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쯤 '인생은 한 방'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학종'과 '수능' 사이에서 흔들려도... 실수도, 찍는 것도 '공정'은 아니다

등록 2018.11.19 10:24수정 2018.11.19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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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지는 15일 오전 서울 중구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에서 수험생들이 긴장된 모습으로 고사장에 시험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 이희훈

 
숙명여고 쌍둥이 자녀 성적조작 의혹이 일파만파 확산하면서 최근 학부모나 이웃으로부터 가장 흔히 듣게 되는 말이 "이게 어디 그 학교만의 문제겠어요?"라면, 고등학생 아이들끼리 키득거리며 나누는 가장 흔한 '드립'은 이것이다.

"인생은 한 방, 남자라면 '정시'지!"

지금껏 학교생활기록부 종합전형(학종)의 취지에 공감하던 아이들조차 이젠 수능으로 거의 돌아선 모양새다. 대개 아이들이 학종을 꺼린 건, 공정하지 않다는 저간의 주장에 동의해서라기보다 동시에 수능도 함께 준비해야 하는 부담이 크다는 이유에서다. 학종에 매달리자니 수능 최저 등급이 부담이고, 수능에 올인하자니 정시로 뽑는 정원 자체가 줄어 두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 이후 아이들로부터 '학종은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 옷'이라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듣는다. 여전히 도입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기본적인 전형 자료인 생활기록부가 불신에 휩싸인 마당에 제도적인 정착은 이미 물 건너갔다는 반응이다. 인터넷은 이미 수능을 넘어 학력고사 시절이 좋았다는 '향수'로 도배되다시피 하고 있다.

생활기록부에 대한 불신은 학종 폐지와 정시 확대 요구를 넘어, 교사와 학교 교육에 대한 신뢰를 순식간에 허물고 있다. 계량화된 내신 성적마저 믿지 못하는 현실에서 '엿장수 맘대로'인 비교과 영역의 내용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내신 등급에 따라 생활기록부의 분량이 많게는 수십 장이나 차이가 나는 현실을 용납할 수 없다는 거다.

'한 마리 토끼는 학교가 잡을 테니, 너는 다른 토끼 한 마리에만 신경 쓰면 된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교사가 있다는 아이들의 증언도 잇따른다. 학교가 잡겠다는 '토끼'는 곧 생활기록부에 기재될 내용을 뜻하고, '다른 토끼'는 곧 수능을 의미한다. 최상위권 아이들이 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도록 챙기는 학교가 적지 않다는 이야기다.

비교과 영역은 허울 좋은 껍데기일 뿐이다. 시간 채우기식으로 형식화한 봉사 활동은 봉사라는 순수한 의미조차 더럽혀버렸다. 대부분의 아이에겐 그저 쉬는 시간으로, 상위권 아이들에겐 나름의 스펙 쌓기 시간으로 활용되는 동아리 활동은 또 어떤가. 학종을 대비해 '한해살이'마냥 명멸하는, 이른바 자율 동아리의 수는 학교마다 이미 차고도 넘친다.


자율 활동은 담임교사의 자질과 역량에 따라 기록 자체가 학급별로 널을 뛰고, 부모님과 지역사회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진로 활동 기록은 학교별로 하늘과 땅 차이다. 교내 수상실적은 명문대 진학을 꿈꾸는 최상위권 아이들의 독무대가 된 지 이미 오래라 새삼스럽지도 않다. 독서 이력조차 '치맛바람'을 일으키고 있다는 소문도 자자하다.

어떤 제도든 목표는 결국 '입시'

생활기록부에 대한 불신은 자기소개서가 '자소설'이 될 때부터 이미 예견됐던 바다. 작성 주체만 다를 뿐, 오로지 대학입시를 위한 도구로만 기능한다는 점에선 똑같다. 수시모집을 앞두고 자기소개서와 생활기록부를 쓰는 시기를 일컬어 아이들은 '신춘문예의 계절'이 돌아왔다며 대놓고 조롱한다. 자기소개서는 단편소설 부문이고, 생활기록부는 콩트 부문이라며 킥킥댄다.

학년이 마무리되는 12월이 되면 컴퓨터 자판 앞에서 괴로워하는 교사들을 찾아와 '위로'를 건네는 아이들이 더러 있다. 소설 쓰느라 얼마나 힘드시냐면서 혼자 고민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 너무 고통스러워하지 말라고 농을 건다. 이쯤 되면, 온존한 학벌 구조가 해체되지 않고는 백약이 무효라는 걸 아이들도 일찌감치 깨닫고 있는 거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더니, 대한민국의 교육은 그 어떤 제도도 무력화시키는 블랙홀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흔들고 있는 게 '몸통'인 줄 알았더니, 나중에 알고 보면 늘 '꼬리'였던 것 같아요. 교실 수업을 바꿔낼 것으로 확신했던 학종도, 교실을 황폐화한 주범으로 지목했던 수능도, 어쩌면 둘 다 '꼬리'에 불과한 것 아닐까 싶어요."

몇 해 전 입학사정관제 도입 후 수업을 바꿔보자며 고민을 나눴던 한 동료교사의 체념이 폐부를 찌른다. 아무리 좋은 제도도 우리의 척박한 교육 현실 앞에서는 부작용만 일으킨다는 의미다. 매사 낙관적이었던 그 역시 학벌 구조의 타파 없이는 그 어떤 입시제도도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며, 꿈쩍하지 않는 현실 앞에 '백기 투항'을 했다.

수능의 폐해를 수십 년간 겪어온 교사들조차 '학종은 이상일 뿐, 현실적이지 못하다'거나 '시기상조'라는 말을 한다. 심지어 '구관이 명관'이라는 우스갯소리를 건네는 이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일부는 교육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오랜 관행과 인식의 수준이 학종의 취지를 못 따라가는 '문화 지체' 현상의 일종이라고 평하는 등 교사들도 둘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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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세우기를 멈추자” 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15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사거리 앞에서 ‘대학입시 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 소속 회원과 대학입시거부를 선언한 청년,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촛불청소년이권법제정연대 회원들이 입시경쟁과 학벌사회를 비판하며 행진을 벌이고 있다. ⓒ 유성호

 

흔들리는 그들의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까. 쉽진 않을 것 같다. 술자리든 어디든 그들과 만나 입시제도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 마지막은 예외 없이 '현실주의자'와 '이상주의자'의 평행선으로 갈무리된다. 서로 삿대질하며 얼굴을 붉히는 경우도 종종 있어, 그땐 애초 말을 꺼내지 말았어야 한다며 자책하곤 한다. 결국 '교육개혁은 백년하청'이라는 늘 똑같은 결론만 공유하는 셈이다.

"3년 내내 문제집만 풀게 하는 교실 수업을 정상화하자고 도입한 게 학종인데, 부작용이 많다고 해서 다시 수능과 학력고사로 돌아가자는 게 가당키나 한가요? 미래를 이끌어갈 아이들의 다양한 재능과 역량을 길러내기는커녕 오로지 서열을 매기기 위한 변별력만 강조하는 선다형 수능은 교육의 본령과 동떨어진 제도입니다."

"그 말씀에 100% 동의해요. 하지만 수많은 교육적 가치 중에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요구되는 게 바로 '공정성'입니다. 우리는 단 한 번도 '공정한' 사회였던 적이 없습니다. 능력보다 학벌과 인맥이 여전히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기득권 세력의 승자독식 사회입니다. 수능이 완벽한 제도라서가 아니라 학벌 구조가 해체되기 전까지는 불가피한 임시방편이자 차선책입니다."


수능으로 돌아가자는 이들도 수능이 아이들의 창의성 등 미래 역량을 길러내지 못한다는 점은 대체로 인정한다. 몇몇은 시대정신과 부합하지 않는 낡은 입시제도라며 선선히 고백하기도 한다. 다만 20여 년 전 IMF 외환위기 이후 가혹한 무한경쟁을 당연한 듯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요즘 아이들에게 교육의 본령이나 미래 역량 운운하는 건 사치에 가깝다고 일갈한다.

결국 학종과 수능 사이 전형 비율의 문제도 아니고, 양자택일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둘 사이에서 방황하는 교사들의 생각을 종합해보건대, 생활기록부의 불신으로 학종이 좌초 위기를 맞고 있지만, 언젠가는 가야 할 방향이다. 당장 아이들이 수능식의 공정성을 지고지선으로 삼는다고 해서, 다른 교육적 가치를 나 몰라라 할 순 없다는 데에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나무 아닌 숲, 꼬리 아닌 몸통을 봐야하는데...

그러자면, 입시제도라는 '나무'에 애면글면하기보다 사회라는 '숲'을 우선 살필 수 있어야 한다. 학종이 공정하지 않다고 발끈하기 전에, 그 분노를 '단 한 번도 공정했던 적 없다'는 우리 사회에 표출하는 게 순서라는 이야기다. 지금 우리가 각자도생의 무한경쟁 사회이니 학교도 어쩔 수 없다는 체념과 무력감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동료교사의 말을 빌자면, 입시제도는 '꼬리'고 사회는 '몸통'이다. 입시제도로 사회를 바꿀 순 없지만, 사회가 바뀌면 입시제도는 그 변화에 발을 맞추게 될 것이다. 대학입시 하나로 인생이 좌우된다고 철석같이 믿는 아이들에게 '인생은 한 방'이 아니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 말에 책임을 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는 정글 같은 무한경쟁 사회를 물려준 기성세대의 당연한 도리다.

사족 하나. 엊그제 수능을 치른 한 아이의 표정이 어둡다. 지금껏 본 모의고사에선 영어가 줄곧 1등급이었는데, 정작 중요한 수능에선 2등급으로 떨어졌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본인도, 진학 담당 교사도 이것이 당락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 우려하고 있다. 흔히 실수도, 찍는 것도 모두 실력이라지만, 그게 공정하다고 생각하니 씁쓸하기 그지없다.

또 하나. 수능 감독을 하다 보면 각양각색의 수험생을 만나게 된다. 대부분은 고3 재학생들이지만, 재수생이나 삼수생들도 군데군데 섞여 있고, 드물게는 웬만한 감독관보다 나이가 많은 '늙은' 수험생도 있다. 이번에도 2000년생 밀레니엄 세대 사이에서 화장기 없는 얼굴로 머리카락을 질끈 동여맨 1982년생 수험생을 만났다. 우리 나이로 치면 서른일곱이다.

딸뻘인 아이들과 함께 연신 손바닥의 땀을 닦아가며 시험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아마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0년 가까이 지났을 그에겐 수능 외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가 치른 수능이야말로 '대학에서 수학할 수 있는 능력'을 검증하는 의미일 테니, 수능 본연의 역할을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어쩌면 수능은 이럴 때라야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학생부종합전형 #수능 #숙명여고 #대학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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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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