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 문제의 핵심 꿰뚫은 한마디

홈리스 정책의 선도국, 핀란드를 가다

등록 2018.12.21 16:54수정 2018.12.21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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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국가 중 홈리스 인구가 감소하는 유일한 나라가 핀란드다 ⓒ FEANTSA

 
추운 겨울이다. 서울역 앞을 지날 때마다, 길 위에서 햇볕을 쬐는 노숙인 수가 적어지는 것이 보인다. 바로 옆에, 샤워 시설까지 갖췄다는 노숙인 쉼터가 있지만, 자유와 햇살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집이 없어 방랑하는 그들이 쉼터를 거부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

조지 오웰이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이란 책을 낸 것이 1933년이니, 벌써 85년이 지났다. 그런데 이 책이 지적하는 노숙인 지원 제도의 문제점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여성 노숙인에 대한 별다른 대책이 없는 것도, 아침에 쉼터를 나와야 하는 문제도 그대로 아닌가?

홈리스와 노숙인의 경계는 불분명하지만, 문제의 출발점은 같다. 바로 집이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거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을 홈리스, 그 결과 거리를 떠돌게 되면 노숙인이라고 부르면 될 것 같지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노숙인을 영어로 번역하면 홈리스다.

우리나라에 노숙인이란 개념이 홈리스란 말보다 먼저 있는 배경에는 유교 문화가 있을 것이다. 직계가족이 거두지 못하더라도, 씨족 공동체가 거두면 되는 것이므로, 집이 없다고 곧바로 거리에 나앉게 되지는 않는다. 예전의 노숙인이란 걸인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내 개인적인 경험을 보더라도, 나는 1992년 배낭여행으로 방문한 유럽에서 노숙인을 처음 보았다. 그 '이국적인' 문화가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갑자기 한국에도 들이닥친 것이다.

핀란드의 노숙인 정책

 

오로라 하우스의 관리를 돕는 토마스 씨. 웃는 모습에서 밝은 미래가 보인다. ⓒ 이용준

 
핀란드는 홈리스를 가장 넓게 정의한다. 스스로 거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다 홈리스다. 그런데 그들이 거리에 나와 눕도록 방치하지 않는다. 바로 '집 먼저(Housing First)'라는 정책 때문이다. 이 정책을 총괄하는 것은 정부 기관이 아니라 Y-재단이라는 독립 단체다. Y는 핀란드어 Yksinainen의 이니셜로, '외로운'이란 뜻이다. 노숙인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이름이다.

Y-재단은 1985년 설립되었다. 핀란드 정신건강협회, 적십자사, 전국성직자이사회, 건설회사연합, 건설노조, 지자체협의회, 그리고 헬싱키 등 5대 지자체가 설립 멤버다. 재단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약 17,000개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으며, 이를 홈리스에게 저렴한 월세로 임대한다.

재단의 적극적인 활동에 힘입어, 핀란드의 노숙인 숫자는 1987년 17,000여 명에서 2017년 6,800여 명으로 크게 감소했다. 홈리스 문제 해결을 위한 EU 국가 간 연합체인 FEANTSA에 따르면, 핀란드는 EU 내에서 노숙인 숫자가 감소 중인 유일한 나라다. 노르웨이도 감소 중이기는 하지만, EU 국가가 아니라서 핀란드가 'EU 유일'이라는 수식어를 갖게 됐다.
 
Y-재단 관계자에 따르면, 노숙인 통계에 있어 EU 국가들이 통일된 기준을 따르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노숙인의 정의를 변경해서 노숙인 통계를 줄이려는 시도도 있을 법하다. 그런데 핀란드는 정반대로 행동한다. 핀란드가 정의하는 노숙인은 가장 광범위한 홈리스를 포괄한다. 잠시 친척 또는 친구의 집에 기거하는 경우까지도 노숙인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2017년 통계에 따르면, 전체 노숙인 6,800여 명 중 친척 또는 친구의 집에 기거하는 경우가 84%에 이른다. 이들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대부분 국가에서는 노숙인으로 집계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집계한다면, 핀란드 노숙인 인구는 천 명도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Y-재단은 어떤 자금으로 노숙인들에게 주택을 제공할까? 재단이 제공하는 주택은 소위 '사회주택(Social Housing)'으로, 일반적인 주택에 비해 월세가 20~30% 정도 저렴하다. 그래도 공짜는 아니므로, 헬싱키를 비롯한 선호 거주 지역에 17,000여 채의 아파트를 보유한 Y-재단의 가장 중요한 재원은 당연히 월세 수입이다. 일반 임대보다 20~30% 저렴하게 주택을 공급해야 하므로 운영 자금이 모자랄 수밖에 없는데, 이 부분은 정부 또는 은행권의 대출, 그리고 복지건강재원(STEA)의 지원을 통해 해결한다.

복지건강재원은 경마, 카지노, 슬롯머신 등 사행성 게임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거둬들여 사회복지 및 공중보건 자금으로 제공하는 보건복지부 산하 단체다. 이전에는 게임의 종류에 따라 3개의 다른 단체가 운영 중이었는데, 사회복지 정책의 효율적인 지원을 위해 최근에 통합했다.

오로라 하우스 사람들

 

로페 씨 방 벽에 걸린 오래된 흑백 사진. 가운데 안경 쓴 사람이 로페 씨다. ⓒ 이용준

 
노숙인들에게 지원되는 주택은 실제로 어떤 모습일까? Y-재단에서 소유한 사회주택의 하나인 '오로라 하우스'를 방문했다. 소유 주체는 Y-재단이지만, 운영은 헬싱키간호단(Helsinki Deaconess Institute)에서 한다. 도심의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한 것은 물론이고, 근처 대학교의 학생 식당이 건물 지하에 자리 잡고 있어, 거주민들이 자연스럽게 지역민들과 어울릴 수 있게 되어 있다.

오로라 하우스에서 지내려면 따라야 하는 규칙이 있느냐고 물었다. 규칙은 단 하나, 일주일에 한 번 사회복지사(social worker)와 면담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그런 면담 자리에서 사회복지사가 음주나 마약 복용에 대해 조언하지 않느냐고, 그래서 그런 잔소리가 듣기 싫어 사회주택에 입주하지 않으려는 노숙인이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염려는 전혀 없다고, 핼리 단장이 대답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면담은 고충을 듣기 위해서이고, 무엇보다 입주민의 외로움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대화하고 싶은 주제는 입주민이 정한다.

정책은 그렇게 정해도, 실제로 노숙인들을 상담하다 보면 약물이나 알코올 남용에 대해서 조언하지 않게 되겠냐고 재차 의문을 표시하자, 핼리 단장은 웃으면서 말했다. 노숙인 문제의 핵심을 꿰뚫는 한마디였다.

"사람들은 노숙인 문제가 음주나 약물 남용에 기인한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사실은 그냥 살 집이 없는 것, 그 자체가 문제일 뿐이랍니다."

오로라 하우스는 총 8층 건물로, 예전에는 호텔로 쓰이던 건물을 Y-재단에서 구입하여 아파트로 개조한 것이다. 현재 총 123명의 세입자가 거주 중인데, 대개 독신이지만 커플도 일부 있다. 물론 커플의 경우에는 방 2개짜리 아파트가 배정된다.

123명의 거주민을 지원하기 위해 총 37명의 직원이 근무 중인데, 이것은 홈리스 거주민 1인당 0.3명의 지원 인력을 갖추도록 한 헬싱키시 정책에 따른 것이다. 37명 중에는 거주민들의 보건 지원을 총괄하는 정식 간호사가 1명 있으며, 간호조무사(PN)는 10여 명이 근무 중이다.

월세는 약 600유로 남짓하다고 한다. 기초생활보호제도에 따른 월 지원금이 얼마냐고 물어보았더니, 470유로라고 한다. 그 돈으로 어떻게 집세를 내냐고 물었더니, 470유로는 순수 생활비라고 한다. 집세와 기본적인 경비를 지불하고 나서, 순수 생활비로 470유로가 수중에 남도록 지원이 제공되는 것이다. 월세 낼 돈이 모자라면 당연히 보조금이 나온다고 한다. 470유로는 식비와 교통, 통신, 그리고 여가생활을 위한 경비가 되는 셈이다. 우리도 이런 제도를 도입하자고 하면, 포털에 어떤 댓글이 달릴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공동 부엌에서 늦은 아침 식사를 하던 요코 씨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홈리스 16년 차인 그는 부인과 함께 오로라 하우스에 거주 중이라 한다. 모든 아파트가 개별 부엌과 욕실을 갖추고 있지만, 사람들과 어울리며 식사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층마다 중간에 마련되어 있는 공동 부엌에서 아침을 즐긴다.

30세로 젊은 축에 속하는 토마스 씨는 오로라 하우스에서 관리 일을 돕고 있다. 이사와 청소를 돕고, 문지기 일을 하면서 약간의 부수입을 얻는다. 사회 재진입에 필요한 경험은 덤이다. 상의, 하의와 모자가 모두 검은 색이라서 혹시 유니폼이냐고 물었더니, 그냥 일하기 좋은 편한 옷을 입었다고 한다. 알코올 중독 문제를 가지고 있는 그였지만,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면담 시간에 따로 음주 관련 상담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스스로 자제하면서 음주량을 줄일 계획이라고.

첫 직장에 다니면서 3개월간 월세를 연체하고 홈리스가 되었다는 토마스 씨. 일단 신용불량자가 되면 주택 임차도 어렵고 직장을 구하는 과정에서도 페널티를 받게 된다는 그의 말을 들으니, 복지 선진국 핀란드에까지 침투한 신자유주의 물결이 새삼 매섭게 느껴졌다. 웃는 모습이 멋진 그가 앞으로는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잘 살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다같이 기념 사진을 찍었다. 로페 씨가 누구인지는 척 봐도 아시겠죠? ⓒ 이용준

 
오로라 하우스에서 가장 인상 깊은 만남은 74세의 최고령자, 로페 씨였다. 로페 씨는 홈리스 19년 차로, 거리에서도 시설에서도 오랜 시간을 보냈으며, 2010년 '집 먼저' 정책이 개시되었을 때 가장 먼저 주택을 배정받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선박 하역, 샌드블래스팅(sand blasting)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한 그야말로 핀란드 홈리스 역사의 산 증인이다. 다리가 불편한데도 걷기 보조기구에 의지해 공동 부엌으로 나와 우리를 맞아준 그는 홈리스 권익 신장을 위한 운동에도 적극 참여한다고 한다. 신문은 물론이고 TV 방송에도 벌써 몇 차례나 출연했다고. '집 먼저' 정책, 그리고 오로라 하우스의 상징과도 같은 그다.

로페 씨는 스스럼없이 자신의 방을 구경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8층에 위치한 그의 스튜디오는 작은 크기지만 부엌, 욕실은 물론 식탁을 놓을 공간까지 갖춰져 있어 편안하고 아늑해 보였다. 창밖에는 길 건너편의 작은 공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헬싱키 시내 한복판에, 이렇게 좋은 전망을 가진 아파트가 사회주택이라니.

로페 씨는 55년 전에 친구들과 찍은 흑백 사진을 벽에 장식해 놓고 있었다. 사진을 함께 찍은 친구들과는 아직도 연락을 하고 지낸다고 한다. 과연, 노숙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물질적인 지원보다 정신적인 유대다. 12월을 맞아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가 방안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 옆에 서서 사진을 위해 포즈를 잡아준 로페 씨.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로 웃는 모습은 마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같다.
#노숙인 #홈리스 #핀란드 #오로라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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