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우주인, 여덟 살'은 어떻게 '지구인'이 되어 가나

[서평] 최은경 지음 <지구인이 되는 중입니다>

등록 2018.12.05 09:42수정 2018.12.05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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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공동체벗, 2018, 12000원 ⓒ 교육공동체벗

 
초등학교 1학년 시절을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과연 있기는 할까. 아무도 갓난아이 시절을, 또는 취학 이전 시기를 몇 개의 단편적 장면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으로 기억하지 못한다. 초등학교도 다르지 않다. 초등학생들이 자아와 세계에 대한 기억을 체계적으로 형성하려면 적어도 3, 4학년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학교에 가서 글자와 그림을 배우고 노래를 익히며, 동무들과 놀다 다투면서 자라긴 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 그 시기의 기억은 단편적으로만 존재한다. 교사 최은경이 "말도 안 통하고, 하고 싶은 건 많은 초등 1학년. 툭하면 물이랑 우유를 쏟아 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책으로 우주선을 접는 녀석들. 와와 외계어로 떠들던 아이들"을 '진정한 우주인, 여덟 살'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최은경 교사가 쓴 <지구인이 되는 중입니다>(교육공동체벗, 2018)은 그가 이태에 걸쳐 새봄이 되자 만났던 '반짝이들', '진정한 우주인, 여덟 살'과 함께 이야기로 가르치고 배우며 '지구인이 되어 가는' 과정의 미시적 기록이다. '초등 1학년, 은경샘의 교실 이야기'라는 부제 그대로 이 책은 성장의 과정을 지나는 아이들과 교사의 일상을 담았다.

성장의 '통과제의', '쑥·마늘' 대신 이야기

'돌봄'과 '학습'이 뒤섞여 있는 교실은 이 우주인들이 지구인으로 성장하는 통과제의의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아이들은 쑥과 마늘 대신 '이야기'의 힘을 빌리는데, 선생님이 읽어주거나 아이들이 날마다 읽는 그림책을 통해서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지구를 이해하고 배우는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선생님은 이야기 주머니를 차고 우주인들과 잘 먹고 잘 놀고 잘 지냈어. 행복했지."
 - 이야기 한 자리, 본문 10쪽


"1학년 아이들에겐 날마다 새로운 이야기와 놀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최 교사는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고 아이들의 실수를 "태어난 지 이제 일곱 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사람"이니 괜찮다고 여긴다. 느린 아이들은 좀 더 기다려주고 인정해 주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는 생각하고 "씩씩하게 운동장을 걸어갈 때 아이들은 자란다"고 믿는다.


최은경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나는 우리 반 아이가 어떤 아이로 자라기를 바라는가?' 하는 지극히 평범하지만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가 저마다 다른 아이들을 똑같은 크기와 무게의 사랑과 관심으로 돌아보는 이유다. 그는 '나야 나!'가 아닌 '나와 우리 안에서 행복하게 자라는 아이'로 자랄 수 있도록 자극하고 격려한다.

그가 그려내는 교실 풍경은 매우 사실적이다. 아이들의 말과 행동을 장면의 맥락을 살려서 살아 있는 모습으로 그린다. 아이들의 동문서답식 답변도, 엉뚱한 이야기나 딴전도 가리지 않고 받으면서 그는 아이들과 함께 한글을 배우고 그리기와 만들기를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게 한다.

그는 시를 읽어주고 2학기에는 아이들이 기어코 시를 쓰게 만든다. 시켜서가 아니라 시에 있는 낱말 바꾸기 놀이를 통해 아이들 스스로 시를 쓰자고 하게 만들고 마침내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나타내는 가장 위대한 일을 하고 있는 27명의 전사들"이 되게 하는 것이다.
 

학교 도서실에서 최은경 교사가 반짝이들과 함께 엎드려 그림책을 읽고 있다. ⓒ 최은경


"이야기 좋아. 글자는 싫어. 절대 먹지 않을 거야."
"글자는 먹는 게 아니야."
"그럼 뭔데?"
"잘 봐. 이렇게 붙잡아서 같이 노는 거야."
"잡는 법 가르쳐 줘. 안 가르쳐 주면 잡아먹어 버릴 테야!"


숫자는 알지만, 글자 해독을 어려워하는 아이는 읽기와 쓰기를 어려워하지만 이야기는 무척 좋아했다. 최 교사는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를 그림으로 그리게 하고 다시 글자로 연결하는 방식으로 아이와 같이 공부했다.

아이를 지구인으로 자라게 하는 '비밀의 동화' 같은 교실

그는 숨은 자음을 찾아 새로운 낱말을 배우게 하고, 함께 여름 소리를 찾아 그걸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게 하고 공책에 한 줄의 감상으로 적게 한다. 한 학기를 마치면 아이들은 마침내 동화의 '맛'을 깨닫는다. 제가 읽은 동화의 맛을 쓴맛, 단맛, 짠맛, 신맛, 새콤한 맛 등으로 표현하는 아이들에게 동화는 먹는 것이 될 수 있다. 때론 "독서가 가장 무모한 모험이고 황당한 놀이가 될 수 있다"고 그가 믿는 이유다.

그가 꿈꾸는 교실은 아이들이 제때 제 생각과 말을 글로 문장으로 그림으로 표현하고, 또래와 학급 공동체의 일원으로 부대끼며, 즐거운 놀이와 운동으로 건강하게 자라는 공간이다. '사랑과 배움의 공동체' 같은 구닥다리 표현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스물아홉 명의 '진정한 우주인'을 그들과 같은 눈높이로 살피며 하나씩 지구인으로 자라게 하는 비밀의 동화 같은 공간이다.

이 책은 특별한 환경의 학교나 교실을 다루지 않는다. 최은경이 가르치는 학교는 시골 학교도 무슨 대안학교도 아니다. 도시 지역의 일반적 학교 환경이고, 가르치는 아이도 얼추 서른 명에 가깝다. 결코, 쉽지 않은 환경에서 그가 온전히 자신의 마음과 힘을 기울여 실천하며 가꾼 교실이다.

무엇보다도 최은경의 실천은 혁신공감학교로 동료 교사, 학부모와의 협력으로 일구어낸 성과다. 그는 "초등학생으로 적응하고 성장할 때 교사와 부모, 보호자가 협력하고 지원하는 것이 기본"이고 그런 "협력적 관계가 소통과 신뢰로 이루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개인의 역량에 기대거나, 그 성공을 사례로 드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은 이 책이 가진 만만찮은 미덕이다.

그래도 그 역시 약한 교사라 실수도 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진정이 아이들을 움직이게 하고,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아이들이 사이좋게 친구를 이해하게 한다. 한글을 가르치면서 이른 그의 깨달음은 가르침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다.

"성장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사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성장하며 모방하는 대상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교사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자모음 말놀이 동시를 외우고 그림과 몸짓으로 표현하고 노래로 부르는 것이 즐겁다. 내가 즐겁고 재미나게 하면 아이들은 더 신나게 따라 하고 가끔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결과를 보여준다."
  -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 본문 220쪽


그는 뒤늦게 아동문학을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은 교사다. 그의 학위는 승진을 위한 이력(스펙)으로 존재하지 않고 교실에서 실천되고 검증된다. 그것은 그가 1급 정교사 연수에서 '독서교육의 실제-동화 읽는 즐거운 교실'이라는 주제로 강의하고 교과서를 집필하는 힘의 원천이다.

중등교사 출신이라 초등 아이들 이야기가 읽히기나 할까 싶으면서 편 책을 단숨에 읽어낸 것은 이야기의 힘이면서 동시에 그 행간에 담긴, 때로 가슴을 뻐근하게 만드는 교사의 공감과 사랑 때문이었다. 나는 내 지나간 교직 생활을 떠올리며 자신을 여러 차례 돌아보곤 했다.
 

1학년 1반 반짝이들이 학교 도서실에서 책을 읽고 있다. 아이들은 의자 위에 올라앉기도 하고 배를 깔고 엎드려서 책을 읽는다. ⓒ 최은경

 
모든 교사, 모든 부모가 읽어볼 만한 책

"1학년에 아이를 보낸 부모도, 보낼 부모도, 1학년 담임교사도, 1학년 담임을 할 생각이 있는 교사도, 아니 모든 부모와 교사가 읽어볼 만한 좋은 책입니다."

한 온라인 서점의 책 소개에 달린 댓글이다. 중등교사에게는 물론, 무엇보다도 아이를 어떻게 기를 것인가를 전혀 알지 못하는 부모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아이들의 성장 시간표를 자신에게 맞추지 말고 아이의 성장 시간표에 자신의 돌봄을 맞추는 게 정답이라는 걸 알려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학부모와 상담을 마치고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 글은, 문제 상황은 아이에게만이 아니라 교사에게도 학부모에게도 언제든 닥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환기하면서 모두에게 공감과 협력의 관계가 긴요하다는 걸 확인해 준다.

"아이들에게는 문제 상황에서 '어떻게 하지?'를 결정하고 고민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더불어 교사와 학부모에게도 성장의 시간을 견뎌 갈 따뜻한 공동체가 필요하다."
 - 성장의 시간을 견뎌내는 일, 본문 205쪽


교사 최은경은 아이들과 함께 화분을 준비하고 씨앗을 심었다. 그리고 자신이 가르치는 스물아홉 명의 어린이들이 씨앗이라고 생각하면서 시 한 편을 썼다.

1학년 1반 교실엔 / 여덟 살이 심은 / 29개 씨앗이 자란다. //
찬바람 맞고 / 봄비를 견디며 / 으쓱으쓱 / 간질간질 / 와와와! //
새 눈을 피운 씨앗들 소리에 / 교실이 출렁인다. //
너는 어떤 씨앗이니?
  - 시 "어떤 씨앗이니?" 전문


오늘도 그는 "너는 어떤 씨앗이니?"하고 물으면서, 일생에 단 한 번인 '초등학생 되기'를 처음 해 보는 반짝이들이든 다른 학년의 아이들이든, 함께 '이야기가 있는 교실'을 꾸려가고 있을 것이다.

지구인이 되는 중입니다 - 초등 1학년, 은경샘의 교실 이야기

최은경 지음,
교육공동체벗, 2018


#초등 1학년, 은경샘의 교실 이야기 #지구인이 되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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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이 넘어 입문한 <오마이뉴스> 뉴스 게릴라로 16년, 그 자취로 이미 절판된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이 남았다. 몸과 마음의 부조화로 이어지는 노화의 길목에서 젖어 오는 투명한 슬픔으로 자신의 남루한 생애, 그 심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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