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슬과도 바꿀 수 없었다는 정원

[김천령의 한국 정원 이야기25] 경남 함안 무기연당(하)

등록 2018.11.13 16:55수정 2018.11.13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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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연당 무기연당은 규모나 의장이 살림 공간인 종가를 훨씬 넘어선다 ⓒ 김종길

 
무기연당은 종가 건물을 능가한다. 대개 별당 정원은 종가보다 규모가 작은 편인데, 무기연당은 규모나 의장이 살림 공간인 종가를 훨씬 넘어선다. 정원 안의 하환정과 풍욕루만 봐도 그렇다.

주씨 고가를 들어서면 제일 먼저 충신과 효자의 붉은 정려로 장식된 솟을삼문을 만난다. 대문을 지나면 사랑채인 감은재가 있고, 다시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와 사당인 불조묘가 있다. 감은재 맞은편의 작은 일각문(한서문)에 들어서면 북에서 남으로 긴 장방형의 연못이 나타난다. 무기연당이다. 주씨 고가는 사랑채와 안채가 있는 살림집 영역, 불조묘가 있는 사당 영역, 무기연당이 있는 정원 영역의 세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은행나무로 시작된 정원
 

무기연당 무기연당은 방지중도(方池中島)에 누정을 갖춘 전형적인 정원이다 ⓒ 김종길


지금의 무기연당은 방지중도(方池中島)에 누정을 갖춘 전형적인 정원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완결된 정원 요소를 갖추고 조성된 것은 아니었다. 무기연당은 주재성의 아버지 주각이 대문 바깥에 은행나무를 심으면서 시작됐다. 본격적인 정원이 조성되기 전에 은행나무가 먼저 있었고, 무신란이 일어난 뒤에야 정원은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무기연당이 어떻게 조성되었는지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자료로는 19세기 중반에 그린 <하환정도>와 주재성의 아들 주도복이 쓴 <하환정중수기>가 있다. <하환정도>를 보면 한서문 옆에 행단(杏壇)이라 하여 원래 은행나무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고, <하환정중수기>에는 할아버지인 경재공 주각이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환정도 <하환정도>는 주씨 가문에 가보로 전해 내려오던 작자미상의 정원 그림으로 1858~186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림에는 내원인 국담을 중심으로 하환정과 풍욕루, 석가산 등이 그려져 있고, 외경으로 멀리 작대산과 천주산이 있고, 그 아래로 유회정 별업과 주씨 선산의 묘들이 묘사되어 있다. 그 외에도 기양서원과 정충비각, 비보숲 등이 그려져 있어 무기연당과 그 일대를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 김종길

   
행단은 원래 <장자(莊子)>에서 유래했다. 그러다 중국 송대에 공자의 후손이 대성전 앞에 행단을 조성하면서 공자의 강학을 상징하는 공간이 됐다. 무기연당의 은행나무는 멀리서 봐도 눈에 띄어 시선을 자연스레 종가로 향하게 했을 것이다. 은행나무는 종가를 찾는 사람들에게 마을을 상징하는 나무이자 무기연당을 연상하는 매개체였을 것이다.

하환정과 풍욕루

무기연당은 장방형의 연못을 중심으로 꾸며져 있다. 그 중심에 하환정이 있고 그 뒤에 풍욕루가 있다. 하환정은 무신란 의병 활동을 마치고 회군하던 군사들이 국담을 조성해주고 돌아간 뒤에 지어졌다.
 

하환정과 풍욕루 무기연당은 장방형의 연못을 중심으로 꾸며져 있다. 그 중심에 하환정이 있고 그 뒤에 풍욕루가 있다. ⓒ 김종길

   

하환정 현판 무기연당을 삼공의 벼슬과도 바꾸지 않겠다는 강한 뜻이 숨어 있다. ⓒ 김종길

 
하환정의 '하환(何換)'은 "어찌 바꿀 수 있겠는가?"라는 말로 무기연당을 삼공(三公)의 벼슬과도 바꾸지 않겠다는 강한 뜻이 숨어 있다. '삼공불환(三公不換)'은 중국 남송의 문인 대복고(1167-?)의 시 '조대(釣臺)'에서 유래했다.
 
만사에 관심 없고 낚싯대 하나 드리우니
삼공의 벼슬인들 이 강산과 바꿀 쏘냐
평생에 유문숙을 잘못 안 탓에
부질없는 이름만 온 세상에 날렸구나
 
이 시는 엄광(BC37-AD43)의 고사를 담고 있다. 유문숙은 엄광의 죽마고우로 훗날 후한의 광무제가 되는 유수를 말한다. 엄광은 유문숙이 후한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자 이름을 바꾸고 부춘산으로 들어가 은거한 인물이다. 엄광은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스스로 은둔을 택하여 삼공의 벼슬도 그에겐 부질없는 이름에 불과했다. 하환정에는 삼공의 벼슬, 즉 출세보다는 자연을 즐기며 유유자적하며 살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하환정 하환정은 무기연당 최초의 건물로 정원이 조성될 때부터 중심 공간이었다. ⓒ 김종길

 
하환정은 무기연당 최초의 건물로 정원이 조성될 때부터 중심 공간이었다. 하환정이 있어 무기연당은 별당 정원의 정체성을 확실히 얻게 된다.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하환정은 기수의 강물을 떠다니는 한 조각 배로 보인다. 하환정은 무기연당 감상의 핵심 경물이면서 동시에 주변을 아우르고 해석하는 중심 공간이기도 하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풍욕루이다. 풍욕루는 원래 일가인 주봉상이 무기연당을 견제하기 위해 담장 밖에 지었던 삼신당이 시초였다(주봉상은 무기연당 인근에 유회정 별업을 지었으나 지금은 흔적만 남았다). 그러다 1853년에 주재성의 4대손인 주상문(1798~1864)이 56세 때 삼신당을 사들이고 풍욕루라 불렀다. 원래 무기연당을 등지고 있었는데, 주상문이 하환정을 바라보도록 고쳤다.
  

풍욕루의 경 자 현판 풍욕루에는 ‘경(敬)’ 자가 걸려 있다. ⓒ 김종길

 
풍욕루는 공자의 제자 증점이 말한 "기수에서 목욕하고(浴), 무우에서 바람 쐬고(風)"에서 '풍(風)'과 '욕(浴)'을 따서 루의 이름을 지었다. 풍욕루에는 '경(敬)' 자가 걸려 있다. 이 경(敬) 자는 칠원의 입향조인 주문보의 차남인 주세붕이 백운동 소수서원 죽계천의 취한대 경 자 바위(敬字岩)에 새긴 것과 비슷하다. 풍욕루의 글자는 주세붕의 필적을 모사한 것으로 보인다. '경(敬)' 자는 유회정 별업, 무릉마을의 무산서당 등에도 있어 주씨 가문의 정원에 나타나는 일종의 아이콘으로 보인다.

풍욕루가 무기연당으로 들어오자 기존 하환정에서 끝났던 동선이 더 연장됐다. 게다가 계단 옆에는 '화석(火石)'을 깎아 세웠고, 더 깊은 곳에는 짧은 섬돌을 배치했고, 연못 아래까지 내려갈 수 있는 탁영석(濯纓石)이 생겼다. 이로써 정원을 감상하는 범위가 확장되고 정원 질서에 변화가 일어났다.
  

탁영석 탁영’은 중국 전국시대 시인이었던 굴원의 시 <어부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무기연당은 탁영석으로 인해 물가에 발을 담그는 여유와 즐거움이 있는 풍류의 공간이 됐다. ⓒ 김종길

 
'탁영'은 중국 전국시대 시인이었던 굴원의 시 <어부사> 중에서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 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는 내용에서 유래한 말이다. 탁영석은 물이 불면 물속에 잠겼다가 물이 줄면 드러나서 세상이 어지러울 때에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탁영은 '탁청(濯淸)', '탁족(濯足)'과 그 상징적인 의미가 비슷하다. 무기연당은 원래 주재성의 공적을 기리는 기념물의 성격이 강했으나 탁영석으로 인해 물가에 발을 담그는 여유와 즐거움이 있는 풍류의 공간이 됐다.


<하환정도>에 보이는 거북 머리 모양의 돌 '귀두석(龜頭石)'은 탁영석으로 내려가는 계단 옆에 있다. 특이한 건 <하환정도>에서 목가산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목가산은 주로 매화나무나 침향목 등의 줄기를 잘라낸 나무 등걸로 마치 산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주위에 여러 가지 풀을 심고 끓는 물을 적셔 안개가 피어나게 해서 신선 세계에 비유되곤 했다.
  

무기연당의 석물들 왼쪽이 풍욕루 계단 옆의 화석이고, 오른쪽 위가 귀두석, 아래가 섬돌이다. ⓒ 김종길

 
국담과 석가산

무기연당의 연못은 국담이다. 주재성은 국담을 호로 삼았다. 옛날 산림에 묻혀 사는 사람들은 국화를 군자에 비유하곤 했다. 국담(菊潭)은 장수의 상징이기도 했으나 무기연당의 국담은 주재성의 창의와 의병 활동을 시각적, 조형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연못을 유심히 보면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산석(山石)으로 쌓은 호안 석축이다. 석축은 켜쌓기와 골쌓기의 2단으로 쌓아 견고하면서도 계단식이어서 친근하다.

특이한 건 석축의 높낮이가 사면이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동쪽과 남쪽은 단 차이가 분명하여 시각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단 차이가 매우 심한 북쪽에는 하환정이 높직이 앉아 시원한 눈 맛을 주고, 출입하는 서쪽에는 단차가 거의 없어 연못으로 다가서기 쉽다. 특히, 하환정 모서리에는 층계를 두고, 소나무 옆에는 탁영석을 두어 연못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했다. 연못에 걸터앉아 수면에 떠가는 흰 구름을 지그시 바라보는 즐거움이 그곳에 있다.
  

무기연당의 석축 연못을 둘러싼 석축은 그 용도와 시각에 맞게 동서남북이 모두 높낮이가 다르게 설계됐다. ⓒ 김종길

 
연못 가운데에는 석가산이 있다. 석가산을 만들 당시에는 양심대(養心臺)라 했다. 네모난 연못에 석가산도 네모나서 방지방도인 셈인데, 삼신산의 하나인 봉래산으로 불러 신선 세계를 추구했다. 석가산에는 봉황석, 납두석, 부석 등의 괴석이 있고 '백세청풍'이라고 적힌 괴석이 있다. 세상을 등지고 절의를 지킨 백이숙제의 정신을 드러낸 것이다. 석가산은 정원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데, 한참을 보고 있노라면 금강산 만물상을 바라보듯 다양한 생김새에 은근히 매료된다. 남쪽에는 근래에 충효사가 들어섰지만 <하환정도>를 보면 원래 석축에 꽃과 나무를 심은 화오(花塢)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누구든 한서문을 들어서서 처음 무기연당을 봤을 때 생각보다 큰 석가산과 넓은 연못에 놀라곤 한다. 잔잔한 연못을 지그시 바라보다 석가산의 기묘함에 놀라고, 하환정과 풍욕루의 운치에 빠져드는가 하면 오랜 소나무 한 그루에 위안을 받는다. 소나무엔 꽤 오랜 세월이 흐른 듯하나 <하환정도>에 나오지 않으니 1860년 이후에 심은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 기품 있는 노송은 무기연당에서 뺄 수 없는 대표 풍광이다. 노송은 이 정원의 관록을 상징하고 있다.
  

소나무와 석가산 기품 있는 노송과 기묘한 석가산은 무기연당에서 뺄 수 없는 대표 풍광이다. ⓒ 김종길

옛집에 딸린 무기연당의 역사는 1700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기연당은 17세기 중반에 처음 터를 잡은 후 200여 년간 7대에 걸쳐 완성되었다. 흔히 이곳을 "자그마하되 답답하지 않고 고요하되 심심하지 않은 매력을 지닌 우리 전통 정원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 했다. 무기연당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글은 없을 듯하다.
#무기연당 #주씨고가 #국담 #하환정 #풍욕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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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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