 이를 증명하는 수단이다. 계약의 형식은 제한이 없다. 구두 계약도 충분히 계약으로써 효력이 있다. 근로계약을 체결한 때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구도로만 합의를 해도 근로계약은 체결된 것이다.

그러나 근로기준법은 근로계약체결 시 임금, 근로시간, 유급휴가, 연차휴가 등을 명기한 서면을 노동자에게 교부하도록 하여 사실상 근로계약서의 작성 및 교부를 강제하고 있다(제17조 제2항). 이에 더해 근로조건이 노동자와 사용자 간 동등한 지위에서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점도 규정하고 있다(제4조).

법률이 근로계약에 개입하는 이유

이처럼 근로기준법이 사인(私人)들 간 자유롭게 체결되는 근로계약에 다양한 형태로 간섭하는 이유는 그것이 근본적으로 대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근로계약은 노동자와 사용자 간 노동력과 임금을 교환하는 대등한 계약이지만 현실에서는 사용자가 일자리를 원하는 여러 노동자 중 자신의 마음에 드는 이를 선택하는 형식으로 진행되고는 한다.

그나마 노동조합이 있다면 상황은 나아질 수 있지만 집단적 노동운동이 전무했고 일자리도 모자랐던 1970년대는 노동자는 사측이 제시하는 근로계약서에 서명을 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이처럼 당장의 일자리가 아쉬워 찍었던 도장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도 받지 못하는 족쇄로 작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근로기준법이 근로계약서의 작성을 강제하는 이유는 내가 어떤 조건에서 일을 하게 되는지 확실히 알고 취업을 하라는 것과 추후 분쟁이 발생했을 때 명확한 기준을 사전에 작성해 두라는 의미다. 

사측이 제시해 형식적으로 도장을 찍은 근로계약서의 추상적인 규정이 오히려 임금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근거가 된 사례가 '한진상사' 사건이다. 만약 각종 수당을 뭉뚱그려 임금총액을 결정해 놓은 근로계약서가 오늘날 작성되었다면 이는 논란의 여지도 없이 무효가 될 것이다.

'한진상사' 사건은 근로계약상 임금규정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다. 그 결과 오늘날 임금은 근로계약을 체결할 때 기본급을 미리 정하고 이를 기초로 연장·야간 또는 휴일근로에 대한 가산임금을 지급하는 것이 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한진상사' 사건과 같이 기본급을 미리 정하기는 했지만 연장근로 등에 대한 가산임금으로 일정한 금액을 지급하기로 하는, 이른바 정액수당제는 원칙적으로 금지되고 있다.

다만 근로형태가 매우 특수해 실제 근로시간을 정확하게 산정하기 곤란하거나 일정한 연장근로 등이 예상되는 등 실질적 필요성이 인정되고 근로시간, 정하여진 임금의 형태나 수준 등 제반 사정에 비추어 소정의 월급이나 일급 이외 어떠한 수당도 지급하지 않거나 특정 수당을 지급하지 않기로 하는 합의가 있었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만 연장근로 등에 대한 가산임금을 합하여 일정한 금액을 임금으로 지급할 수 있다. 포괄임금제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월 40시간의 연장근무가 예정되어있었고 근로시간을 확정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었던 베트남 파견 노동자들은 포괄임금제의 대상조차 될 수 없다.

근로계약이 대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KAL 빌딩 방화사건으로 '한진상사' 노동자 66명이 구속됐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은 대부분의 소송에서 패소했고 결국 체불임금의 10% 정도만 받을 수 있었다. 근로조건을 명확히 규정하여 분쟁을 사전에 예방하자는 근로계약서가 오히려 분쟁을 유발시켰고 노동자들이 임금을 못 받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늘날 근로기준법은 근로계약에 다양한 방식으로 관여를 하고 이를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수십, 수백 많게는 수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사용자와 입사지원서를 많이 써야 수백 장도 못 쓰는, 그렇게 원서를 내도 한 곳이라도 합격하기 어려운 노동자 간에 대등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근로기준법 등 노동관련 규정들이 다양한 장치를 강제하고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조직해서 집단이 되어야 겨우 대등한 관계를 추구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에 근로계약서가 노동자와 사용자 간 대등한 관계에서 작성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근로기준법 제4조가 "근로조건은 근로자와 사용자가 동등한 지위에서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하여야 한다"고 천명한 이유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서울고등법원 1972. 7. 14. 선고 71나3027 제6민사부판결
대법원 2016. 10. 13. 선고 2016도1060 판결
경인일보. 2017. 12. 12. "[주한 미군과 인천·(5)미군 기반 성장한 기업]군수품 수송한 한진 '인천판 아메리칸 드림'"
경향신문. 1971. 09. 15. "韓進派越(한진파월)기술자들 亂動(난동)"
경향신문 1971. 12. 29. 大法院(대법원)서 판결 週(주)60시간 勤勞合意(근로합의)된이상 延長手當(연장수당) 안줘도돼
덧붙이는 글 글쓴이 김광민 변호사는 부천시청소년법률지원센터 소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노동법 #근로기준법 #한진 #베트남 #칼 빌딩 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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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사무소 사람사이 대표 변호사다. 민변 부천지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경기도 의회 의원(부천5, 교육행정위원회)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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