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19 17:22최종 업데이트 18.11.19 17:26
 

전봉준 장군 동상[사단법인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 제공] ⓒ 연합뉴스

 
박재혁 의사는 거듭되는 고문과 의거 때의 상처로 심하게 앓으면서도 국가를 위해 신명을 바친 충렬지사들의 최후를 생각하였다. 

1894년 동학도들을 이끌고 반봉건ㆍ척왜척양의 혁명에 나섰다가 배신자의 밀고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된 녹두장군 전봉준도 생각했을 것이다.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지만 박재혁 의사의 경우, 전봉준의 모습을 닮은 대목이 더러 있다. 박재혁이 투탄 의거 과정에서 다리를 상하였듯이 전봉준도 피체 과정에서 다리를 크게 다쳤다. 일본 군의가 치료를 했다고 하지만 형식적일 뿐이었다.

박재혁 의사가 최후를 앞두고 전봉준 장군의 의연한 모습을 떠올렸을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대장부는 서로 닮고 뜻이 통하기 때문이다. 

전봉준은 상한 다리를 일본군 군의에게서 치료받았다. 
이때 일본 유력인사가 전봉준에게 은밀히 손을 내밀었다. 일본인 변호사를 대어 생명을 구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그대의 죄상은 일본 법률로 보면 중대한 국사범이기는 하나 사형까지는 이르게 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일본인 변호사에게 위탁하여 재판하여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 일본 정부의 양해를 얻어 활로를 구함이 어떠냐?" 
 

한성으로 압송되는 농민군 지도자 전봉준. 사진 출처 : <한국백년>. 한성으로 압송되는 농민군 지도자 전봉준. 사진 출처 : <한국백년>. ⓒ <한국백년>

 

이에 대해 전봉준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척왜척양의 깃발을 들고 거사한 내가 너희에게 활로를 구함은 내 본의가 아니다."

이런 말을 들은 일본인 유력자는 움찔했다. 

"조선에 이런 인물이 있었던가," 

한편으로는 놀랍고 두려웠을 것이다. 

전봉준은 붙잡혀서 재판을 받을 때나 사형이 선고되었을 때나 일관되게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취재하던 일본 기자들도 모두 놀랐다고 전한다.

일본은 전봉준을 이용하기 위해 온갖 간교한 음모를 꾸몄다. 살려서 이용하고자 하는 속셈이었다. 일본 극우계열인 천우협 인사들이 본격적으로 전봉준을 이용하려는 공작을 꾸몄다. 전날에 전봉준을 만난 적이 있는 다나카 지로가 일본 영사관의 동의 아래 죄인으로 가장하고 감옥으로 들어가 전봉준과 접촉하였다.

다나카는 전봉준에게 천우협의 역할을 설명하고 청일전쟁을 비롯하여 조선의 정세 등을 자세히 설명한 다음 일본으로 탈출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때 전봉준이 살 길을 찾아 다나카의 설득에 동의하였다면 생명을 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서울은 이미 일본군이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어서 얼마든지 일본으로 탈출이 가능했던 정황이었다.

"내 형편이 여기에 이른 것은 필경 천명이니 굳이 천명을 거슬러 일본으로 탈출하려는 뜻은 추호도 갖고 있지 않다." 
 

황토현 전적기념관 전봉준 장군 동상. 황토현 전적기념관 전봉준 장군 동상. ⓒ 최장문

 

 전봉준은 단호하고 결연했다.

사마천이 "죽음이냐 남근을 제거하는 궁형이냐"를 선택받고 자신이 처한 심경을 <사기>에서 표현한 글이 있다.

  죽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죽음에 처하는 것이 어렵다.


죽음에 처하며 살아가는 편이 죽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결국 사마천은 치욕을 견디며 살아남아서 불후의 업적 <사기>를 썼다.

그러나 전봉준은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이 타도하고자 했던 '반봉건'과 '반외세', 그 중에서도 더욱 척결의 대상이었던 외세, 그 일본의 힘을 빌어 구차하게 목숨을 연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혁명가답게 전봉준의 의지는 단호하고 결기는 확고했다. 비굴한 자세로 구차하게 생명을 구하지 않았다. 전봉준은 한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결연하게 죽음의 길을 선택하였다.

1895년 3월 29일(음력) 마침내 일제가 장악한 조선의 법부에서 사형판결이 내려졌다. 그의 죄목은 조선말기에 만든 <대전회통(大典會通)>의 "군복차림을 하고 말을 타고 관아에 대항하여 변란을 만든 자는 때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처형한다"는 조문이다.

사형판결과 함께 이날 바로 형이 집행되었다. 
'때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처형한다'는 조문도 조문이지만, 언제 잔류 동학군이 서울로 쳐들어와 전봉준을 구출할지 모른다는 초조감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1895년 3월 29일, 이날 전봉준과 같이 사형선고를 받은 손화중ㆍ김덕명ㆍ최경선ㆍ성두한 등 5명도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형판결의 주문을 듣고 전봉준은 벌떡 일어나 결연히 소리쳤다. 
"올바른 도를 위해 죽는 것은 조금도 원통하지 않으나 오직 역적의 누명을 쓰고 죽는 것이 원통하다"고 대갈일성하여 재판 관계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여기서 '올바른 도'란 동학을 말한다. 

전봉준은 그리고 죽기 직전에 마지막 소회를 묻자 즉흥시 <운명(殞命)>을 지어 읊었다.

  때가 오매 천지가 모두 힘을 합하더니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세운 것이 무슨 허물이랴
  나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박재혁 의사는 전봉준의 이와 같은 '당당한 최후'를 생각하면서, 결코 비굴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다지고 또 다졌다. 

일제가 '과오를 반성'하면 생명만은 살려주겠다는 회유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박 의사는 단호히 거부하였다. 그리고 당당하고 의연하게 순국의 운명을 맞았다. 27세의 짧은 생애이지만 천금과도 같은 값진 삶이었다.

박재혁은 입을 굳게 다물고 심문에 일체 응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치료가 된다 하더라도 일본경찰이 살려둘 리 없었다. 박재혁은 살아서 왜놈들에게 수모를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결심했다. 그날부터 단식을 시작한 그는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일본 경찰은 억지로라도 밥을 먹이려 여럿이 달려들어 강제로 입을 열어 밥을 처넣으려 했으나 박재혁의 굳게 다문 입을 도저히 열 수 없었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던 그는 꼬박 아흐레만에 마침내 장렬한 최후를 마친 것이다. 이 위대한 박재혁 열사의 죽음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주석 1)

주석
1> 송건호, <의열단>, 65쪽, 창작과 비평사, 1985.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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