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박정희 감귤 도입설' 주장한 김진태, 사실일까

제주 감귤의 역사는 길다... 정부 정책이 도입된 건 1966년

등록 2018.11.13 18:03수정 2018.11.13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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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감귤은 누가 심었는지 아시는가? 1962년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제주를 방문하면서 감귤 농사를 제안하여 처음 도입됐다고 한다. 56년 전에 벌써 먹고살 길을 찾은 분과 그걸 3대 세습 독재자에게 갖다바치는 분... 비교되지 않나."

김진태 자유한국당 의원(강원 춘천)이 1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의 일부다. 김 의원은 지난 11일과 12일 북한에 제주 감귤 200톤을 보낸 문재인 정부의 처사를 비판하면서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먹고살 길을 찾아내 만든 결과물을 북한 3대 세습 독재자에게 갖다바쳤다'는 주장을 폈다.

'제주도 감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작품'이라는 김진태 의원의 주장은 사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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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축이는 김진태 김진태 자유한국당 의원이 13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정우택 의원의 '대한민국 이대로 가야 하나'특별강연을 들으며 목을 축이고 있다. ⓒ 남소연

 
[사실 검증] 고려사·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하는 제주 귤

감귤 재배의 역사는 깊다. 이는 옛 문헌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고려사 세가>(1451년 편찬)에 따르면 '고려 문종 6년(1052년)에 탐라에서 약용으로 활용하기 위해 공물로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이후 감귤은 더 자주 등장한다. 태종 때 신하를 제주로 보내 귤나무를 전라도에 옮겨 심도록 지시를 했으며, 제주도에서는 이미 진상품으로 조정에 공급되고 있었다.
 
"제주의 감자(柑子)와 유자(柚子)와 동정귤(洞庭橘)과 유감(乳柑)과 청귤(靑橘)과 (중략) 오징어 등 물건도 또한 그 시절을 따라서 진상하게 하소서." - 세종실록 11권, 세종 3년 1월 13일

또한 세종은 1426년 '경상도와 전라도 남해안 지방까지 유자(柚子)·감자(柑子)를 심어 시험 재배'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여러가지 과일 나무에 대하여 감사로 하여금 그 담당 지방의 크고 작은 데 따라 포깃수를 정하여 재배하게 하고 감사를 실시하며, 그 중에 도마다 생산되지 않는 유자와 감자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연변인 여러 고을에서 포깃수를 재배하게 하고..." - 세종실록 31권, 세종 8년 2월 4일

전라도·경상도 이외의 지역에서 시험 재배한 기록도 있다. 조선시대 궁중의 꽃·과실나무 관련 사무를 맡은 상림원(上林園)은 세종 10년(1428) 12월 9일 "강화부(江華府, 현재의 강화도)에 감자(柑子)·유자(柚子)·석류(石榴)·모과(木瓜) 등의 각종 과목을 재배하도록 하소서"라고 건의했다.

세종은 이를 따랐으나 결실을 보진 못한다. 10년 뒤인 1438년 강화부에서의 귤 재배는 폐해가 많다는 보고를 받는다.
 
"〈당초〉 귤나무[橘木]를 옮겨 심은 것은 본시 잘 살 수 있는 것인지의 여부를 시험하려는 것이었다는데, 수령이 가을에는 집을 짓고 담을 쌓고 온돌을 만들어서 보호하고, 봄이 되면 도로 이를 파괴하여 그 폐해가 한이 없으며..." - 세종실록 81권, 세종 20년 5월 27일

이미 조선시대부터 감귤 재배가 이뤄지고 있었던 것.

[사실검증] 제주 감귤산업,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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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농촌진흥청 감귤연구소에서 아이들이 감귤을 따고 있다. ⓒ 연합뉴스=농촌진흥청 제공

 
김진태 의원이 제기한 '박정희 감귤 도입설'에 대한 전문가의 견해는 어떨까. 감귤박물관(제주 서귀포시 운영) 관계자는 13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우선 감귤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라고 운을 뗐다.

이 관계자는 "조선시대 임금이 진상돼 올라온 감귤을 성균관 유생에게 나눠주고 과거시험을 치렀다"라며 "이를 황감제라 부르는데 갑오개혁 때까지 이어졌던 시험이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1911년에 에밀 조셉 타케 신부(프랑스 출신)가 일본에서 가져온 온주밀감 15그루(13그루라는 설도 있다)를 서귀포시 서홍동에 심어 시험재배를 했다"라고 설명했다.


해석에 따라서 1911년을 제주 감귤 산업의 시작이라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 감귤박물관 관계자는 "당시 기술로는 제주의 감귤이 썩지 않고 육지로 운송됐을 것이라 보기 힘들다"라며 "산업이라 이름 붙이기는 어려울 것 같다"라고 평가했다.

'박정희 감귤 도입설'에 대해 이 관계자는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의 지시에 따라 대량생산으로 이어진 것은 맞아 보인다"라며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돈이 되겠다' 싶어 정부 정책적으로 심을 것을 추진했다, 감귤 농사에 있어서 하나의 역사적 변곡점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1966년 정부는 '농업주산지조성 계획'을 발표한다. 귤뿐만 아니라 농축산식품을 망라한 계획안이었다.

감귤박물관은 감귤산업화의 시기를 1970년대로 보고 있다. 감귤 농사는 나무를 심자마자 바로 수확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일정 기간 나무가 자라서 규모를 형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검증결과] 대체로 사실

'제주도 감귤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심은 것'은 사실이 아니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제주도를 시찰하며 감귤 재배를 장려했다는 점, 이후 정부가 감귤 농사를 정책적으로 추진했다는 점 등을 고려해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감귤농사를 제안해 처음으로 도입됐다"라는 김진태 의원의 주장은 '대체로 사실'로 판정한다. 

오래전부터 제주도에 귤 농사가 행해지고 있었지만, 정부가 정책적으로 지원하고 농가가 집단재배 체계를 갖춘 시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이후이기 때문이다.

다만, 김진태 의원이 언급한 년도는 사실이 아니다.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제주도를 찾아 귤나무 심기를 장려한 때는 '1962년'이 아니라 1961년이다. 1961년 11월 15일 치 <경향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지난 9월 이곳(제주도)를 돌아본 박 의장이 '귤을 재배할 수 있는 모든 곳에 귤 나무를 심도록' 특별지시를 내렸다"라고 전했다.

[알아두면 쓸모있는 정보]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의 지시와 정부의 감귤주산지조성 계획(1966) 발표 이후 제주도에서 먼저 감귤농장 사업에 뛰어든 사람은 김종필 전 총리였다.

1968년 김종필 전 총리는 서귀포 땅 13만평을 3250만 원(평당 250원)에 구입해 농장을 만들어 대규모로 감귤을 재배했다. 이후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김종필 전 총리가 부정축재를 했다며 그의 재산을 몰수했는데 제주도 감귤농장의 감정평가액은 28억 원가량이었다. 12년 사이에 86배 정도 값이 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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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감귤 #김진태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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