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리를 조종하려는 자, 알아차리는 방법

[리뷰] 크리스텔 프티콜렝 '당신은 사람 보는 눈이 필요하군요'

등록 2018.11.16 17:57수정 2018.11.16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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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일은 없었지만 잊을 수 없는 몇 해 전의 하루가 있다.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겨우 출근은 했지만 조퇴를 고민할 정도로 몸살이 심했다. 퇴근 후 만나자고 전화한 친구에게 사정을 설명했지만, 친구는 그럴 수 없다고 답했다. 

친구는 아파도 저녁은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나를 설득했다. 내가 사는 곳 근처로 올 테니 꼭 만나자는 친구를 거절할 수가 없어, 저녁만 간단히 먹기로 하고 우리는 만났다. 밥을 먹으면서도 나는 집에 가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친구가 꼭 사야 할 것이 있다며 근처 쇼핑몰에 가자고 했다. 나는 분명하게 말했다. 

"미안한데 아까도 말했잖아. 나 몸이 너무 안 좋다고. 집에 가서 쉬고 싶은 생각 뿐이야. 정말 힘들어."

한 시간 뒤, 나는 의류 매장 탈의실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여러 벌의 옷을 바구니 한 가득 담아 들어간 친구를 기다리며. 그대로 바닥에라도 드러눕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그제서야 무언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내 인내심도, 체력도 바닥이 날 때쯤, 친구는 쇼핑을 마쳤다. 어떻게든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단 생각에 내가 안도할 때, 친구는 이런 말을 남기고 뒤돌아 갔다. 나는 대답할 틈도, 기운도 없었다. 

"종일 그렇게 인상을 구기고 있으면 어떻게 해. 그렇게 힘들면 못 나온다고 했어야지. 너 때문에 나까지 다 기운이 빠지잖아." 


나는 그날 몇 번이고 반복해 아프다고, 힘들다고 말했다. 희미하던 느낌이 확실해졌다. 그녀가 무언갈 결정하면, 내 의사는 중요치 않았다. 내가 끝내 거절하거나 협조적이지 않으면, 그녀는 내게 죄책감을 떠넘겼다. 나는 그 기분이 싫어서 더 강하게 거절하지 못했고 악순환은 반복되었다.

아침부터 나를 괴롭힌 병의 정체는 감기 몸살과 장염이었다. 그날 밤, 날이 새도록 화장실에 들락거렸고 고열에 시달렸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몇 번이고 다짐했다. 다시는 이런 패턴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거창하게 말할 생각은 없지만, 결국 나를 지켜야 할 것은 내가 아닌가. 
 

<당신은 사람 보는 눈이 필요하군요> 책표지 ⓒ 부키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의 저자 크리스텔 프티콜랭의 신작 <당신은 사람 보는 눈이 필요하군요>가 나왔다. 전작이 '정신적 과잉 활동인'을 설명했다면, 이번 책은 그들이 왜 심리 조종자의 마수에 반복적으로 걸려 드는지, 또 어떻게 하면 빠져나올 수 있는지에 집중하고 있다. 

그가 책 한 권에 걸쳐 설명한 정신적 과잉 활동인을 다 요약할 순 없지만, 몇 가지만 옮기자면 이렇다. 이들은 남들보다 오감이 발달해 과민할 정도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지나치리만큼 감정이입을 잘한다. 어린 시절부터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비판받아 자존감이 낮아지기 쉽고 거부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강하다.

이들은 타인을 이해하고 상대의 관점을 헤아리길 좋아한다. 역지사지에 능한 이 특성은 오히려 심리 조종자의 늪에 빠져들기 쉽도록 기능한다고 한다. 상대에게 악의가 있다는 것을 좀처럼 상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명백한 기만, 거짓, 악의를 목도하고도 자신의 직관을 잘 믿지 못한다고 한다.

반면 심리 조종자는 각각 그 심각성은 다르지만 기본적인 작동 방식은 동일하다고 한다. 악의, 반복적인 거짓말, 현실 부정, 죄의식 조장 등. 이들은 타인에게 정서적 협박과 위협을 가하며, 피해자들은 과도한 스트레스, 병적인 죄의식, 벗어날 수 없는 불안감, 산만하고 흐릿한 정신 상태 등 괴롭힘의 징후들을 보인다고 한다.

나로선 놀라웠다. 저자는 악의를 가진 가해자와 선량한 피해자라는 이분법으로 사람들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극소수의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세상엔 무조건적인 악인도, 선인도 없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그 관점이 적잖이 불편했다. 또한 나를 불편하게 한다고 해서 상대를 악인으로 몬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가. 수긍할 수 없었다.

이런 반응을 훤히 예상하는 저자는 거듭 말한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세상엔 악인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자신이 심리 조종자를 연구하며 이따금 경멸 어린 시선까지 받아야 했지만, 그들이 존재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라고. 그러니 그들을 알아보고 영향력을 없애야 세상의 평화와 화합을 실현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24년간 이 심리 조종의 메커니즘을 연구했다는 저자는 탄탄한 논리와 구체적인 사례들로 설명하는데, 나는 끝내 줄다리기의 끈을 완전히 놓지는 못했다. 다만, 가해자-피해자 구도가 아닌, 인간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이라는 관점으로 이해하자면 그의 말에 수긍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특히 거절이 반복적으로 부정당하는 고통, 수치와 죄의식의 자극은 내 지난 일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나는 여전히 내가 사랑한 친구를 악의 넘치는 심리 조종자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녀에겐 나와 다른 입장이 있었을 뿐. 그러나 우리 관계에 개선이 필요하단 것만큼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책 후반부, 이런 내게 딱 필요한 말이 나온다.
 
"그 사람이 심리 조종자이냐 아니냐는 알고 보면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다. 상대가 넘으면 안 되는 선은 여러분이 정하는 거니까. 여러분의 가치관을 수호하고, 여러분에 대한 존중을 확보하라. 그게 어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 p287

저자는 심리 조종자들을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영향력을 차단하고, 피해자가 그들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표라고 밝힌다. 심리 조종자는 명철하고 단호하고 짜임새 있는 사람에게는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다. 

책은 정신적 과잉 활동인과 심리 조종자의 역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인간관계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모두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어떤 형태의 어려움에 봉착했든, 냉정하게 사안을 돌아볼 수 있게 돕는다. 무엇보다 저자가 말하는 '불가침의 권리'는 되새길 만한 가치가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나는 내 감정과 욕망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
 나는 나의 우선순위를 챙길 권리가 있다.
 나는 죄책감 없이 거절할 권리가 있다.
 나는 내가 대가를 지불한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
 나는 내 관점이 타인의 관점과 다를지라도 당당히 피력할 권리가 있다.
 나는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위협에서 나 자신을 보호할 권리가 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행복에 걸맞게 삶을 꾸릴 권리가 있다." (pp290-291)

당신은 사람 보는 눈이 필요하군요 - 나쁜 관계에서 나를 지키는 방탄 심리학

크리스텔 프티콜랭 지음, 이세진 옮김,
부키, 2018


#당신은 사람 보는 눈이 필요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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