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출이 심한 옷을 자제하라는 말은 성범죄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씌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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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수(werogatda)등록 2018.12.10 18:15
<노출이 심한 옷을 자제하라는 말은 성범죄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씌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성 인권 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신기한 현상을 목격했다. 여성에게 성범죄를 조심하라는 투의 말을 할라치면, 격앙된 목소리로 '성범죄가 여자 탓이냐'라는 반응이 돌아오는 것이다. 범죄 예방의 노력이 왜 범죄 책임의 전가와 동의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왜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지 필자가 생각하는 점을 한 번 적어 보고자 한다.

과연 성범죄는 피해자의 의상과 상관관계가 있을까?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측은, 노출이 심한 의상은 범죄 대상의 성적 대상화와 비인격화를 부추기며(1), 비인격화된 대상에게는 폭력을 행사하기 쉬워지므로(2)(3) 성범죄자가 범죄를 일으키기 쉽게 만든다고 주장한다(4)(5). 반대로, 성범죄가 피해자의 의상과 상관이 없다고 여기는 이들은, 성범죄자가 범죄의 대상을 고를 때 노출의 정도보다는 피해자의 수동성 / 복종성을 우선적으로 살피므로(6) 피해자의 의상과는 상관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노출의 정도가 덜했을 때 성범죄를 당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의견도 있다(7).

양측 다 이론적으로는 타당하지만,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면 연구 결과가 필요하다. 가장 신뢰성이 높은 연구 방법은 무작위 비교 연구(randomised controlled trial)인데, 예를 들어 야하게 입은 이 100명과 야하지 않게 입은 이 100명을 밤에 돌아다니게 한 후 발생하는 성범죄의 빈도를 기록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연구는 윤리적 이유로 인해 실행이 불가능하고, 무작위 비교 연구 다음으로 높은 과학적 가치를 지니는 후향적 코호트 연구(retrospective cohort study)는 가능하다. 예를 들어 성범죄를 당한 피해자 100명을 대상으로 범죄 당시 입고 있었던 옷을 기록하고, 야한 옷과 성범죄 사이에 비례 관계가 있는지 조사하는 것이다.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성폭행의 55-61%는 범행의 목표가 사전에 미리 계획되어 있고, 충동적인 경우는 37-46%이므로(8), 피해자의 의상이 범죄자의 시각에 미치는 효과를 알기 위해서는 조사를 충동적 성범죄로 한정해야 할 것이다. 

아쉽게도 인터넷을 뒤져본 결과 믿을 만한 후향적 코호트 연구 결과를 발견하지 못했다. 2010년에 이스라엘에서 행해졌던 한 설문조사가 상술한 연구 방법에 가장 근접한데(9), 연구지에 설문조사의 결과를 생략하고 피어슨 상관 계수만 게재하는 등 중요 정보가 누락되어 있고, 글에서 노골적으로 여성의 편을 드려는 의도가 읽혀져 별로 신뢰스럽지 못했다. 피해자의 의상과 성범죄를 주제로 한 연구가 인터넷에 더 있었지만, 대부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자의 의상이 성범죄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혹은 '여성의 의상에 관한 남성과 여성의 시각 차이' 등 사람들의 기존 관념에 대한 조사일 뿐, 피해자의 의상이 성범죄율과 실제로 얼마나 상관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과학적인 조사는 아니었다. 2018년 브뤼셀에서 성폭행 희생자들이 입고 있던 옷을 주제로 한 전시회가 열렸는데(10), 이 또한 '야한 옷을 입지 않은 성폭행 피해자도 있다'를 증명할 뿐 '야한 옷을 입어도 성폭행을 당할 확률이 높아지지 않는다'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혹시 읽는 이 중에 믿을 만한 연구 결과를 아시는 분이 있으시면 제보를 받도록 하겠다.

사실 성범죄와 피해자 의상의 상관관계가 과학적으로 증명되느냐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페미니스트에게 '조심하라'라는 조언을 했을 때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그 조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피해자에게 조언을 하는 것 자체를 피해자에게 범죄의 책임을 씌우려는 노력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심의 유무'와 '범죄의 책임'이 독립된 질문임을 인지한다면 그런 격앙된 반응은 보일 필요가 없다. 이해를 돕기 위해 두 질문을 따로 적어 보았다.

1. 조심의 유무 - 범죄를 조심한다 / 범죄를 조심하지 않는다
2. 범죄의 책임 - 피해자에게 있다 / 가해자에게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질문 1의 답 '범죄를 조심한다'가 질문 2의 답 '범죄의 책임이 피해자에게 있다'와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질문 2의 답은 물론 '가해자에게 있다'이며, 이는 질문 1의 답 '범죄를 조심한다'와 충돌 없는 양립이 가능하다.

물론 일부 여성이 왜 그런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화냥년같은 욕이나 은장도를 보고 알 수 있듯이 한국은 역사적으로 성범죄의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해 왔으며 (여성에게 남성보다 더 높은 수준의 정절을 요구하는 것은 한국뿐 아니라 농경이 기반이 된 문명의 공통점이다) 여성은 항상 유교 문화의 희생양이었다. 또 다한 가설 (just-world hypothesis)라는 심리학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사람들이 비극적인 사건을 겪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은 그런 사건을 겪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피해자를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6). 이유야 어찌 되었든, 여성이 오랫동안 차별을 감내해 왔다는 것은 사실이며, 그동안 참았던 울분을 터뜨릴 권리가 있으며, 이를 경청하고 보듬어주는 것이 성숙한 사회의 자세라 하겠다.

성범죄를 방지할 수 있는 대비책이 있다면 그 대비책의 실제 효력의 유무를 떠나서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나쁠 것이 있을까. 걱정해서 하는 조언을 무조건 '피해자 탓 하느냐'하며 무시한다면 세상에 남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이 없을 것이다. 대도시에서 밤늦게 혼자 돌아다니지 말라는 말을 해서도 안 되며, 술집에서 남이 주는 술 마시지 말라는 말을 해서도 안 되며, 낮선 사람이 초인종을 누르면 문 함부로 열지 마라는 말을 해서도 안 될 것이다. 지나친 노출을 자제하라는 조언 또한, 실제로 효력이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실천 자체는 해가 될 일이 없다. 모든 범죄는 1차적으로 예방이 최선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성폭행의 반 이상이 술과 연관이 있다고 하니(11) 건전한 음주 문화를 정착시키는 것도 성범죄율을 낮추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겠다.

글을 마무리하며, 필자가 생각하기에 다음 다섯 가지 원칙을 명심한다면 건설적인 방향으로 사회적 논의를 이끌어갈 수 있을 것 같다. 

1. 여성과 남성 모두, 본인의 허락 없는 성적인 접촉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2. 노출은 성적 접촉 허락의 간접적인 표현이 아니다.
3. 성범죄의 책임은 100% 가해자에게 있다. 
4. 여성은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자유가 있으나 책임은 아니다.
5. 한국 사회는 역사적으로 여성에게 성범죄의 책임을 지워 왔음을 인정하고, 이를 고발하려는 여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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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huvanesh Awasthi (2017). From Attire to Assault: Clothing, Objectification, and De-humanization – A Possible Prelude to Sexual Violence?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5344900/

(2) Cikara M., Eberhardt J., Fiske S. (2011). From agents to objects: sexist attitudes and neural responses to sexualized targets
https://www.ncbi.nlm.nih.gov/pubmed/20350187

(3) Rudman L., Mescher K. (2012). Of animals and objects: men's implicit dehumanization of women and likelihood of sexual aggression.
https://www.ncbi.nlm.nih.gov/pubmed/22374225

(4) Fitzgerald L. F., Shullman S., Bailey N., Richards M., Swecker J., Gold Y., et al. (1988). The incidence and dimensions of sexual harassment in academia and the workplace. 
https://doi.org/10.1016/0001-8791(88)90012-7

(5) Lahsaeizadeh A., Yousefinejad E. (2012). Social aspects of women's experiences of sexual harassment in public places in Iran
https://link.springer.com/article/10.1007/s12119-011-9097-y

(6) Theresa Beiner (2012). Sexy Dressing Revisited: Does Target Dress Play a Part in Sexual Harassment Cases?
https://scholarship.law.duke.edu/cgi/viewcontent.cgi?article=1109&context=djglp

(7) Chen Shen (2003). Study: From Attribution and Thought-Process Theory to Rape-Shield Laws:The Meanings of Victim's Appearance in Rape Trials
https://heinonline.org/HOL/LandingPage?handle=hein.journals/jlfst5&div=28&id=&page=

(8) Robert Hazelwood (1990). The Criminal Behavior of the Serial Rapist
http://crimeandclues.com/2013/01/26/the-criminal-behavior-of-the-serial-rapist/

(9) Avigail Moor (2010). She Dresses to Attract, He Perceives Seduction: AGender Gap in Attribution of Intent to Women'sRevealing Style of Dress and its Relation to Blamingthe Victims of Sexual Violence
https://vc.bridgew.edu/cgi/viewcontent.cgi?article=1202&context=jiws

(10) Chelsea Witschel (2018). Rape victims' clothing displayed to prove clothing choice doesn't cause rape
https://www.independent.co.uk/life-style/rape-victims-clothes-displayed-brussels-belgium-debunk-victim-blaming-myth-a8152481.html

(11) Antonia Abbey (2001). Alcohol and Sexual Assault
https://pubs.niaaa.nih.gov/publications/arh25-1/43-51.htm

 
덧붙이는 글 여성/사회 중에 알맞은 곳으로 글 올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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