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용균 님을 추모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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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라(enesco)등록 2018.12.15 16:20
스물 넷 아까운 청춘이 또 스러졌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석탄설비작업을 하던 김용균 씨가 사망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에게는 첫 직장으로 시급한 가난을 면하려고 불가피하게 선택한 업종이었다고 한다.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세상에는 죽어 마땅한 극악무도한 인피면구의 흉악한 범죄자들도 많은데 앞길이 구만리인 꽃 같은 청춘을 왜 거두어 가시는지 비통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공장은 여전히 쉼 없이 돌아가고, 원청과 하청업체간은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정치권은 무얼 할까? 생색내기용 조문과 민심을 겨냥한 재발방지용 법안을 올린다고 떠들어댄다. 잘들 한다. 언제는 안 그랬나?
 
이 조문(弔文)을 작성 중인 필자도 고인에게는 부끄럽지만, 보일러가 돌아가는 따뜻한 실내의 책상에 편안하게 앉아 쓰고 있다.
그가 발전소에서 날마다 사투를 벌여 왔다는 석탄은 석유나 가스 같은 화석연료로 뿌리는 같다. 이것은 밤하늘의 별보다 많은 무수한 식물이 수억 년의 유구한 세월에 걸쳐 화석화된 채 지하에 형성된 것이다. 특히 석탄은 적어도 6억 5천만 년 전에 살던 식물이 수백만 년 동안 죽어서 켜켜이 쌓였다가 고온, 고압의 영향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검은 돌처럼 무산소 분해되어 변형된 것이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안락한 문명의 혜택은 고인처럼 열악하고 힘든 환경에도 묵묵히 헌신하다가 자신을 희생한 분들의 소신공양 덕택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오늘날 미세먼지와 심각한 대기오염 등은 그 혜택을 너무 과용해서 생긴 사회적 병폐라고 해도 절대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언젠가부터 '나만 아니면 돼.'라는 웃픈 병폐가 번지고 있다.
사람들이 불행한 일을 겪거나 심지어 죽음을 당하더라도 자신과 직접 관련이 없으니까 그냥 외면하고 무심히 흘려버린다. 그리고도 인심이 메마른 팍팍한 세상살이 탓을 한다.
시골에서 여관을 운영하는 모녀가 있었다. 겉으로는 고상한 체했지만, 돈이 많을 것 같은 손님이 투숙하면 수면제를 탄 음료수로 잠을 재운 뒤에 몰래 살해하고는 금품을 가로채는 못된 살인강도였다. 어느 날 부유한 중년신사가 여관에 투숙하는데 그 역시 모녀의 마수로부터 어김없이 죽임을 당한다. 하지만 그는 어릴 때 고향을 떠났던 모녀의 아들이자 오빠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고, 천륜을 져버린 노파는 결국 죄책감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알베르 카뮈의 '오해'라는 연극의 내용이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살인강도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아들은 과거의 탕아에서 중년신사로 변모해 모녀를 기쁘게, 또 놀라게 해 주고 싶었지만, 바람과는 달리 가장 사랑하는 가족에게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이 짧은 단편은 카뮈의 부조리 문학의 정수를 이룬다.
 
이처럼 우리는 전부 타인일 것 같지만, 알게 모르게 세상 모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다른 사람의 불행과 어려움을 목격한다면, 마땅히 도와줄 줄 알아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마지막 남은 따뜻한 인간애마저 무한경쟁, 고도자본주의체제에 굴복 당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가슴 속에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아담 스미스는 '도덕 감정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고 해도 그 천성에는 이와 상반되는 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것으로 인해 사람은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즐거움 밖에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행복을 필요로 한다. 연민과 동정심이 이런 종류의 천성에 속한다. 이것은 타인의 고통을 보거나 또는 그것을 아주 생생하게 느낄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종류다.
 
고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면서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수많은 분들에게도 경의를 드린다. 그리고 역시 남 못지않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필자와 세상의 모든 선량한 분들에게도 심심한 응원과 용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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