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 광부와 간호요원이 세월호 진상규명에 나선 이유

[재외동포 한인 활동가 릴레이 인터뷰 ⑩] 독일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재독 NRW 모임 최태호 활동가

등록 2018.12.15 14:08수정 2018.12.16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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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곳곳에 700만의 재외동포 한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해외에서 살면 국내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무뎌질 것 같지만, 오히려 더 빠르게 챙겨보고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해외 곳곳에는 국내외 이슈로 활동하는 개인 활동가, 활동 단체들이 있습니다. 활동 성격과 방향은 다양합니다. 같은 주제로 활동한다 하더라도 그곳의 문화와 사회적 분위기 등에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재외동포 한인 시민단체 활동가로서, 전세계의 한인 활동가들을 인터뷰 했습니다. – 기자 말

독일 북서부지방 루르 공업지대에 있는 NRW (Nordrhein – Westfalen)지역에는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재독 NRW 모임'이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발생 직후인 2014년 4월부터 현재까지 활동을 이어온 이 모임의 최태호 활동가와 지난 14일 전화 인터뷰했습니다.

1960~70년대 대한민국 정부는 실업문제 해소와 외화획득을 위해 독일 (당시 서독) 로 광부와 간호요원을 보냈습니다. 최태호 활동가도 1976년 여름, 일자리를 얻기 위해 파독 광부로 지원하여 파견됩니다. 3년 계약이었고, 그는 계약 기간 동안 돈을 벌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물가는 가파르게 상승했고, 최태호 활동가가 3년동안 독일에서 번 돈으로 한국으로 돌아와 정착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당시 최태호 활동가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파독 간호요원과 광부들은 독일 정부에게 계약기간 이후에도 독일에 정착할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 요구했습니다. 이 시기에 한국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이 있었고, 독일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무차별하게 진압하는 정부군의 모습을 보도했습니다. 이를 본 독일의 시민들은 독일 정착을 요구하는 파독 간호요원과 광부들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최태호 활동가에 따르면, 당시 독일 사람들에게는 어려움에 처한 개발도상국에서 온 노동자들을 도와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이 널리 퍼져 있어 파독 한인 노동자들을 돕는 독일인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독일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서명운동 등으로 요구한 끝에, 독일 정부로부터 파독 간호요원과 광부들이 독일에 정착할 수 있는 허가를 받습니다. 독일 정착 허가를 받은 이후에 이들은 독일 정부로부터 독일인들과 같은 수준의 복지 혜택을 적용받으며, 독일 사회에 안정적으로 적응해갔습니다.

이처럼 한인 파독 노동자들에게 온정을 베푼 독일 시민들도 있었지만, 한국의 가난과 독재를 이유로 한인들을 무시하는 독일인들도 있었습니다. 독일에 정착하도록 도와준 독일인들의 시민의식과 독일의 발전된 사회복지제도, 그리고 가난과 독재에 대해 일부 독일인들로부터 받던 무시, 이 두 가지 상반된 경험은 어두운 한국 사회의 현실을 극복하는 자신의 역할을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일터와 교회 등에서 한인들과 교류하던 최태호 활동가는 한인 약 30명과 함께 '한마음 조합'을 결성합니다. 협동 조합에 대한 지원 체계가 잘 잡혀있던 독일에서 다양한 협동 조합 운영을 보며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한마음 조합에서는 농산물과 한국 음식을 팔아 수익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얻은 수익 중 일부를 한국의 노동운동에 후원했습니다. 최태호 활동가에 따르면, 이를 통해 조합원들은 큰 보람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후 최태호 활동가는 함께 협동조합 활동을 하던 이들과 한국의 전통 문화를 배우고 알리는 사단법인 '민중문화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이 모임에서 전통 문화를 배우며 한국의 민주주의, 노동 탄압 현실에 대해 고민하며 현실 극복을 위한 자신들의 역할을 찾아 활동했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재독 NRW 모임 ⓒ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재독 NRW 모임

 
이처럼 오랜 시간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노동 현실 개선을 위해 노력한 이들은 지난 두 차례 보수정권 기간 동안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와 노동 현실이 후퇴하는 상황을 보며 큰 상실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중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고, 이를 보고 분노한 지역의 한인 종교인과 지금은 퇴직한 파독 광부, 간호사들은 희생자 가족들과 슬픔을 나누고자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재독 NRW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처음 이 모임을 만들었을 때, 이 참사를 진상규명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지금까지 이들의 활동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최태호 활동가는 세월호 참사 기억을 의미하는 노란리본 배지를 달고 다니면, 가끔 세월호 참사에 대해 혐오적 발언을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고 합니다. 간혹 얼굴을 붉히며 논쟁을 하기도 합니다. 지난 시절 우리 사회는 지역을 이유로 분열되고, 이념을 이유로 분열됐습니다. 분열의 상처와 아픔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경험한 최태호 활동가는 세월호 참사를 두고 우리 사회가 다시 분열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습니다.

최태호 활동가는 세월호 참사 이후 '더 이상 한국 사회를 믿고 살 수 없다'며 독일로 이주해 온 여러 한인 가족들을 만났습니다. 이처럼 세월호 사고는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준 참사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참사 직후 가진 세월호 참사에 대한 수많은 의문이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으며, 이 때문에 우리 사회는 세월호 참사로 얻은 교훈을 우리 일상에 적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최태호 활동가를 비롯한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재독 NRW 모임'의 구성원들은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요구하는 활동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재독 NRW 모임에 방문한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 ⓒ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재독 NRW 모임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을 부탁하자 최태호 활동가는 다음과 같이 담담히 얘기했습니다. 젊은 시절 머나먼 독일에 와 고향을 그리며, 때론 수모를 견디면서도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내 나라, 고향에 대한 애정' 이었습니다. 이러한 고향에 대한 애정은 한국에서 잘못된 일, 한심한 일이 벌어질 때 최태호 활동가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고 누구보다 앞장서 개선을 요구해왔습니다. 앞으로도 그는 한국 사회가 '누구나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될 때까지 자신의 역할을 다하겠다고 하며, 젊은 세대들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민과 동참을 당부했습니다.

젊은 시절 우리 사회 민주화를 위한 투쟁으로부터 현재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활동까지,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재독 NRW 모임' 활동가들은 약 40여년의 시간 동안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회적 책임을 다하며 살아왔습니다. 이 역사는 다른 지역의 활동가들에게 훌륭한 귀감이 되어 '길잡이'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 길을 만들고 다음 세대에게 길을 열어주고 있는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재독 NRW 모임'의 구성원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보냅니다.
#최태호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재독 NRW 모임 #S.P.RING세계시민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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