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제주 곳곳에는 4.3의 이야기가

제주, 동백꽃을 피우다... 각자의 방식으로 이어가는 기억, 추모, 변화

등록 2018.12.22 12:02수정 2018.12.23 12:12
0

제주 알오름을 걸으며 ⓒ 평화교육연구회


추운 겨울 인고의 시간 속에서도 기다림으로 붉은 사랑의 꽃을 피우는 동백! 늦가을의 쌀쌀함과 함께 우수가 짙어지던 11월 24일~25일, 제주의 땅 곳곳에는 올해도 어김없이 색색의 동백이 하나둘 피기 시작하고 있었다.

제주4‧3 70주년을 기념하며 교사, 학예사, 출판사 관계자로 이루어진 '평화교육연구회'의 일원으로 다시 찾은 이번 여정은, 제주시민의 아픔을 기억하고 함께 하고자 마련됐다. 제주4‧3 평화기행팀(강은주‧최상돈)이 이끄는 길을 따라 걸으며 평화와 인권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공항 문을 나서며 <순이 삼촌>을 쓴 현기영 작가와 짧게 조우했다. 여느 때 제주에서 느꼈던 돌하르방과 야자수의 이국적인 풍경을 넘어 평화와 역사의 기운을 도전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하였다.
 

가수 최상돈의 해설로 4.3평화기념관을 둘러보았다 ⓒ 제주다크투어

  
평화의 바람을 타고 처음 들른 곳은 '4‧3평화공원'이었다. 제주시 봉개동에 위치한 4‧3평화공원은 4‧3 사건 당시의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공간이다. 공원 안에는 제주 4‧3의 역사를 담은 그릇 모양이 인상적이었던 평화기념관을 중심으로 위령제단, 위령탑, 봉안관 등이 위치하고 있었다. 제주 태생의 최상돈 선생님의 실제 경험에서 비롯한 자세하고 실감나는 설명과 함께, 4‧3의 역사를 발단에서부터 결말, 현재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번 여정에서 나는 "찬찬히 보고 듣고, 충분히 감동하기"에 초점을 두고, 사진기의 셔터를 누르기보다는 전시물 곳곳에 숨겨진 나름의 의미를 찾고자 주력하였다. 특히,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아무런 글씨 없이 드러누워 있는 기둥 모양의 백비는 마치 4‧3의 진실을 송두리째 새하얗게 덮어버린 것 같았다. 진실을 밖으로 알리지 못하고 아파한 사람들의 감정에 이입되어 가슴 먹먹함과 동시에 분노감을 느꼈다.

다랑쉬 동굴 재현 공간의 실제감은 그날의 참상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했는데, 이리는 총부리, 저리는 막다른 벽, 죽음의 두려움이 몰려와 나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며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제주 북촌 옴팡밭에 있는 순이삼촌 문학비를 둘러보며 ⓒ 평화교육연구회

  
여운은 뒤이어 찾은 선흘 곶자왈의 도틀굴에서 극대화되었다. 어른의 몸을 한껏 움츠렸을 때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땅굴에서 어린 것들의 생존을 걱정하며 경비하던 사람들의 처절한 모습을 떠올렸다. 최상돈 선생의 '애기동백꽃의 노래'와 동요 '고향땅'의 구슬픈 선율과 함께 곶자왈 곳곳에 깃든 처연한 기운이 모두 나에게로 다가오는 것 같아 온 몸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이튿날 답사는 처음보다는 한결 무뎌진 기분으로 시작되었다. 아침부터 '곶자왈 작은 학교' 초등학생 친구들의 왁자지껄함이 발걸음에 경쾌함을 더해주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수줍게 맞춰가던 오카리나 화음이 제주도의 아픔을 담은 진짜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일정은 무명천 진아영 할머니 삶터에서 섯알오름까지로 꾸려졌다.
 

진아영할머니 삶터를 방문한 곶자왈 작은학교 청소년들이 오카리나 연주를 들려주었다. ⓒ 제주다크투어

  
4.3의 상처를 평생 온몸에 간직하고 살다간 무명천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한 여성의 한평생의 한(恨)을 개인의 숙명으로 치부하고 은폐할 수 있을까, 잘못된 사회로부터 받은 개개인의 상처는 과연 누가, 어떻게 치유해 줄 수 있을까, 제주 사람들 저마다의 사연에 문제 의식을 가지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4.3 후유장애인이었던 진아영 할머니 삶터에서 ⓒ 제주다크투어

  
동알오름 일제군사유적들의 비극은 가까운 산방산의 신비한 광경에 대비되어 더욱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비탈길 곳곳에 남은 아픈 역사의 흔적을 보고, 답사팀 모두가 슬픈 마음을 따뜻한 한마디로 서로 어루만지며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다 보니 '평화 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모인 우리들의 '연대'가 깊어지고 넓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처럼, 제주4‧3 또한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서로 돕고 힘을 합친다면 조금은 더 수월하게 과거의 상처를 보듬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제주4‧3 70주년에 이른 지금이야말로, 제주를 넘어 한반도 전역에 평화를 위한 모두의 작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제주4.3 70주년 평화기행에 참가한 '평화교육연구회' ⓒ 평화교육연구회

  
지난 5월 19일, 용인 포은아트홀에서 도립제주교향악단의 말러 교향곡 5번 공연을 관람했었다. 검정색 옷을 입은 연주자들의 왼쪽 가슴에 붙은 빨강 동백의 코사지가 의도된 복선이었을까, 다소 무거운 분위기로 시작된 연주였지만 마지막 악장에서 환희를 맞이할 수 있었다.


"언젠가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말러의 말처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고, 제주 4‧3의 진실도 대한민국의 역사로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고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도립제주교향악단은 말러의 음악과 함께 추모 공연을 이어가고, 제주다크투어팀은 또 다른 이들에게 제주의 숨은 진실 찾기 여정을 인도하고, 교사인 나는 '4‧3 보드게임 꽃을 피워라' 교육 활동을 통해 '그 날'의 진상을 알리고 '그들의' 마음을 전달하고 있다.

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꾼다고, 모진 추위를 뚫고 결국 동백은 꽃을 피운다고, 제주 4.3의 아픔 또한 모두의 작은 노력으로 아름답게 승화되어 세상에 또 하나의 잔잔한 감동을 선물하길 기대해 본다.

[영상] 제주의 곳곳에는 4.3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4·3의 길.
그 땅의 촉감은 은폐된 과거의 더께를 들어내고,
그 땅의 바람은 외면당한 사실을 들려주고,
그 땅의 빛은 일깨운다.
그 땅에 어제처럼 오늘을 살고 싶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걸." - 박찬희

"역사를, 민중의 역사를 기억합시다." - 최상돈

산국 - 최상돈 

산국은 피고
당신은 가고 
돌아서다가 돌아보았네 
아아아 임이시여
아아아 임이여
산수국 핀 그 길에서 
당신을 그린다 

동백은 지고 
봄눈 녹는 날
살아만나자 약속하였네
아아아 독립이여
아아아 통일이여
동백꽃 진 그 자리에 
산국이 곱구나
(영상 05:36경 삽입)

평화교육연구회 '제주4·3 70주년 평화기행' 참가자 박종서 님이 제작해주신 영상입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신혜선은 나산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위 사업은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평화기행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제주다크투어'는 제주4·3 평화기행, 유적지 기록, 아시아 등 국가폭력 피해자들과의 국제연대 사업 등 제주 4·3 알리기에 주력하는 비영리 단체입니다.
[블로그 주소] blog.naver.com/jejudarktours
#제주43 #70주년 #평화기행 #평화교육 #평화교육연구회
댓글

'기억하고 싶은 길 - 제주다크투어’는 제주에 위치한 비영리 단체입니다. 제주다크투어는 여행 속에서 제주 4.3을 알리고 기억을 공유합니다. 제주를 찾는 국내외 사람들과 함께 제주 곳곳의 4.3 유적지를 방문하고 기록하며 알려나가는 작업을 합니다. 국경을 넘어 아시아 과거사 피해자들과도 연대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특혜 의심' 해병대 전 사단장, 사령관으로 영전하나
  2. 2 "윤 대통령, 달라지지 않을 것... 한동훈은 곧 돌아온다"
  3. 3 왜 유독 부산·경남 1위 예측 조사, 안 맞았나
  4. 4 '파란 점퍼' 바꿔 입은 정치인들의 '처참한' 성적표
  5. 5 창녀에서 루이15세의 여자가 된 여인... 끝은 잔혹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