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 한복판에 등장한 개 한 마리의 효과

인간과 동물의 함께 살기, 캐나다의 '테라피 독'

등록 2018.11.19 13:50수정 2018.11.19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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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캐나다 밴쿠버에서 몬트리올로 여행을 떠났을 때의 일이다. 밴쿠버에서 몬트리올까지 4시간 반 동안 비좁은 비행기 좌석에 묶여있다 일어나니 다리도 저려오고 허리도 아팠다. 여행의 시작부터 피로감이 몰려왔다. 게다가 입국장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를 타는 곳까지는 왜 그렇게 먼지 트렁크를 끌면서 배낭까지 맨 나는 스멀스멀 짜증이 올라왔다.


함께 간 남편과 아들도 비행기에 타기 전 얼굴 가득 피어났던 설렘은 사라진 듯했다. 다들 아무 말 없이 인상을 쓴 채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짜증 섞인 침묵은 긴장감마저 돌게 했다. 그때였다. 막 도착한 사람들과 탑승대기를 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곳(몬트리올 공항은 국내선 입국장과 출국장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에 개 한 마리가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있었다.

개를 본 아들 녀석이 침묵을 깼다.

"엄마, 강아지다!"

아들의 굳은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아들은 강아지에게 다가갔다. 옆에 강아지와 함께 있던 사람에게 아들이 물었다.

"Can I pet your dog?(개를 쓰다듬어도 되나요?)"


강아지의 주인으로 보이는 분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지! 이 개는 여기서 사람들이랑 놀아주러 온 거란다. 이름은 마키야."

아들이 손을 내밀자 마키는 꼬리를 더 힘차게 저으며 기꺼이 자신의 머리와 등을 아들에게 내밀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짜증 가득하던 아들의 얼굴엔 금세 미소가 번졌다.

나 역시 순수하게 반기는 마키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마키와 눈을 맞추고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으니 짜증과 피로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키와 헤어진 뒤 우리 가족은 훨씬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숙소로 향했다.
 

몬트리올 공항에서 만난 '마키' ⓒ 송주연

  
사람들에게 정서적 위안을 주는 테라피 독

거짓말처럼 우리 가족의 짜증을 누그러뜨린 마키는 공항에서 봉사 활동을 하는 중이었다. 오랜 기다림과 비행으로 지친 승객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일종의 '테라피 독'이다.

테라피 독은 만성질환이나 정서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감소시켜주고 긍정적인 정서유발을 돕는 역할을 한다. 특정한 한 사람이 아닌 불특정 다수에게 즐거운 시간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맞추어 훈련받고 일상생활을 돕는 '서비스독(장애보조견)'과는 구분된다.

때문에 테라피 독은 기질상 사람을 잘 따르고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 적으며 밝고 유순한 성격의 개들이 주로 선발된다. 캐나다에서는 전문기관에서 시기별로 테라피 독 봉사를 원하는 주인과 개를 모집하고 몇 가지 테스트를 통해 선발한다.

테라피 독은 주인과 함께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갈 때가 많기 때문에 주인과 개의 호흡 역시 중요한 편이다. 때문에 테라피 독을 선발하는 기관들에서는 개뿐만 아니라 주인이 봉사에 적합한지도 함께 고려한다.

테라피 독은 사람들의 스트레스와 불안을 감소시켜줄 뿐 아니라 오랫동안 병상에 있거나 고립된 채 생활하는 사람들의 외로움도 줄여준다. 또한 과잉활동성과 공격성을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공격적인 성향을 감소시켜주는 역할도 한다. 우울한 사람들의 기분을 밝게 해주는 것은 물론이다.

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테라피 독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사람을 잘 따르는 기질상 사람들의 손길을 느끼고 함께 놀면서 스스로도 즐거움을 느낀다고 한다. 사람과 개가 함께 윈윈하는 셈인 것이다. 한국에서는 '동물매개치료'의 일환으로 테라피 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당당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반려동물

이곳 캐나다에서 테라피 독은 만성질환이나 정서적 어려움이 있는 사람을 돕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공항에서 지루하고 피곤하게 비행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마키처럼 시민들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함께 한다.

마키를 만난 몬트리올 공항 외에도 밴쿠버 국제공항 등 캐나다 내의 주요 공항에서는 매일 일정한 시간 동안 테라피 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어린이 병원에 방문해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테라피 독도 있다.

밴쿠버의 BC어린이 병원에서는 병원을 방문한 아이들이 편안하게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Dog Visitation'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병원에 온 아이들의 불안하고 긴장된 마음, 입원한 아이들의 무료한 일상을 테라피 독이 달래주는 것이다.
 

학생들의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UBC의 'Project Paw' ⓒ 송주연

  
밴쿠버 소재의 대학인 UBC(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에서는 테라피 독이 학교를 방문한다. 시험 기간 동안 예약을 받아 테라피 독과 시간을 보내도록 하는 'Project Paws' 프로그램은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의 긴장과 스트레스를 줄여주기 위해 마련됐다.

선착순 신청을 받아 지원하는데 학생들에게 매우 인기가 많다. 실제로 이 서비스를 경험한 심리학과 학생 마이카는 "시험시간 전 10분 정도 강아지들과 함께 있다 시험에 임했는데 긴장도 풀리고 마음이 차분해져서 시험에 더 잘 집중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사람과 동물이 공유하는 공간

캐나다에서 1년 넘게 지내면서 반려동물과 삶을 자연스레 나누고 공유하는 이런 모습들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참 따스해짐을 느끼곤 했다. 돌아보면, 캐나다에서 동물과의 상생은 테라피 독에 국한되는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밴쿠버 시내에서 길을 다니다 보면 상점이나 주택가의 문 앞에 물그릇이 놓여 있는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반려견을 비롯 그 지역에 살고 있는 동물들이 지나가다 물을 먹을 수 있도록 일부러 내어둔 것이다.

반려동물 출입이 가능한 주요 관광지들에서도 반려동물용 음수대를 설치해 둔 곳이 많다. 은행이나 관공서는 물론 식료품을 판매하지 않는 상당수의 상점은 반려견과 함께 출입이 가능하다. 반려견용 간식까지 제공하며 환영해주는 상점들도 많다.

집을 빌릴 때 이용하는 부동산 관련 사이트에는 반려동물의 거주 가능여부가 명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가 불편하지 않게 지낼 수 있다. 반려동물의 출입이 제한되는 곳도 있는데 그런 곳에는 반드시 '반려동물 출입 금지' 표시를 해두어 얼굴 붉히는 일을 방지하고 있다.

반려동물과 함께 지내는 사람들이 이런 규칙들을 철저히 지키는 것은 물론이다. 이런 사회적 합의들은 일상 속에서 반려동물의 존재를 늘 인식하고 있으며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사실, 캐나다에서는 반려동물 뿐 아니라 야생동물도 공간을 함께 공유해야 할 존재로 바라보는 시각이 강하다. 산악 지역이나 해변가를 여행할 때 자주 보는 안내문구 중 하나가 "야생동물과 이 풍경을 공유하세요"다. 아름다운 풍광이 오직 인간의 것만이 아니라 이 땅에 함께 살고 있는 동물들도 함께 누려야 할 것이라는 뜻이다.

때문에 캐나다에서는 도시의 공원에 코요테가 살고, 밴쿠버 시내로 이어지는 바닷가에 물개가 놀러오고, 주택가에는 다람쥐와 스컹크가, 뒷산에는 야생곰이 산다. 사람들은 이런 동물들을 만나도 쫓거나 당황하지 않고 대처하는 법을 배우며 반려동물 역시 야생동물을 함부로 쫓지 않도록 교육시킨다. 사람, 반려동물, 야생동물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다.
 

캐나다 밴쿠버 인근의 유명 관광지인 카필라노 서스펜션 브릿지에 설치된 반려견용 음수대 ⓒ 송주연

  
마키를 만나 서로의 짜증을 폭발시킬 위기를 모면한 우리 가족은 몬트리올과 퀘벡지역의 가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캐나다의 동쪽 끝인 퀘백 주 역시, 우리 가족이 거주 중인 서쪽 끝의 도시 밴쿠버와 마찬가지로 관광지 곳곳에 반려견들을 위한 물과 배변봉투 등을 설치해두고 있고 반려견과 함께 찾은 관광객들도 많았다. 

반려동물과 함께 여행을 즐기는 이들을 바라보며 '상생'을 생각했다. 동시에 밴쿠버의 펫시터에게 맡겨두고온 우리집 반려견 은이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던 여행이었다. 그렇게 5일을 보내고 다시 5시간을 날아 밴쿠버에 돌아오자마자, 우리 가족은 은이를 데리러 갔다. 꼬리를 치며 달려와 온몸으로 반가움을 표현하는 은이를 품에 안자 여행의 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듯 했다.

그러고 보니 세상의 모든 개들은, 아니 모든 반려동물은 조건 없는 사랑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 같다. 테라피 독 훈련을 받지는 않았지만, 우리 가족에겐 은이가 최고의 테라피 독이듯 말이다.

세상의 모든 반려동물에게 감사를 전한다. 그리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우리와 생김새가 다른 생명체들도 함께 살아가고 있는 곳임을 잊지 않기로 다짐해 본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에도 실을 예정입니다.
#테라피 독 #캐나다 #밴쿠버 #동물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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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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