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살자 다짐한 듯한 일본인, '일탈'의 순간

[도쿄 옥탑방 일기 5화] 동네 마츠리

등록 2018.11.18 12:09수정 2018.11.18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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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마츠리 일본의 마츠리 장면. 어깨꾼들이 미코시를 메고 골목골목을 하루종일 누비고 다닌다 ⓒ 연합뉴스

너무나도 조용한 동네, 적막을 깨는 마츠리 행렬


평일이든 휴일이든 옥탑방에 혼자 있다 보면 조용하다 못해 고요하다. 바로 앞에 절이 있어서 더 그런지 모르지만 적막강산이 따로 없다. 창 밖으로 보이는 아파트에는 가끔 빨래 너는 아줌마나 담배 피우러 나온 아저씨가 보이지만 나랑 눈이라도 마주치면 잽싸게 방으로 들어가기 바쁘다.

유일한 소음은 반 블록쯤 떨어져 있는 큰 길에서 수도고속도로를 향해 달리는 대형트럭들의 질주음 정도. 어쩌다 지나가는 중고품 수집 차량에서 "못 쓰는 전자제품 사요. 냉장고, 세탁기, 컴퓨터 뭐든지 다 받아요" 같은 광고방송이 정적을 깨기도 한다. 일본 여성 특유의 간드러진 녹음 목소리에 귀가 자동으로 솔깃해진다. 하지만 그마저도 들리나 싶으면 히어링 연습할 시간도 안 주고 금방 사라진다. 동네 시끄럽게 한 적 없다는 듯 내빼버린다.

일본 국민 모두가 조용히 살자는 다짐이라도 했나. 그러고보니 거리에서도 지하철에서도 학교에서도 사람들이 큰 소리를 내는 꼴을 못 본 것 같다. 모든 게 조심 조심. 내 행동거지도 따라서 조심스러워진다.

고요한 와중에도 예외는 있다. 바로 동네 마츠리(祭り)날이다.

우리말로 하면 마을 축제날인데, '미코시'라고 불리는 가마를 메고 동네 거리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미코시 안에는 동네를 지켜주는 수호신이나 보살님이 모셔져 있는데 금빛, 은빛, 검은빛 등 온갖 채색으로 장식돼 제법 화려한 느낌을 준다.


인근 관광지 아사쿠사의 도쿄 최대 사찰 센소지에서 열리는 전국 3대 마츠리 '산쟈마츠리'에는 한꺼번에 수 백개의 미코시가 등장한다고 하지만 우리 동네는 미코시 하나 혹은 두 개가 전부인 소박한 마츠리다.

미니스커트가 연상될 정도로 짧은 반바지를 입은 수십 명의 남자들이 미코시를 어깨에 메고 "왓쇼~, 왓쇼~"하며 하루종일 온 동네를 누빈다. 땀을 뻘뻘 흘리는 걸 보니 상당히 무거운가 보다.

게다가 시작하기 전에 이미 술 한잔 씩을 했는지 어깨꾼들의 얼굴이 불콰하다. 앞뒤 사람들 간의 간격이 거의 없을 정도로 밀착된 사이사이에 여자들도 몇 명 끼어 야릇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미코시의 뒤를 피리 부는 사람들이 따라가며 흥을 북돋운다. 한 해 한두 번 마음껏 거리를 누비며 술 마시고 떠들 수 있는 일탈의 순간이라서 그럴까, 행렬에 참가한 사람들의 얼굴은 들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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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리가 열리고 있는 다이토구 이리야의 오노테라사키신사의 입구. ⓒ 김경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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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와이스 멤버들의 사진을 앞에 내놓고 장사하는 야타이. 안에 블랙핑크, 방탄소년단, 샤이니 등 한류 가수들의 사진과 CD가 가득하다. ⓒ 김경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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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어를 통째로 꼬치에 꿰어 굽는 은어꼬치구이. ⓒ 김경년

 
마츠리의 진짜 재미는 전통시장 열리는 신사에서

그러나 미코시 끌고다니기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혹은 참여할 수 없는 일반 주민들에게 정작 중요한 행사는 신사에서 구경할 수 있다. 재밌는 전통시장이 열리기 때문이다.

동네에서 제법 큰 신사인 오노테루사키(小野照崎) 신사 앞 거리는 차없는 거리가 되고, 한국식으로 말하면 포장마차에 해당하는 야타이(屋台)들이 일찍이 자리를 차지해 버린다. 야타이들은 신성한 신사 마당 안까지 진출해 금방 시골 장터가 돼 버린 느낌이다.

이들 중에는 역시 꼬치구이를 파는 곳이 가장 많다. 닭고기나 돼지고기로 만든 꼬치구이, 은어를 거꾸로 꿰어 굽는 꼬치구이, 쌀가루나 밀가루로 만든 당고 꼬치구이. 아이스크림과 초콜릿을 입혀 알록달록하게 만든 바나나 꼬치도 있다.

한국에서도 유원지라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상품을 장난감 총으로 맞혀 떨어뜨리는 게임도 있다. 조금이라도 앞에서 쏘려고 팔을 최대한 앞으로 내미는 건 한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이나 똑같다.

연예인의 브로마이드 사진이나 노래 CD를 파는 야타이도 있다. 일본에서의 인기를 반영하듯 트와이스 멤버들의 사진이 제일 크게 걸려 있어 반갑다.

그러나 그중 사람들에게, 특히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것은 금붕어 잡기 게임이다.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도쿄의 웬만한 마츠리에서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놀이다. 300엔에 10마리, 500엔에 20마리 식으로 주인에게 내는 돈에 따라 잡을 수 있는 금붕어가 제한돼 있지만 정해진 수만큼 잡아가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주어지는 뜰채가 기름종이로 되어 있어 급하게 많이 잡으려고 마구 휘두르다가는 종이가 금방 녹아버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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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붕어잡기 삼매경에 빠진 아이들. ⓒ 김경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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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붕어잡기 가게의 한편에 자리를 잡은 자라잡기 가게. 실제 자라를 잡는 사람은 한 명도 못봤다. ⓒ 김경년

 
자라 잡기 게임 아줌마, 화가 난 이유는...

이 날은 금붕어 대신 조그만 자라를 풀어놓은 야타이가 나왔는데, 주인 아줌마가 자라를 한 마리씩 너무나도 쉽게 잡아올리며 손님을 끌었다.

아이들이 엄마를 졸라 뜰채를 들고 달라붙지만 지켜보는 30분 동안 자라를 잡아가는 이는 한 명도 못 봤다. 마치 인형을 잡았다 싶으면 속절없이 풀어져 버리는 인형뽑기의 집게처럼 자라를 올려놓기만 하면 뜰채가 힘없이 벌러덩 밑으로 젖혀지기 때문이다.

어디나 이럴 땐 꼭 장사를 방해하는 사람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자기는 하지 않으면서 한참을 지켜보던 30대 남자 한 명이 "이거 아무래도 사기 같은데..."라고 중얼중얼한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무슨 소리. 저렇게 너무 서두르니까 못 잡는 거야. 나처럼 살살 하면 쉽게 잡을 수 있다고"라면서 다시 한번 시범을 보인다.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헛손질만 계속 한다. 남자가 다시 "아줌마, 이거 사기지?"라고 말하자 아줌마는 드디어 열이 받았는지 "아니 이 사람이... 찬찬히 하면 된다니까. 당신 할테면 하고 말라면 꺼져 버려!" 일본 와서 이렇게 크게 소리치는 사람은 처음 봤다.

머쓱해진 남자는 "그래도 사기 같은데..."하며 본전도 못 건지고 슬금슬금 일어나 가버린다. 어디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 그리고 아이들은 다시 달려들고 아줌마는 계속 돈을 번다.

30년도 넘은 어린 시절 내가 살던 경상도 어느 시골 장터에서나 볼 수 있었던 장면을 세계 최첨단 도시 도쿄의 뒷골목에서 다시 보게 되다니. 세상은 참 재미있다.
덧붙이는 글 필자는 한국언론진흥재단 후원으로 도쿄 게이오대학에서 1년간 방문연구원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옥탑방일기 #마츠리 #금붕어잡기 #자라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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