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그런 거 없는데요"... 나의 간이경사로 투쟁기

장애를 연민하지 않고, '동료시민'이 되는 일에 대하여

등록 2018.11.24 12:04수정 2018.11.24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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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청 무등홀 계단 ⓒ 김미리내

 
"여보세요. (주절 주절 소개를 하고)네..혹시 간이경사로를 구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저흰 없는데.."


벌써 다섯 번째 같은 물음을 던졌고, 다섯 번째 같은 대답을 들었다.

구청을 포함한 관공서부터 나름 큰 규모를 자랑하는 장애인 복지관까지 전화를 했지만 다 허탕을 쳤다. 한숨을 내쉬는 사이, 장애인 인권운동을 하는 지인으로부터 구할 수 있을 거 같다며 담당자 이름과 연락처가 카카오톡 메시지로 전해졌다. '휴, 다행이다.' 숨통이 조금 트였다.

이런 난리가 난 건, 11월 마지막 주에 행사가 열릴 장소를 점검차 가본 후였다. 내가 속한 광주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는 성폭력 추방주간을 맞아 여성들의 몸과 관련한 연극 공연과 다양한 여성 당사자들의 몸의 경험을 나누는 토크콘서트를 기획했다. 그리고 고맙게도 여성장애인 인권운동을 하며 스스로 휠체어를 이용하는 활동가 A씨가 토크콘서트 게스트 섭외에 응해주셨다.

그 순간부터 섭외 장소를 바라보는 기준이 달라졌다. 오가는 동선에 장애물은 없는지, 문턱은 존재하는지, 경사로는 있는지가 최대 관심사였다. 그렇게 이곳저곳 장소를 물색하던 중!!

"맞다. 저번에 광주시청 무등홀에서 행사 했던 거 기억나요? 거기 휠체어 이용 장애인분들이 무대에 올랐던 거 같은데."

동료에게 물었더니 그녀도 그랬던 것 같단다. '옳거니! 그곳이면 주차까지 편하지 일석이조다.' 나는 시청 담당자에게 전화를 했고 광주시청 내에 있는 공간이 행사장으로 정해졌다.


그런데 행사 전 점검 차 들렸다가 무대로 진입하는 통로에 놓인 계단을 발견하고 만 것이다. 4단짜리 높디 높은 계단을.

하지만 우린 여유로웠다. 아니, 이곳은 인권도시를 표방하는 광주가 아니었던가. 민간 기업도 아니고 시민들의 공간이라는 시청인데 계단을 대비한 간이경사로쯤은 준비되어 있겠거니 확신했다. 물론 그 확신은 사무실로 돌아와 시설 담당자에게 전화를 하는 순간 와장창 깨지고 말았지만.

"선생님, 그 계단, 간이경사로는 어디 있나요? 안 보이던데?"

나는 너무 당연하게 물었다.

"저희는 그런 거 없는데요."

답변하는 담당자의 목소리 역시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의 태연함은 '왜 그런 걸 저에게 물어요'라고 되묻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내 인생의 가장 큰 숙제는 오직 간이경사로가 됐다. 간이경사로... 한 번도 내 인생에 고민꺼리가 되지 않았던 간이경사로... 너는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이냐...

인생의 숙제가 되어버린 경사로

간이경사로를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 전화를 돌리면서 '지금이라도 장소를 바꿔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꼭 질문이 뒤따라왔다.

'왜 우리가?' 

손에 장애가 있어 글씨를 쓰는 것이 더딘 사람이 죽을만큼 연습해 '인간 승리'를 해야 진정한 승리일까. 그가 장애가 없는 이들과 함께 시험을 봐야 한다면, 그에게 더 많은 시간을 보장하거나 보조 도구를 이용해 시험을 치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공정하지 않을까.

마음 한 켠에선 '그분, 체구도 작고 별로 무거워보이지 않던데... 그냥 양해를 구하고 우리가 들어서 계단을 내려오게 하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내 몸이 누군가에 의해 붕 떠올려진다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불쾌할 것만 같았다.

그런 상상을 하는 사이, 며칠 전 광주여성영화제의 다른 토크콘서트에서도 게스트로 나왔던 A씨의 말이 떠올랐다. 이때는 계단 문제로 토크콘서트 장소가 바뀌었다.

"저는 제 스스로가 장애란 정체성을 주체적으로 이야기하기도 전에 이미 타인들이 낙인처럼 '장애인 ○○○'으로 먼저 규정짓는 게 싫어요."

'장애인'으로 이미 규정되고, 그 틀에 갇혀 버리는 그 순간이 싫다던 그녀의 말에 '내'가 떠올렸다. 아메리카노보다 달달한 티백 커피를 좋아하는 나. 보라색만 보면 자리를 멈추고 바라볼 정도로 이 색을 좋아하는 나.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하면서도 화장하고 치마 입는 자신과 갈등하고 협상하는 나. 그렇게 다양한 '나'는 사라진 채 어느 순간 '여성'으로, 한낱 몸뚱이로 치환되고 말았던 순간들... 그때 느꼈던 모멸감과 수치심도 파르르 솟아났다. 

'그래, 그날만큼은 그녀가 편히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은 보장되어야 해.'

그렇게 결심하는 순간, 화가 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쩌자고 시민들이 오고 갈 공간에 계단을 설치해 놓고, 대체할 경사로 하나 마련하지 않았나' 하며 광주시청 담당자들을 향해 화가 났다. '아니, 그 시설을 이용하던 그 수많은 민간단체들은 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나'라며 다른 단체들에게 화가 났다. 결국에는 '몇 번이나 그곳에 갔던 나는 도대체 뭘 보았던 걸까. 왜 그 곳이 계단으로만 가득 채워진 걸 인식조차 못했던 건가' 하는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이 이어졌다.

우리는 불행을 봤을까, 불평등을 봤을까

22일 아침, 출근길 버스에서 발달장애인 동생을 둔 장혜영 감독이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 나온 영상을 보았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불행'이 아니라 '불평등'이다."

그녀는 우리가 장애인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을 보며 불행을 먼저 감각한다면 느끼는 것은 연민이 될 것이고, 불평등을 감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동료시민으로서 분노할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 했다.

그 영상 속 불행과 불평등과 관련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최근 며칠 동안 간이경사로를 구하기 위한 나의 고군분투(?)와 그 사이 사이 들었던 고민들이 떠올랐다. 지난 며칠 동안 나를 움직이게 한 것은 '불행'한 그녀를 '위해' 무언가 해보겠다는 오지랖과 연민이었던가. 아니면, '인권'도시 광주라는 이름 뒤에 자리한 무수한 불평등함에 '분노'였던 건가.

그 불행과 불평등 사이의 어느 중간에 애매하게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곤, 줄곧 '태도'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곤 최근에 읽은 김원영 작가의 책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의 한 에피소드를 떠올렸다. 뼈가 수시로 부러지는 질병을 갖고 살아가는 그는 줄곧 어린 시절 집에 머물러 있어야 했고, 친구들은 그가 머무는 집으로 와서 함께 놀곤 했다.

어느 여름 날, 수영을 하자며 밖으로 우르르 놀러가는 친구들을 보며 그는 혼자 남게 될까 두려움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혼자 나가지 않은 채 그의 '곁'에 머무는 한 친구에게 그는 묻는다.

"왜 너는 안 나가?" 그러자 친구는 답한다.
"응, 이 땡볕에 나가면 얼굴 타잖아. 피부 관리해야지."
그의 뻔한 거짓말을 들으며 작가는 이야기한다. 그 순간만큼은 그 친구로 인해 혼자 남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가끔 타인의 고통, 혹은 그의 삶에 대한 공감은 과연 가능한 것인가 의심하고 회의한다. 그 불가능성을 오히려 확신할 때도 많다. 하지만 김원영 작가의 어릴 적 그 친구처럼, 어설프게나마 '곁'에 머무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저 돕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친구로,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동료 시민으로 말이다.

*나는 그 뒤로도 여러 우여곡절을 겪다가 다행히 간이경사로를 구했다. 그리고 간이경사로를 구하는 과정에서 통화했던 이들과 함께 광주 시청 내에 있는 시민 이용시설의 장애인 접근권과 관련한 문제를 공감했고,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기로 했다.
#장애인이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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