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앞 삭발 8개월,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다시, 청소년 참정권 ②] 졸업하면 끝나니까 참아라? 나는 거부한다

등록 2018.11.19 16:01수정 2018.11.19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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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연령 18세 하향'이 다시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오마이뉴스>와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는 3회에 걸쳐 청소년 참정권 도입에 대한 글을 싣습니다. 이 기사는 그 두번째입니다. [편집자말]

'선거권은 인권이다' 삭발시위에 참여한 한 청소년의 모습. ⓒ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올해 봄(3월), 지금같이 쌀쌀한 바람이 불던 날 나는 덥수룩한 머리칼을 밀어버렸다. 국회 앞에서 선거연령 하향을 외쳤고, 내 머리카락은 시원하게 잘려나갔다. 가끔씩 사람들이 내게 "삭발은 쉬운 결정이 아닌데 어떻게 그런 결정을 했어요?"라고 묻곤 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청소년으로서 내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이유였기에 대답하자면 한참을 설명해도 모자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청소년들과 함께 삭발시위를 하고 국회 앞에서 거리농성을 하던 그때를 기억해보면, 난 꽤나 들떠 있었던 것 같다. 정말로 이번에 선거연령 하향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큰 꿈을 안고 한껏 신나 있었다. 그러나 국회는 굳게 문을 닫았고, 2018년 6.13지방선거는 끝내 '어른들만의 선거'로 치러졌다.

'어린 애'가 아닌 동등한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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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에서 열린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의 선거연령 하향 촉구 농성 돌입 기자회견에 우원식 당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김동철 당시 바른미래당 원내대표가 참석하고 있다. ⓒ 남소연

 
사실 선거연령 하향이 된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이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다. 갑자기 내가 초능력을 쓴다거나 갑자기 내가 다니는 학교가 내가 원하는 학교로 뿅 하고 변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선거연령 하향이 그토록 절실한 이유가 뭘까? 답은 간단하다. 나는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 청소년인 자식과 함께 사는 부모들이 청소년의 존재를 동등한 시민으로서 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참정권 부여는 이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동등한 주권자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상징적이고도 실질적인 조치다.

학교를 다니며 수많은 모욕과 인권침해를 경험하고 있다. 학생의 동의 없이 소지품을 압수한 일도 있었고, 학생들이 회의를 통해 결정한 사안에 대해 교사들이 화를 내며 결정을 뒤엎기도 했다. 한낱 학생인 나는 그 상황들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너무나 큰 무기력감을 느꼈다. 학생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이 무기력감, 대부분의 학생들은 '졸업만 하면 끝나니까 조금만 참자'면서 참을 인 자를 새긴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부당한 일들을 '곧 지나갈 테니 참자'는 생각으로 꾸역꾸역 버텨내고 싶지 않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어른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서 내 의견을 두려움 없이 말하고 싶다. 나의 의견이 '어린애의 칭얼거림'으로 치부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학교의 구성원이자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존중받고 싶다. 

정치인이 청소년 시민을 무서워하길 바란다


내가 살고 있는 경남에서는 지금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기 위한 운동이 전개 중이다. 사실 경남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12년 도민 4만 명의 주민발의로 경남 학생인권조례안이 도의회에 상정됐지만, 도의원들은 조례안을 부결시켰다.

청소년을 위한 제도가 부결되고 무산돼온 역사는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현행법 중 청소년 관련 법들은 청소년의 인권을 보장하기보다 권리를 제한하고 통제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정치인들 입장에서는 투표권도 없는 청소년의 처지를 생각해줄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참정권이 없으니 청소년의 목소리는 쉽게 무시되고 마는 것이다.

개별 학교 안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학생이 가장 큰 영향을 받는 학교규칙을 만들거나 고치는 것은 대부분 교사들의 몫이다.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 학생들이 두발규제에 문제제기를 하고 겉옷 착용을 허용해 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각 교실마다 열리는 학급회의는 형식적 절차에 불과했다. 학생회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왜 학생들은 이렇게 힘이 없는 존재인지 분노스러웠다. 학생들의 목소리가 힘이 없는 이유는, 학생의 의견이 실질적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의견을 수렴한다며 학생들의 의사를 물어봤지만, 사실상 학생들에게는 결정 권한이 없었다.

선거를 통해 결정에 참여할 권한이 청소년에게 없으니, 아무도 청소년의 의견에 신경 쓰지 않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나는 정치인들이 청소년 시민들을 두려워했으면 좋겠다. 학교가 학생들의 의견을 따르지 않는 것에 부담을 느꼈으면 좋겠다. 

'학생'인권조례 만든다면서 어른 설득에 급급
 

'청소년 참정권' 미래를 선택할 권리 피켓 ⓒ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현재의 경남 학생인권조례 제정 운동에서도 교육청과 도의회는 흔히 '반대세력'이라 불리는 어른들의 눈치를 본다. 교육청에서 제작하는 학생인권조례 제정 운동을 위한 홍보 전단을 본 적이 있는데, 누가 봐도 그 전단은 학생들이 아닌 어른들을 설득하기 위한 홍보물이었다. '학생'인권조례이면서도 학생이 아닌 사람들의 눈치만 보는 꼴이었다.

현재 경남 안의 대다수의 학생들은 학생인권조례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친구들에게 "학생인권조례가 뭔지 알아?" 하고 물으면 돌아오는 답은 딱 하나다. "그게 뭔데?" 청소년들의 의사보다 표를 가진 어른들의 의사가 더 무서우니 학생들에게 조례안에 관해 알리기보다 어른들을 설득하기에 급급한 것이다. 

청소년은 아직 성숙하지 못하다면서 선거연령 하향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분들께 역으로 묻고 싶다. 아무것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도록 권리를 빼앗고, 목소리를 내면 탄압과 무시로 일관하면서, 청소년이 '민주시민'으로 성장하길 바라는가? 청소년들에게도 판단할 기회를 주고, 의사를 밝힐 기회를 주고, 성숙해질 기회를 달라.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르지만 동등한 인간이다. 내 목소리가 정치에도 닿을 수 있게 해달라.

[관련 기사 : 다시, 청소년 참정권 ①] '사람대접' 못 받는 대한민국 18세
#청소년 #참정권 #선거연령 #18세 #투표권
댓글5

촛불광장의 동료였던 청소년들에게 민주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하자는 취지로 모인연대체입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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