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보고 나온 재수생 딸에게 엄마가

딸에게 들려줄 말을 찾아 읽은 책 '말의 내공'... 뜻밖의 반성과 치유를 얻다

등록 2018.11.16 10:02수정 2018.11.16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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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을 보는 것은 수험생이지만, 수능을 준비하는 것은 비단 수험생만이 아니다. 수험생 딸을 둔 나도 수능을 맞을 준비를 했다. 수능을 앞둔 주말, 나는 서점에 가서 <말의 내공>이란 책을 구입했다.

조금이라도 딸에게 힘이 될 수 있는 말을 해주고 싶어서 '말'에 관한 책을 찾았는데, 마침 신간이고 분류가 자기계발이 아닌 인문학인 점이 눈길이 갔다. 그런데 딸에게 좋은 말을 해주겠다는 나의 원래 계획과는 달리, 책장을 넘길수록 딸이 아닌 오히려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삶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타인의 욕망을 좇지 않는 것이다. 왜 대다수 사람이 불행을 호소하며 자살에까지 이르는가. 인생의 최종 목적이 이기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남을 짓밟고서라도 이루려는 것이 허망하게도 결국 타인의 인정이다. 이기적으로 열심히 일해서 얻으려는 행복이, 타인의 우러름을 받는 것, 타인의 부러움을 사는 일이다. 이는 삶의 목적이 내게 있지 않고, 타인에게 있는 것이다. 타인의 욕구와 인정이 아닌,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이 당연한 진리를 망각해서는 행복할 수 없다."(22쪽)

재수생인 내 딸은 작년에도 수능을 치렀다. 그때 수능을 앞둔 딸에게 나는 마냥 잘 보라고 파이팅만 외쳐댔다. 수능을 본 직후에는 평소보다 점수가 낮게 나와서 속상한 나머지 딸에게 제대로 된 위로 한 마디 못해 주었다.


이런 나의 실수가 딸에게 큰 상처가 되어 혹시 딸이 재수를 결심한 데 영향을 주었던 게 아닐까 하는 반성이 뒤늦게 몰려왔다. 흔히 말하는 '좋은 대학'을 가야 남한테 무시 받지 않으며 살 수 있는 세상이라는 것을 엄마이기 이전에 인생을 먼저 산 선배로서 너무나 잘 알고 겪어왔다. 학벌만은 대물림하지 않고자 나는 부지런히 딸을 재촉했다. 

그런데 딸이 행복하길 바랐던 나의 언행이 도리어 딸에게 자기 자신을 만족하고 사랑하지 못한 채, '타인'의 욕망을 좇도록 내몬 것은 아니었을까. 본의와 달리 내가 그렇게 딸을 불행에 익숙해지도록 만들어온 것은 아니었을까. 가슴이 먹먹해졌다.

진정 딸을 사랑하는 엄마라면 못된 현실을 탓하고 순응하기 이전에 적어도 엄마만큼은 딸을 그 자체로 아끼고 사랑해주어야 했다. 문제는 정작 나인데, 나를 그대로 둔 채 딸에게 할 번지르르한 말만 궁리하며 책을 읽었으니 애초에 그릇된 뜻이었다.    

어느덧 11월 15일. 수능일이 됐다. 그런데 이번엔 미안한 마음에 그리고 조심스러운 마음에 나는 또 딸에게 엄마다운 말 한마디 해주지 못했다. 그저 시험장으로 가는 딸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는 것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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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지는 15일 오전 서울 중구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에서 수험생들이 긴장된 모습으로 고사장에 시험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 이희훈


딸이 고사장으로 들어가고 1교시, 2교시, 3교시, 마지막 교시까지 시간이 흘렀다. 시험을 마친 아이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아마 아이들이 절반은 나오지 않았을까 싶을 때쯤, 저만치 내 딸이 보였다.

살면서 이때만큼 딸의 표정을 애타게 살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딸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어두웠다. 한데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 순간 내 마음이 아련하면서도 한편 왠지 모를 감정이 일어남을 느꼈다.


딸에게 속죄할 기회가 있다는 희미한 안도감이었던 것 같다. 딸이 표정이 밝았다면 나도 같이 기뻐했을 테고, 그러면 나는 영영 딸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할 기회를 잃게 된다. 나중에 상황이 잘 풀려서 하는 사과가 진심이긴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까이서 딸을 마주보자 왈칵 눈물이 나왔다. 덩달아 딸도 눈물을 쏟았다. 뭐라도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야 딸, 시험 못 본 것 같아서 속상해서 우는 게 아니야"라고 말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껴안고 제자리에서 한참을 같이 울었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딸은 평소보다 일찍 잠이 들었다. 워낙 조용하고 내색하지 않는 딸이다. 그간의 피로가 쌓이고 긴장이 풀린 탓인지 그래도 일찍 잠이 들었다. 많이 걱정했는데 그래도 잠을 청하니 다행이다.

딸이 잠든 새벽.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아까 딸은 왜 울었을까? 엄마의 미안한 마음이 가 닿았던 것일까? 아니면 엄마가 작년처럼 실망해서 운 줄 알고 서운한 마음에 따라 운 걸까? 딸이 일어나면 물어봐야 알 것이다. 그런데 당장 딸에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수능이 끝났다. 이상하게 나는 마음 한편이 홀가분하다. 먼 훗날, 2018년 11월 15일이 적어도 우리 모녀에게만큼은 단지 '망친 수능일'로 기억되지는 않을 것 같은 예감이다.
 
"대화란 말의 나눔 이전에 마음과 마음의 나눔이다. 말은 단지 도구다. 내가 내면의 목소리를 낼 때 타인 역시 나에게 바깥의 귀를 지나 내면의 귀를 열어 준다. 모국어가 달라 의사소통이 어려운 사람들도 서로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된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내면의 목소리다."(164쪽)
 
  
덧붙이는 글 수능을 본 전국의 딸과 아들에게. 그리고 학부모님들에게 부칩니다.

말의 내공 - 사람을 끌어당기는 동서양 고전의 화술

신도현.윤나루 지음,
행성B(행성비), 2018


#말의 내공 #수능 #모녀 #신도현 #윤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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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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