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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11.16 09:18수정 2018.11.16 09:18
나그네여, 스파르타 사람들에게 전해주오.
조국의 명을 받아 우리가 이 곳에 잠들었노라고.
- 테르모필레의 스파르타 전사들을 기리며 당대의 시인 시모니데스(Simonides)가 지은 비문

 
연암의 능력을 통해 나는 과거 콜키스 왕국으로 불렸던 동유럽의 조지아(Georgia)로 황금 양털을 가지러 간 이아손의 몸에 잠시 깃들 수 있었다. 거기서 그리스 신화 중 최고로 악명 높은 마녀 메데이아가 따라주는 옛 조지아의 와인(gvino, 포도주를 가리키던 고대 조지아어)을 마시려던 순간 다시 현재의 시간으로 돌아왔다. 연암은 내게 왜 조지아에서 그리스 신화를 떠올렸는지를 물었다.
 
"사실 그게 조지아라는 나라에 대해 우리가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굉장히 먼 나라처럼 여겨졌던 이 나라가 의의로 우리에게는 익숙한 고대 지중해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걸 말해주는 걸 수도 있구요."
 
우리가 마시던 조지아의 구루자니(Gurjaani) 와인은 오렌지 와인, 혹은 앰버 와인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잘 익은 살구빛의 색과 마찬가지로 혀뿌리까지 새콤하게 침이 돋는 살구의 신맛이 났다.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그리고 아르메니아 등 이른바 코카서스(Caucasus) 산맥 일대의 세 나라들은 우리가 흔히 백인(Caucasian)이라 부르는 흰 피부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어원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알고 보면 그리 생소한 나라도 아니지요.

이 곳은 아시아와 유럽을 이어주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는 지형적 특성과 그 곳에서 생산되는 맛있는 와인들 때문에 주변의 강대국으로부터 숱하게 침략과 약탈을 당해야 했습니다. 특히나 이 지역의 와인들은 훗날 이슬람 교리 때문에 음주가 금지되기 전까지는 지금의 이란인 페르시아 왕국의 왕들에게 공물로 바쳐졌죠.
 
요즘은 만화를 원작으로 한 할리우드 영화(<300>) 때문에 어마어마한 괴물들처럼 묘사된 페르시아지만 사실 그 당시만 해도 그리스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높은 문화 수준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다만 평야에서 싸우는 것이 익숙한 그들이 온통 산과 만으로 둘러싸인 그리스를 침략한 것은 실수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분명해졌지만요.
 
그리스를 침략한 크세르크세스(Xerxes)가 진중에서 마신 와인은 분명 이 코카서스 3국, 특히 조지아나 아르메니아에서 진공품으로 받은 와인들이었을 겁니다. 달콤한 걸 선호했던 페르시아 사람들의 입맛으로는 아마도 신맛이 강한 오렌지색의 와인들보다는, 보다 묵직한 맛이 나는 레드 와인을 더 좋아했을 거구요."

 
말을 해놓고 아차 싶었다. 연암, 이 호기심 많은 노인네가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슬며시 한 손을 올리는 것을 보자마자 나는 또 다시 공중에 나타난 검은 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무래도 그를 단테의 베르길리우스 같은 스승이라 칭한 것은 취소해야 할 듯하다. 그는 길 잃은 나를 인도하는 대신 술과 역사에 대한 내 지식을 곶감 빼먹듯이 빼먹으며 자신의 지식욕을 채우기로 작정한 것 같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온통 화려한 복색을 한 고관들이 내 앞에 길게 두 줄로 늘어서 있었다. '그래도 연암 이 양반이 양심은 있었나 보군. 날 크세르크세스 왕에 빙의 시킨 모양이네'라고 생각하며 페르시아의 왕이 누릴 수 있었던 온갖 미식과 미주의 향연에 흐뭇한 웃음을 짓는 순간, 등 뒤에서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고아스, 저 이베리아(Iberia, 지금의 조지아 동부에 위치했던 고대 왕국. 스페인이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도 이 왕국의 이름에서 비롯됐다 한다)에서 진상한 와인을 가져오라."
 
그 목소리를 따라 등 뒤로 눈을 돌리자 높다란 황금색의 보관을 쓰고, 곱슬거리는 수염을 길게 기른 중년의 미남자가 왕좌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길게 인사를 하는 내 몸에서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그랬다. 바고아스(bagoas)는 페르시아의 환관, 즉 내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순간 나는 왕의 곁에서 내 눈에만 보이게 하늘거리고 있는 연암의 아지랑이를 향해 쌍욕을 내뱉을 뻔했다. 내시라니! 그러나 입 밖으로 소리내 욕을 내뱉었다간 아마 이 '역사체험'을 끝내기도 전에 난 목이 잘릴 게 뻔했다.

나는 극한의 인내심으로 자신을 추스르며 옆에 놓인 황금의 술병에서 짙은 보라색의 액체를 황금잔에 따랐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황금의 접시에 받쳐 왕에게 올렸으나 그는 잔을 집는 대신 나를 이상한 눈길로 내려다봤다. 난 다시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기미(氣味, 왕의 측근이 독이 들지 않았는지 시식이나 시음하는 것)까지 해야 하는구나!

그러나 나의 몸은 그런 내 울화통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공손하게 한 잔을 더 따라 한 모금을 입에 머금고 있었다. 잘 익은 검은 색 체리와 아몬드의 달달한 맛에 이어 바닐라 향이 은은하게 입안을 감쌌다. 이윽고 약간의 육두구(nutmeg)향이 섞인 다크 초콜릿의 진한 맛이 입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긴 여운을 남기고 식도를 타고 흘러 내려갔다. 아마 현대였다면 이 와인은 조지아를 대표하는 레드와인, 무크자니(Mukuzani) 였으리라.
 
살짝 눈을 감고 그 여운을 즐기던 내가 다시 눈을 뜨자 왕이 여전히, 그러나 아까보다는 조금 더 눈꼬리가 올라간 모습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려가다 만 와인이 목구멍에 걸릴 뻔했으나 난 헛기침으로 무마하면서 왕에게 고했다.
 
"이상 없사옵니다. 드시옵소서."
 
왕, 정확히는 중동과 중근동, 북아프리카에서 이집트와 리비아의 동쪽 절반을 다스리는 광대한 페르시아 제국의 관대한 왕, 크세르크세스 1세가 내가 따라 준 술잔을 들어 천천히 와인을 한 모금 마시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비록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대머리에 전신이 피어싱으로 뒤덮이고 달랑 팬티 한 장만 입은 모습으로 묘사됐던 그이지만 사실 크세르크세스는 오리엔트의 전제 국가를 다스린 왕 답지 않게 신하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했으며, 토론을 좋아했던 왕이었고, 긴 수염과 황금색의 보의로 전신을 위엄 있게 감싼 모습이었다.
  

크세르크세스 왕묘의 부조에 나타난 페르시아의 전사들(좌)과 크세르크세스 왕(우). 만화가 원작인 할리우드 영화의 묘사와는 달리, 페르시아는 당시 중근동과 아프리카, 이집트, 리비아를 아우르는 대제국이자 최고의 문명국이었으며, 페르시아 남성들은 긴 수염을 남성성의 상징으로 중시했다. 영화와 같은 복색을 했다면 아마 광인으로 몰렸을 것이다. ⓒ shutterstock.com


와인을 마신 크세르크세스는 내가 (허리를 구부리고 길게 조아리며!) 내민 쟁반에 잔을 내려 놓고, 자신의 앞에 늘어선 대신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마르도니아스(크세르크세스왕의 고종사촌이자 그리스 정벌론자). 그러니까 그대는 우리가 그리스를 반드시 정벌해야만 한다는 것이오? 그리고 그대는 수도 없이 졌던 스파르타를 내가 직접 나서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것이오?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무엇이오?"
 
크세르크세스의 질문이 끝나자 역시나 긴, 그러나 왕보다는 짧게 수염을 기른 날카로운 눈매의 남자가 대신들 중에서 한 발 앞으로 나서서 대답을 했다.
 
"폐하, 일찍이 제가 저 가증스런 스파르타인들을 싸워서 이기지 못했던 것은 그들의 호전적 기질과 싸움에 목숨을 걸고 임하는 태도에 우리 병사들이 지레 겁을 먹고 변변히 싸워보기도 전에 도망가기 일쑤였기 때문입니다. 저 스파르타인들은 스스로를 제우스의 아들 라케다이몬(Lacedaemon)의 후예라 해서 라케다이모니아(Lacedaemonia)라 부르며 엄격한 사회 통제로 순수한 라케다이몬 시민들의 수는 항상 1만을 넘지 않습니다. 이 '시민'들은 오직 군사와 국정만을 담당하며 우리가 스파르타인이라 부르는 건 이 라케다이몬 시민들을 가리킵니다.
 
스파르타에는 시민들 외에 다른 두 계층이 있는데 하나는 시민권은 없이 오직 수공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페리오이코이(Perioikoi. 그리스어로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임)라 불리는 계층으로 이들의 수는 대략 7만 명 내외입니다. 이들은 스파르타 병사들의 보조병으로 전쟁터에 나가는 일도 가끔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말하자면 국가 소유의 농노로서 결혼을 제외한 그 어떤 권리도 없이 오로지 농사나 목축만을 담당하는 헬롯(Helot)이라는 사람들로 이들은 원래 스파르타에게 정복된 나라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수는 대략 16만 명으로 전쟁터에 나가서도 스파르타 병사들의 온갖 허드렛일을 담당하며 전투에는 참가할 수 없는 그야말로 비참한 노예입니다.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들을 통틀어 이렇게 소수의 인원이 다수의 노예를 기반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오직 스파르타 뿐입니다.
 
이런 계급 구조 때문에 스파르타의 병사들은 늘 무예를 연마하고 싸움에 대비하고 있어서 소신이 거느렸던 것과 같은 작은 병력들간의 전투에서는 스파르타를 이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대군을 거느리고 그들을 사방에서 포위한다면, 평소에 스파르타의 지배에 반감을 품고 있던 헬롯들이 우리에게 호응해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자연히 그리스 땅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그냥 달콤한 음식과 맛있는 술, 귀한 금은 보석으로 스파르타인의 정신을 타락시켜 그들 스스로 무너지게 하면 안 되는 거요? 그대의 설명대로라면 겨우 1만의 스파르타 시민들만 타락시키면 그들이 무슨 수로 7만의 페리오이코이와 16만의 헬롯을 다스릴 수 있겠소? 우리는 그들이 타락하기를 기다려 페리오이코이와 헬롯의 반란만 부추기면 될 것 같은데…"
 
"대왕 폐하, 그건 폐하께서 그리스인들, 그 중에도 스파르타인들을 잘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봐라, 바고아스(즉, 나). 폐하께 그리스의 와인을 올리거라."

 
옆에서 귀 기울여 듣고 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베리아(즉, 현대의 조지아)의 와인이 담겨 있던 쟁반 옆에 하얀색 점토 도기병이 놓여 있었다. 그리스풍인 도기병의 모양으로 봐서 저 도기병이 그리스 와인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그 병에 담긴 '내용물'을 또 다른 잔에 따르며 슬쩍 마르도니아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표정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기미'를 위해 그 와인을 한 모금 얼른 입에 물었다.
 
다음 순간, 나는 와인을 뿜을 뻔했으나 그랬다가는 와인에 독이라도 든 걸로 오해 받거나 아님 폐하의 면전에서 무례를 저지른 죄로 목이 잘릴 게 뻔했다(연암이 아지랑이 속에서 킬킬거리며 웃는 모습을 본 것 같다).

아! 분명 과일향은 약하게 풍겼지만 이건 와인이라기보다 차라리 테레빈유(송진이나 소나무 가지를 증류해서 만드는 무색의 기름. 특이한 방향이 있다)에 가까웠다. 나를 쳐다보는 마르도니아스의 표정을 보아하니 저 교활한 인간은 극적인 효과를 위해 그리스 와인 중에서도 특히 송진향이 강한 와인을 가져온 게 분명했다.
 
그리스 와인은 조지아의 크베브리와 비슷한 암포라(amphora)에서 발효를 시킨다. 차이점이라면 조지아의 크베브리는 옹기의 입구만 빼고 땅에 묻지만 그리스의 암포라는 땅에 묻는 대신 공기 중에 노출된 채로 발효를 시키고, 발효가 끝나면 보관도 암포라에 한다.

이때 유약을 바르지 않은 암포라의 표면으로 와인이 새나오는 것을 막고,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옹기의 안쪽에 송진을 발라서 일종의 방수 및 방부 처리를 하는데, 이 송진 때문에 그리스 와인에는 독특한 송진향이 배게 된다.

심지어는 오래 되거나 상한 와인의 시큼한 향을 가리기 위해 송진 덩어리를 통째로 와인 안에 넣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송진향이 강한 그리스 와인은 송진을 가리키는 레치나(retsina)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레치나는 바로 영어의 레진(resin. 송진)의 어원인 것이다.
 

대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고대 그리스의 암포라들. 그리스인들은 이런 암포라의 안쪽에 송진을 발라 방수처리를 한 후 와인이나 오일을 보관했다. 송진은 방부처리를 위해 통째로 와인 안에 넣기도 했는데, 이런 과정 때문에 그리스 와인은 독특한 송진향이 나서 송진을 가리키는 레치나(retsina)라고 불리기도 했다. 출처: Greek Amphoras for Wine and Oil ? British Museum. ⓒ Andres Rueda


현대에서도 나는 그리스 와인 특유의 이 송진향에는 적응하기 어려웠다. 물론 양조와 보관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서는 이렇게 과다한 송진을 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와인 본연의 풍부한 과실향을 그대로 느낄 수 있지만, 기원전 5세기인 지금은 아마 송진을 쓸 수 있는 한껏 썼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맛(?)과 향이 나겠지. 아무튼 나는 거의 사약을 들이키는 심정으로 그 와인을 마저 삼켰고,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약간의 기대감과 함께 또 다른 잔에 그리스 와인을 따라 크세르크세스 왕에게 올렸다.
 
나의 기대감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 버렸다. 우아한 손가락으로 잔을 들어 점잖게 한 모금 마신 크세르크세스는 오만상을 쓰며 그 와인을 그대로 내 얼굴에 뿜어 버렸다. 마신 것도 억울한 이 와인을 이제는 온통 뒤집어 쓴 나는 현대의 시간으로 돌아오면 꼭 내가 구할 수 있는 가장 송진향 강한 레치나(retsina)를 구해서 연암에게 맛 보이리라 다짐했다.

내 결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암의 아지랑이는 여전히 낄낄거리며 크세르크세스 옆에서 하늘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행여나 송진향이 배기라도 할까 내 곁에서 슬금슬금 멀어졌고, 다행히 나보다 하급 내시인 듯한 자가 나에게 천을 내밀어 나는 얼굴에 뒤집어쓴 와인을 닦아냈다.
 
크세르크세스가 오만상을 쓰며 마르도니아스를 질책했다.
 
"마르도니아스, 이게 무슨 짓인가! 감히 내게 이런 송진을 와인이라고 마시게 하다니!"
"아닙니다, 폐하. 제가 어찌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방금 드신 그 와인은 분명 그리스인들, 그 중에서도 아테네인들이 특히 사랑하는 와인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이런 향을 가진 와인이야말로 정신을 고양시켜주고, 인간의 지혜를 밝혀준다 믿지요. 그래서 엄청난 양을 마셔대고 취한 채로 서로 토론을 하고 싸우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스파르타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마르도니아스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이런 와인조차 스파르타 외의 다른 그리스인들은 신들의 음료인 넥타르(nectar, 올림포스의 신들이 마신다는 음료. 신들은 넥타르를 마시고 그들의 음식인 암브로시아를 먹는데 인간이 이를 먹고 마시면 신과 같은 불멸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었다. 현대의 과일 음료 이름이 여기서 유래됐다)에 비교하며 많은 양을 마십니다. 스파르타인들이 이런 와인이라도 마신다면 저희는 즉시 폐하께서 드셨던 것과 같은 향긋하고 맛있는 이베리아와 아르메니아 와인들을 값싸게 수출해서 스파르타인들의 타락을 부추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와인은커녕 오로지 자신들의 샘에서 길은 물만 마십니다. 맛있는 식사는 정신을 무르게 만든다며 식사도 공동 취사장에서 준비한 질기디 질긴 고깃덩어리를 먹을 뿐입니다. 여인네들은 값비싼 장신구나 보석을 걸치지 않고 오로지 길쌈에 힘쓰고, 옷도 거친 무명옷만을 입습니다.

아이들은 태어나면 5명의 감독관이 주관하는 시험을 치러 스파르타 전사로서 성장할 정도의 육체를 가진 아이들만을 양육하며, 조금이라도 장애가 있거나 건강하게 자라기 힘들다고 판단되는 아이들은 그대로 낭떠러지 아래로 던집니다.
 
일곱살이 되면 집단생활을 시작하는데 그곳에서는 간단한 읽기, 쓰기를 제외하곤 오로지 육체 단련과 무술 훈련만을 하며, 맨바닥에 약간의 건초만 깔고 자고, 딱딱하고 검은 빵에 야채와 질긴 고기로 끓인 그 유명한 '스파르타 잡탕'을 땅에 앉아 먹습니다.
 
스무살이 되면 성인의례를 거치는데 활과 검, 창과 방패만 쥐여준 채로 황야에 내몰아 혼자서 7일간을 버텨야 하고, 마지막 날에는 자신들의 노예인 헬롯들 중 한 명을 불시에 습격해서 그 머리를 가져가야만 비로소 한 명의 스파르타 전사가 된 것으로 인정받습니다.
 
대왕이시여, 이런 사람들을 무슨 수로 타락시킨단 말입니까? 그들은 아무런 물건도 수입하지 않고, 다른 나라들과 돈도 공유하지 않으며, 글조차도 쓰지 않습니다. 오로지 전사로서 살고 죽는 것만이 전부인 그들을 이길 길은 오로지 그들의 작은 인구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사방을 포위하고 조금씩 병력을 소모시키면서 헬롯들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기는 것만이 유일한 길일 것입니다."

 
그랬다. 스파르타의 전사들은 단순히 운동과 무예 연습만 해서 길러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날 때부터 철저하게 전사, 내지는 살인기계로 길러졌던 것이다.
 
내가 아직도 송진 냄새 풀풀 나는 얼굴로 흥미진진한 그들의 대화에 빠져들고 있는데,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아지랑이 속에서 연암이 손을 내밀어 가볍게 내 팔을 잡았다. 나는 이제 돌아가나 보다 하는 안도감과 이 대화의 결말을 좀 더 듣고 싶은 아쉬움을 동시에 느끼며 아지랑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이윽고 눈을 떴다.
 
그런데 내 눈 앞에 나타난 것은 나의 작은 술집 '1001 M.U.N'에서 와인병을 마주 하고 앉은 연암이 아니었다.
 
그들은 바로…!
 
(19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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