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도 '3·1혁명'이라고 말했는데... 이름 되찾아야

3·1운동 100주년 기념 심포지움서 윤경로 교수가 정명(正名) 제기

등록 2018.12.08 11:45수정 2018.12.08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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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의미있는 학술 심포지움이 진행되었다. 12월 7일 백범김구기념관 대회의실에서 '3·1운동은 어떻게 전국으로 확산되었나'라는 제목으로 '3·1운동 100주년 기념 심포지움'이 진행되었다.
  

‘3·1운동 100주년 기념 심포지움’이 6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백범김구기념관 대회의실에서 개최되었다. ⓒ 임재근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주최하고, 한국사연구회가 주관한 이번 심포지움은 독립만세운동이 어떻게 전국으로 확산될 수 있었는지와 시위의 양상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는지 살펴보고자 진행되었다.

본격적인 심포지움에 앞서 오전 9시 50분에 진행된 개회식에서 한국사연구회 박찬승 회장(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오늘 심포지움에서는 3월 1일 서울과 평양 등 주요 도시에서 시작된 만세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과정과 각 도별, 군별로 만세시위에서 나타난 특징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박찬승 교수는 이어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열리는 이번 심포지움이 아무쪼록 3·1운동의 참모습을 우리가 더 잘 잘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한국사연구회 박찬승 회장(한양대 사학과 교수)이 개회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임재근

 
 이날 심포지움의 기조발제는 "100주년을 맞는 '3·1운동'의 역사성과 현재성"이라는 제목으로 윤경로 한성대 명예교수가 나섰다. 윤경로 교수는 "1919년 3월 1일의 독립만세운동은 전근대사회 왕조의 봉건성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함과 이후 밀어닥친 개항의 타율성 등으로 인한 누적된 제반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세류(細柳)와 같은 여러 갈래의 운동들이 부침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대하(大河) 곧 거족적인 대한독립만세운동이라는 큰 강으로 이루었다"고 역사성을 부여했다.

윤 교수는 "3·1운동은 민(民)이 주도한 '혁명'"이었다며, 3·1운동의 용어에 대한 재검토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는 "개천절, 제헌절, 광복절, 한국날과 함께 5대 국경일 중 하나로 기리고 있는 '3·1절'이라는 명칭에는 그날의 역사적 의미를 담지 못하고 단순히 '3·1절'이라고 지칭하고 있다"며, "이날을 단순히 '3·1절'이라 할 것이 아니라 '3·1독립절'이라든지 아니면 '기미독립만세절'이라든지 그날의 역사적 의미를 다른 국경일과 같이 부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3·1거사'가 지닌 대단한 역사성을 생각할 때 단순한 '운동'의 하나로 지칭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3·1 대사건'을 비하하는 것"이라며, "지금까지 '3·1운동'이라고 지칭해온 것을 100주년을 맞으며 '3·1혁명'으로 정명(正名)하자"고 제기했다. 이러한 정명 제기는 지난 2014년 3·1혁명95주년기념학술회에서 공론화된 바가 있다.
  

윤경로 한성대 명예교수가 심포지움에서 “100주년을 맞는 ‘3·1운동’의 역사성과 현재성”이라는 제목으로 기조발제에 나섰다. ⓒ 임재근

 

윤 교수는 해외독립운동가들이 1920년대 말 1930년대까지 '3·1운동'을 '3·1혁명'으로 불렀던 사례와 1939년 중국 장사(長沙)에서 거행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관 3·1절 기념식에서 '3·1대혁명'이라고 지칭한 사례, 해방 후 이승만, 김구 등의 연설에서도 '3·1혁명' 또는 '3·1대혁명'이라는 말이 빈번히 사용된 사례를 제시하면서 본인의 제기를 뒷받침했다. 그는 "제헌헌법 제정을 위해 결성된 헌법기초위원회가 작성한 헌법초안 전문에도 '3·1혁명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고 되어 있다"고 밝히며, "이 초안이 국회 본회의 심의하는 과정에서 '3·1혁명'이 '3·1운동'으로 바뀌고 말았다"며, '혁명'이 다시 '운동'으로 회귀한 것이라고 밝혔다.

윤경로 교수는 "최근 연구에 따르면 3월 1일 당일 날 북쪽에서는 평양을 비롯한 진남포, 선천, 의주, 안주, 해주 그리고 원산 등 7개 곳에서 시위가 있었음이 밝혀졌다"며, "그간 북쪽의 3·1운동사에 대한 남쪽의 이해 또한 매우 열악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면서 "정상간 합의된 선언문에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남북이 함께 하기로 했다"며, "100주년 공동행사를 통해 우리 민족이 하나임을 재확인할 뿐만 아니라 그간 남북 사이 역사이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서로 확인하며 분단의 벽을 뛰어넘어 하나의 역사인식을 만들어가는 역사적 전기를 마련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기조 발제에 이어 한국사연구회 회장 박찬승 교수는 '만세시위의 기폭제가 된 서울시위'라는 제목의 발제를 통해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발생한 만세시위의 구체적 경위와 인물, 시위 방식과 경로 그리고 다른 지역으로의 파급과정을 밝혀냈다. 한국기독교사연구소 김승태 소장도 의주, 평양, 원산, 함흥을 중심으로 '북한지역의 선구적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를 발표했다. 오후에는 평안도, 황해도, 충남, 경남, 호남, 경기도 등 지역 차원의 운동에 대한 발표와 토론을 통해 3·1운동의 전국 확산 과정과 특징을 알아봤다. 오전 10시에 시작된 심포지움은 오후 6시까지 진행되었다.
#3·1운동 100주년 기념 심포지움 #3·1운동 100주년 기념 심포지움 #박찬승 교수 #윤경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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