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징용 재판, 결국 '성공한 거래' 될까?

[해설] 대법원, 피해자들 손 들었지만 '소멸시효' 쟁점 언급 없어... 양승태 시나리오 유효

등록 2018.12.03 15:39수정 2018.12.03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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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대법원. ⓒ 연합뉴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최근 일본 전범기업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대표적인 '재판거래'로 꼽혔던 사건에 결국 '정의로운 결론'이 내려진 것으로 보였다. 전원합의체 판결에 따라 이후 다른 강제징용 관련 재판에서도 법원은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그러나 양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계획한 '민법상 소멸시효를 문제삼아 추가소송을 원천봉쇄'하는 전략은 여전히 유효하다. 대법원이 전원합의체와 후속 판결에서도 소멸시효 관련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멸시효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피해 보상을 받기 어려워 사실상 양승태 대법원의 계획이 실행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소멸시효 언급 안 해... 전범기업 "대법원이 판단할 때까지 미뤄야"

대법원은 지난 10월 30일, 파기환송심대로 신일철주금이 피해자들에게 각 1억 원씩 배상하라고 판단했다. 사건이 재상고심으로 올라온 지 5년 만이었다. 법정에는 원고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춘식씨(98)가 참석했고, 눈물을 쏟았다. 그러나 재판부는 소멸시효 문제에 관해서는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았다. 당시 대법원 관계자는 "추가 소송이 제기될 경우 일선 법원이 소멸시효 문제를 새롭게 판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 달 만에 소멸시효 문제가 새롭게 떠올랐다. 지난달 29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2부(부장판사 김한성)는 신일철주금의 또 다른 피해자들의 항소심을 진행했다. 대법원 첫 판결 후 3년 기한 전인 2015년 5월 12일 제기된 소송이지만, 재판부는 소멸시효를 언급했다. 재판부는 "원고들의 객관적 권리행사 장애사유는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판결이 아닌 2012년 5월 24일 자 대법원판결로 이미 해소됐다"라고 언급했다.

민법은 피해자가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를 안 날부터 3년 안에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않으면 소효가 소멸된다고 보고 있다. 피해자는 자신의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객관적 장애사유'가 있어야 한다. 일본 전범기업 측은 대법원이 강제동원 재판에서 소멸시효 기점을 명확히 판단하지 않은 점을 이유로, 그때까지 관련 하급심 선고를 미뤄야 한다는 주장하고 있다.

양승태 대법원의 계획 "소멸시효 넘겨 보상금으로 갈음하자"


재판 지연으로 소멸시효를 문제 삼는 내용은 양승태 대법원의 계획이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은 2013년 12월 '장래 시나리오 축약(대외비)'이라는 제목의 문건을 작성했다.

'대법원 파기환송과 조정을 거치는 동안 나머지 피해자들은 소멸시효가 완성돼 소송 제기가 불가하다. 독일 같은 정도의 적정한 보상금 지급(300만원 정도)으로 갈음 가능하다.'

차한성 당시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이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의 삼청동 공관에서 '비밀회동'을 가진 직후였다. 피해자들이 대법원의 결론만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원고 4명의 기다림은 길었다. 피해자들은 1997년 신일철주금(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일본 오사카지방재판소에 손해배상금과 미지급 임금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으나 패소했다. 이들은 2005년 대한민국 법원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국내 법원도 1심과 2심에서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피해자들의 청구권이 이미 소멸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 1부(주심 김능환 대법관)는 2012년 5월 24일 이들의 청구권을 인정한다는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다시 돌려보냈고, 파기환송심도 대법원 판단대로 신일철주금이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첫 판결이었다.

신일철주금의 상고로 2013년 8월, 사건은 다시 대법원으로 올라갔다. 새로운 증거나 쟁점이 없는 경우, 대법원은 '심리 불속행'으로 하급심 판결을 확정한다. 그러나 대법원은 차일피일 선고를 미뤘다.

법원행정처는 '돈 계산'... 문건대로 실행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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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전원합의체, 일제 강제징용 승소 판결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소영 대법관)는 지난 10월 30일 오후 서울시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강제징용 피해자 원고 4명이 신일철주금(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의 재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 유성호

 
대법원은 왜 결론을 미뤘을까. 사법농단 의혹을 수사하는 검찰에 따르면, 이 시기 박근혜 정부와 법원행정처 사이에 교감이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5년 한일 정부 간 위안부 합의를 앞둔 데다 선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일청구권 협정을 주도한 당사자라는 걸 의식해 피해자 승소 판결을 꺼려 했다.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2013년, 2014년에 걸쳐 '삼청동 회동'을 열었고, 이 자리에는 법원행정처장(2013년 차한성·2014년 박병대)이 참석했다. 검찰은 이 회동에서 차 전 대법관이 "국외송달을 이유로 재판 지연이 가능하다" 등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보고 있다.

법원행정처는 한 발 나아가 징용 재판을 지연시켜 '소멸시효'로 추가 소송을 막는 방안을 구상했다. 2012년 첫 대법원판결을 기준으로 민법상 소멸시효 3년이 지나면 다른 피해자들이 추가 소송을 제기할 수 없으므로 최종 판결을 2015년 이후로 미루는 방안이었다.

행정처는 금액까지 계산했다. 파기환송심이 책정한 1억 원 대신 화해나 조정을 시도해 한 사람당 300만 원 정도로 마무리할 수 있다고 계획했다. 20만 명으로 추산되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모두 1억 원씩 지급한다면 20조 원이 들어가지만, 대법원판결은 미뤄 소멸 시효를 이용한다면 비용을 아낄 수 있다는 것이다.

검찰도 '장래 시나리오 축약' 문건이 상당 부분 실행됐다고 보고 있다. 해당 문건에는 소멸시효를 이용해 재판 외에 새로 설립한 재단을 통해 소송비용을 변제하게끔 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다. 실제 포스코가 100억 원 중 현재 60억 원을 출연한 일제강제동원피해자재단이 2014년 6월 설립됐다. 검찰은 재단 설립.운영 과정에 법원행정처 개입이 있었는지 주목하고 있다.

현재 후지코시, 신일철주금, 미쓰비시중공업 등을 상대로 한 하급심 재판들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대법원이 소멸시효 문제를 비껴갔다는 비판도 나온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대법원이 소멸시효를 언급하지 않으며 기본 가이드라인 없이 각급 법원에 판단을 미룬 건 무책임하다고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신일철주금 #강제징용 #대법원 #사법농단 #양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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