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당신도 굴뚝에 오를 수 있다

[참가기] 400일 앞둔 파인텍 노동자 굴뚝농성... 나는 왜 오체투지를 했나

등록 2018.12.12 20:51수정 2018.12.12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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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속노조 파인텍 지회 노동자들이 지난 12월 6일부터 10일까지 오체투지 행진을 했습니다. 이 글을 쓴 황종원 기자는 대학생으로 3박 4일간 노동자들과 오체투지를 함께했습니다.  [편집자말]
발전소 75m 굴뚝 아래 거처 마련한 '땅의 친구들'

이 글을 쓰며 나는 별빛을 생각했다. 2017년 11월 12일 그들이 새벽 싸늘한 공기를 헤치며 굴뚝에 오르던 그 날의 새벽별을. 목동 열병합발전소 75m 굴뚝 아래 거처를 마련한 '땅의 친구들'을 처음 만나던 날, 굴뚝에서 쏘아 보내던 핸드폰 불빛의 가련한 떨림을. 뿌연 세상을 비추는 유난히도 영롱했던 흰 빛을, 그리고 굴뚝의 동료들을 바라보던 그렁그렁한 눈망울에 맺힌 별을.

유난히도 시리던 지난 겨울, 농성장을 찾아온 내게 따뜻한 커피를 건네던 꽁꽁 언 지상의 손도 생각한다. 그리고 그 날도 예외 없이 문화제 시간에 맞춰 핸드폰 불빛을 내려 보내던 75m 위 노동자의 손을 생각한다. 처음 그들을 만나 이야기 나누던 그 때 그 시간 위에 몇 겹의 달력이 쌓였는지, 몇 개의 계절이 지났는지를 생각한다.

무슨 이야기냐고? 목동 열병합발전소 75m 굴뚝 고공농성 400일을 앞두고 있는 파인텍 노동자 박준호와 홍기탁 그리고 그들을 땅에서 지키고 있는 차광호, 김옥배, 조정기 다섯 노동자 이야기이며, 그들과 함께 겨울 차가운 바닥을 기어가던 지상의 별 이야기다.

한파가 예고되었던 12월 첫째 주, 박준호와 홍기탁을 지키는 땅의 친구들이 "더 이상 굴뚝에서 408일을 맞게 할 수 없다"고 호소하기 위해 배를 찬 바닥에 대며 행진하는 '오체투지 행진'을 4박 5일간 진행했다.

2014~2015년 408일 굴뚝농성... 2017~2018 또다시 굴뚝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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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인 지난 9월 24일 오전 서울 목동 열병합발전소 굴뚝 위에서 지난해 11월부터 300일 넘게 고공농성을 이어온 금속노조 파인텍지회 노조원들(사진 위)이 추석을 맞아 찾아온 동료들(사진 아래)의 응원을 받고 있다. ⓒ 연합뉴스

 
'408'이라는 숫자는 박준호와 홍기탁을 땅에서 바라지하고 있는 차광호가 지난 2014년 5월 27일에서 2015년 7월 8일까지 자신의 일터 스타케미칼을 지키기 위해 굴뚝에 올라가 있던 시간이다. 그때 차광호를 지키던 땅 사람들 중에 박준호와 홍기탁이 있었다.

스타케미칼 408일의 굴뚝농성으로 고용 – 노동조합 – 단체협약 승계를 약속 받고 땅으로 돌아온 차광호와 노동자들을 기다리고 있던 낯선 충남 아산의 파인텍 공장은 비가 새고 청소 용구 하나 없는 기숙사, 낡고 닳은 기계 설비만 가득한 '기만의 공장'이었다. 그리고 기만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파인텍의 모기업 스타플렉스는 408일의 굴뚝살이로 만들어낸 약속을 깡그리 짓밟고 다시 노동자들을 길거리로 내쫓았다.


2017년 11월, 결국 박준호와 홍기탁은 굴뚝에 오르게 되었다. 두 사람이 굴뚝을 오르는 걸 지켜봤을 동료들, 차광호와 김옥배, 조정기, 남은 세 명의 노동자들과 박준호와 홍기탁을 아끼는 땅 사람들의 심정을 나는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다.

75m라는, 올려다보기조차 쉽지 않은 높이의 굴뚝에서 박준호와 홍기탁이 고공농성을 이어간 지 400일이 되어간다(11일 기준 395일째). 이번 오체투지는 스타케미칼에서의 408일을 더 이상 반복할 수 없다는 사람들이 모여 준비한 일정이었다. 눈물조차 얼어붙을 날씨 속에서 4박 5일의 배밀이는 그렇게 시작됐다.

무심하게 노려보던 세상 시선과의 싸움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시작된 오체투지 행진은 싸움의 연속이었다. "오체투지를 빙자한 불법 집회 아니냐?"는 희한한 논리로 배밀이 하는 사람들을 막아선 공권력과의 실랑이부터 매일 매일 온 몸에 구석구석 집요하게 찾아와 켜켜이 쌓이는 피로와의 싸움, 무심하게 불어오는 겨울 칼바람과의 싸움, 칼바람보다 무심하게 노려보던 세상 시선과의 무척이나 괴로운 싸움. 그리고 이 괴로운 싸움이 얼마나 더 이어질까 하는, 이따금씩 울컥하고 올라오는 잡념들을 떨어내는 싸움.

그러나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가야할 곳이 있으니까. 만나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온몸으로 사람들을 설득하고 호소하여 만들어가야 할 세상이 있으니까. 꿈이 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청와대로, 국회 앞으로, 그리고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목동 열병합발전소로 더디지만 꾸준히 나아갔다.

"공장으로 돌아가자!"라고 적힌 피켓을 북소리에 맞춰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들고 있으면 바람이 피켓에 온 몸으로 부딪히고 있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고가도로를 바쁘게 통과하는 자동차들이 가득한 도로에서 난 처음으로 '위태롭다'는 감각을 피부로 느꼈다.

행진 대오 사이로 빠져나가려고 끼어드는 오토바이, 배밀이 행렬에 빵빵대며 성화를 내는 차들 바로 옆에 서서 바람에 흔들리는 피켓을 온 몸으로 견디는 것일지언정,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더디지만 꾸준히 행진은 이어졌고, 어느새 굴뚝이 보이는 다리 위에 도착했을 즈음 나는 '위태롭다'는 생각을 다리 아래로 내던져 버렸다.

75m 높은 곳에서 두 사람이 매번 마주칠 차가운 공기, 두 사람이 딛고 선 그 높고 협소한 공간이 더 위태로울 테니까. 아니, 그들이 다시금 높은 굴뚝에 올라야만 하는 현실이, 좁고 높은 그 곳에서 피눈물로 외치고 있는데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이 세상이 더 위태롭다면 위태로울 테니까.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소박한 요구가 408일을 하늘 감옥에 갇혀 나오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더 위태로운 것일 테니까.

누구도 굴뚝에 오르지 않아도 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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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텍 오체투지단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가 나서라" 차광호 금속노조 충남지부 파인텍지회장과 ‘스탁플렉스 투쟁 승리를 위한 공동행동’ 소속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 분수광장에서 파인텍지회 박준호, 홍기탁 노동자의 고공농성이 오는 24일이면 굴뚝고공농성 기록인 408일이 된다며 정부가 고공농성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 줄 것을 요구하며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 ⓒ 유성호

 
행진 대오 속에서 문득 "박준호와 홍기탁은 단지 우리보다 '먼저' 굴뚝에 오른 것이 아닐까? 가진 자들과 힘 있는 자들의 이윤추구로 세상이 계속 돌아간다면 결국 우리는 '아직' 굴뚝에 오르지 않은 것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쩌면 파인텍 노동자들의 굴뚝 농성에 연대하는 일은 이제 누구도 굴뚝에 오르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드는 일에 힘 보태는 일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 인간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세상. 인간이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고, 꿈을 현실로 만들어보자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서로 온기를 나누며 걸어왔기에 우리가 걸었던 배밀이 길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길이 아니었을까 싶다. 뜨거움을 모아 얼음 같은 이윤 중심의 세상을 녹이자고 기원하는 길 말이다.

글을 갈무리하던 중 파인텍지회 지회장 차광호가 "박준호 홍기탁이 408일을 굴뚝에서 맞게 할 수 없다"고 스타플렉스 본사가 있는 목동 CBS 앞에 자리를 깔고 무기한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노동의 겨울에 부는 찬 바람에 밀려 또 다른 벼랑 끝에 왔나 싶었다. 쓰리고 아린 마음을 꾹꾹 눌러 삼키며, 부디 빠른 시일 내에 파인텍 다섯 노동자들과 거리에서 꿈을 공유하던 우리 모두가 노동의 쓰라린 겨울을 끝내고 거리에 뿌린 봄의 씨앗들을 거두는 날이 오기를 기원할 따름이다. 노동의 봄바람을 기다리며, 바닥을 기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친다.
#파인텍 #오체투지 #굴뚝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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