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의 뒤늦은 사과, 영억이익 15조원의 그늘

[주장] 직업병 피해자와 유족에 고개 숙인 삼성, 하지만

등록 2018.11.25 19:09수정 2018.11.25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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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숙여 사과하는 삼성전자 김기남 대표삼성전자 김기남 대표가 23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삼성전자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의 협약식에서 사과문을 발표하며, 피해자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 권우성

삼성전자가 마침내 고개를 숙였다.

지난 2007년 3월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근무하던 황유미씨가 급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지 무려 11년 8개월 만에 직업병 피해자에 대한 공식 사과와 함께 구체적인 피해보상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23일 서울 세종대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삼성전자-반올림' 중재판정 이행 합의 협약식'.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이사는 "병으로 고통받은 직원들과 가족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라면서 사죄했다. 삼성전자는 공식 사과와 함께 다음 달부터 시작해 오는 2028년까지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이날 삼성전자가 직업병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피해보상 계획을 발표한 데에는 '반도체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조정위원회)의 역할이 컸다. 앞서 2015년 1차 조정 당시 삼성전자와 직업병 피해자 단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 측이 조정위원회의 조정안에 이견을 보이며 합의가 불발되자 강제조정 방식의 중재안을 제안한 것이 주효했다.

조정위원회는 1차 조정안이 무산되자 활동 종결 의사를 내비치며 설득과 압박을 병행했고, 결국 지난 7월 22일 양측으로부터 2차 조정안을 조건없이 수락하겠다는 확약을 받아냈다. 이와 관련 조정위원회 위원장인 김지형 전 대법관은 지난 7월 18일 "이 사안은 모든 일하는 사람들의 건강피해와 보상에 관한 문제이며, 당사자 사이에 일정 부분 양보와 타협이 불가피하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일각에서는 황유미씨 사망이후 무려 11년 8개월 동안이나 책임을 회피해온 삼성전자가 직업병 피해자들에 대해 사과와 보상을 하기로 입장을 바꾼 것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의식한 조치라는 분석도 있다. 뇌물공여 혐의로 대법원 재판을 앞두고 있는 이 부회장에 대한 사회적 신뢰 회복과 삼성반도체에 덧씌어져 있는 부정적 이미지를 덜어내기 위한 것이라는 추측이다. 

무려 11년 8개월... 그들은 대체 무엇을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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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은 지난 2월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법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은 뒤 석방되고 있는 모습. ⓒ 이희훈

 
실제 뇌물죄 혐의를 받고 있는 이 부회장이 재판을 받기 이전과 이후 삼성전자 측의 행보를 보면 이런 말들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자그만치 11년 하고도 8개월이다. 강산이 변할만큼의 그 긴 시간 동안, 피해자가 계속 늘어나고 유족들의 가슴에 굵은 대못이 박히는 동안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황유미씨의 사망 이후 각계로부터 삼성전자 사업장의 열악한 작업환경과 안전보건 상태에 대한 경고와 비판이 끊이질 않았다. 2013년 고용노동부가 삼성반도체 화성공장에 대한 산업안전보건 특별감독을 실시한 후 내린 결론은 "총체적으로 안전보건관리가 부실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적발된 법 위반만 해도 무려 1934건에 달한다. 

가장 많은 직업병 피해자가 나온 곳으로 알려진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 대한 고용노동부의 '안전보건 진단보고서' 결과 역시 다르지 않았다. 보고서는 "물질유해위험에 대한 실질적인 교육이 미흡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유해가스를 실외로 배출시키는 설비가 없다" "외부점검, 안전진단을 통해 문제점을 발굴하겠다는 자세보다는 문제가 없다고 하거나, 문제점 축소를 지향하는 왜곡된 문화가 상당히 강하다" "유해물질에 단기간 고농도로 노출될 수 있는 작업에 대한 관리가 제대로 안 되고 있다" 등의 문제들이 적시돼 있다. 

이는 결론적으로 삼성전자 작업장의 작업환경과 안전보건 실태가 아주 취약하다는 의미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이같은 경고와 비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 사이 인체에 치명적인 화학물질과 유해가스 등에 노출된 노동자들이 백혈병, 재생불량성 빈혈, 뇌종양, 다발성경화증, 각종 암 등으로 쓰러져 갔다. 반올림에 따르면, 삼성그룹의 직업병 피해자는 모두 320명(사망자 118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중 삼성반도체 및 LCD 사업장에서만 80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삼성전자 측은 자신들의 과실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았다. 반도체 사업장의 근무 환경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며 소송을 제기한 유족들과 지리한 법정다툼을 이어갔다. 2017년 1월 사망한 김기철씨 역시 비슷한 경우다. 화성공장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에 걸린 그는 "병과 직업의 상당한 인과 관계가 있다"는 의사의 소견에도 불구하고 자료제출을 거부한 삼성전자의 비협조로 산재 보상을 받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다(근로복지공단은 2018년 3월 30일 김기철씨에 대한 산재를 인정했다). 

앞서 2015년 조정위원회의 1차 중재안 합의가 무산된 것도 삼성전자 측이 100억 원 규모의 공익재단 설립에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삼성전자는 대한민국의 경제를 선도하는 대표기업이라는 이미지와 자사 노동자들의 생명과 안전, 인권을 경시하는 나쁜 기업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 특히 직업병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삼성전자 측이 보여준 행태는 인간의 존엄 및 기업윤리와 맞물려 적잖은 사회적 논란을 야기시켜 왔다. 

영업이억 17조5700억원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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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삼성전자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의 협약식이 열렸다. ⓒ 권우성

 
김 대표의 공식 사과와 피해보상 약속에도 불구하고 세간의 반응이 여전히 싸늘한 이유다. 일각에서는 이 부회장이 뇌물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후 삼성전자의 태도가 달라졌다며 순수성을 의심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지난 4월 삼성전자 서비스가 협력사 직원 8000여 명을 직접 고용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서도 뒷말이 무성하다. 삼성바이오 분식회계와 연계시키는 의심 어린 시선도 있다.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그들이 감내해야 할 숙명이자 업보다. 김 대표의 사과가 진성성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면 이를 믿게 만들어야 할 당사자는 그들 자신이다. 

지난 10월 31일 삼성전자 측은 3분기 연결기준 확정 실적으로 매출 65조4600억 원, 영업이익 17조5700억 원을 올렸다고 밝혔다. 그러나 사상 최대 실적의 이면에 감추어진 진실을 삼성전자는 직시해야 한다. 수많은 노동자와 유가족이 흘린 땀과 눈물, 그리고 목숨값이 그 속에 녹아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한 번의 사과와 피해보상 계획 발표만으로 신뢰를 회복하기엔, 삼성전자를 향한 불신의 뿌리가 아직 크고 깊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의 블로그 '바람 부는 언덕에서 세상을 만나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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