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땀 한 땀... 제주 사는 엄마들이 일냈네

제주 덕수리 엄마들이 만든 자수 그림책 ‘솥 굽는 마을’

등록 2018.11.13 14:21수정 2018.11.13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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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서남쪽 560여 세대 1200여 명이 곱따라니 살아가는 덕수리에서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엄마 열 사람이 어깨동무했다. 이 엄마들은 익숙하고 서툰 솜씨를 모아 한 땀 한 땀 결고운 자수 옷을 입혀 그림책을 한 권 빚었다. 멈칫멈칫 여리고 서툴게 세상 밖으로 고개 내민 그림책 이름은 <솥 굽는 마을>이다.
 

솥 굽는 마을 표지 ⓒ 스튜디오 같이


배가 고파 널브러져 있는 초록 섬 아이. 하늘 아이가 할머니 활을 가지고 놀다 실수로 당긴 시위가 하느님 엉덩이에 가서 꽂힌다. 놀란 하느님이 내려친 천둥번개. 그래서 초록 섬을 지키던 큰 별이 비바람에 흔들려 별빛이 희미해지고… 하늘 아이는 기겁을 해서 큰 별을 찾아 길을 떠난다.

밤을 도와 길을 재촉한 끝에 환하니 밝아진 아침, 배를 곯아 축 늘어져 있는 섬 아이를 만난 하늘 아이. 품 안에서 작은 솥을 꺼내어 갓 지은 따뜻한 밥을 섬 아이에게 먹인다. 생기를 차린 섬 아이는 섬에 남아 굶주리고 있을 마을 사람들 걱정에 눈물짓는다.


하늘 아이는 할머니에게 들었다면서 백일 낮, 백일 밤 잔치를 벌이며 먹을 수 있는 큰 솥 만드는 비결을 털어놓는다.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흙과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물을 바람으로 빚어 구우면 된다고.

데굴데굴 산에 있다는 빛나는 흙과 무거운 물을 찾아 섬 아이와 하늘 아이는 손을 잡고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 굽이굽이 떠나는데… 아이들은 큰 별을 살려내고, 빛나는 흙과 무거운 물을 찾아 커다란 솥을 만들어 초록 섬사람들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
 

솥 굽는 마을 내지 1 ⓒ 스튜디오 같이

 

솥 굽는 마을 내지2 ⓒ 스튜디오 같이


이 그림책은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던 제주도 설화에 제주 서남쪽 솥을 굽는 마을 살림을 곁들여 빚었다. 이 책을 꿰뚫은 열쇠말은 '살림살이'이다. 살림이 뭐냐고 물으면 어른아이 가릴 것 없이 대부분 엄마가 집에서 하는 살림살이를 꼽는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반만 맞는다. 집에서 하는 살림에 담긴 참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않고 가볍게 흘려 알기 때문이다.

'삶'과 짝을 이루는 말이 '죽음'이듯이, '살림'에 맞서는 말은 '죽임'이라고 하면 그제야 "아!" 하며 탄성이 터진다. 살림살이 밑절미에는 "너를 살릴 때 비로소 내가 살 수 있다"는 엄마 마음이 고스란하다. <솥 굽는 마을>에서 굶주림에 겨워 널브러진 섬 아이를 살린 조그만 솥은 한 목숨살림을, 커다란 솥은 마을살림을 가리킨다.
 

솥 굽는 마을 내지 3 ⓒ 스튜디오 같이

 
덕수리 사람들은 오래도록 솥을 비롯해 농사 짓고 집을 지을 때 없어서는 안 될 연장을 만들어왔다. 이 마을에서 만든 농기구들은 쇠가 단단하고 흙이 잘 달라붙지 않아 제주 곳곳에 사는 사람들이 즐겨 찾았을 만큼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통이 좋아진 뭍에서 물밀 듯이 들어오는 연장 홍수에 떠밀려 스러지고 말았다. 이제는 마을 토박이 어른들과 뭍을 비롯한 제주시에서 찾아든 새내기들이 어우러져 해마다 가을이면 솥 굽는 잔치를 열며 솥을 굽던 전통을 기리고 있다.

<솥 굽는 마을>은 모두 65명밖에 되지 않는 덕수리에 있는 작은 초등학교 엄마 열 분이 뜻 모아 빚은 그림책이다. 그림책이니까 그림만 그려 넣어도 좋았으련만 엄마들 욕심은 끝 간 데 없었다. 밑그림을 그린 위에 솜씨가 좋은 이, 서툰 이를 가리지 않고 콧잔등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도록 자수를 놨다.


그야말로 있는 솜씨, 없는 솜씨 짜내어 꼬박 한 해가 걸려 빚은 고운 솥단지다. 스스로를 '로라네 언니들'이라고 부르는 결 고운 이 엄마들은 글을 쓰고 한 땀 한 땀 자수를 놓은 것뿐만 아니라 더 큰 일을 벌였다. 출판사 '스튜디오 같이'를 만들어 출판업 등록까지 하고 말았으니.

참,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던 설화를 바탕으로 엄마 열 분이 식구들 도움을 받아가며 한 해를 소복이 바친 이 책 <솥 굽는 마음>을 눈으로만 읽고 덮으면 반만 보고 마는 것이다.

동무와 나란히 앉아 한 사람은 책을 펼치고 한 사람은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가야 한다. 그러면 책이 눈에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세포 하나하나를 울리고 뼛속 깊이 새겨질 것이다.

"선무당!" 책을 덮으며 떠오른 낱말이다. 서툰 사람이 나서서 설쳐대다가 일을 그르치고 만다는 데서 나온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이 속담은 이제 결 고운 솥단지 '스튜디오 같이'가 빚은 <솥 굽는 마을>에서 움튼 어울려 살림 덕분에 "선무당이 서로 살린다"로 뒤집혀질지도 모른다.

솥 굽는 마을

로라네언니들 지음,
스튜디오같이, 2018


##평화 ##한반도 ##백두 ##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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