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말투와 온화한 미소를 거절할 권리

등록 2018.12.26 15:43수정 2018.12.26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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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애가 중학교에 다닐 때다. 학교 운영위원회에서 학부모위원을 2년간 수행했다. 학교 운영위원회는 말 그대로 학교 운영 전반에 관해 심의를 거치도록 되어있는 안건들을 다룬다. 봉사직이긴 하지만 초중등교육법에 의거한 엄연한 법적 조직이다. 아무개 엄마를 벗고 000 학부모 위원으로서다. 선출된 학부모 운영위원은 학부모의 의견을 수렴해 학교 운영에 반영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대표로 나선 자리인 만큼 몸과 마음도 공적으로 하도록 노력했다. 공식 회의석상이니 언행도 그에 걸맞게, 주로는 '-습니다'와 '-까' 어미를 사용하고 느슨한 표정은 삼갔다. 그런 내가 왜 거슬렸을까. 한 위원이 이런 지적을 했다. "말투가 딱딱하고 표정이 굳어있어서 너무 불편하네요." 회의를 진행할 수 없게 몽니를 부린 것도 아닌데, 구성원의 말투와 표정까지 지적하는 이런 무례한 권리는 대체 누가 허락했단 말인가.

불편하기로 치자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교장 교감선생님께 대한 위원들의 과도한 공대, 맡은 일을 했을 뿐인 교사에 대한 끝없는 칭송, 상정된 안건을 무조건 학교 편리 위주로 접근하는 비합리적 태도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불편했다. 게다 교장과 교감이 공공연한 회의석상에서 위원을 위원이라 부르지 않고, '아무개 어머님'이라 명명해 버림으로써, 공인 '아무개 위원'을 소거시켜 버리는 것 또한 몹시 불쾌했다. '아무개 엄마'임을 지속해서 주입하는 의도는 무엇일까.

이윽고 다른 위원까지 가세해, '-습니다'와 '-까'는 군인 말투인데 혹시 군인 출신이냐며 조롱했다. 시쳇말로 멘탈이 털리는 순간이었다. '-습니다'와 '-까'가 군인 전용이라는 말은 태어나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여성인 내가, 남성인 군인의 말투를 쓴 것이 그들의 비위를 건드렸단 말이었다. 게다가 어머니라면 모름지기 온화하고 인자한 표정이어야 하는데, 그 전범을 내가 위배해 더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여성인 나는, 공적인 자리에서 남성의 전유물인 '-습니다'와 '-까'의 말투 그리고 근엄한 표정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 규범을 강요받은 순간이었다. '여성다운 말투와 표정'이란 대체 무엇이며, 누가 정한 것인가.

지난해 투표 개표 과정을 생중계하던 장면이다. 남성 진행자는 사뭇 진지한 표정인데, 여성 진행자는 줄곧 생글생글 미소를 띠며 진행하고 있었다. 투표 개표라는 똑같은 상황에서, 왜 여성 진행자는 입가가 쥐가 나도록 지속적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을까. 사실 투표 진행은 희비가 엇갈리는 현장이기에, 그렇게 생글대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 남성과 똑같이 엄숙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시종일관 생글대는 것도 괴이하지 않은가. 그 여성 진행자는 단언컨대, 여성은 어떤 자리에서건 꽃처럼 화사해야 한다는 젠더 규범을 요구받았을 것이다. 여성은 노소 불문 누구든지, 어디에서건, 부드러운 표정에 미소를 띠라고 누가 정했는가. 여성 아나운서도 운영위원회에서의 나도 꽃이 되고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젠더 규범에 어긋나 눈 밖에 난 나는, 상정된 안건의 비합리적 면을 지적할라 치면, 종종 차단당했다. 같은 지점의 비합리성을 지적하고 있어도 남성 위원의 발언은 '의견'이 되고 내 발언은 '불평'이 됐다. 유별난 '맨스 플레인'까지 등장하면 회의는 궤도를 이탈하고 말았다. 이런 차별과 소외 속에서도 2년간 운영위원을 수행한 이유는 '학교 민주주의'에 기여하겠다는 소신 때문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공연히 진을 뺏나 허무하기도 하다.

'학교 민주주의가 교문 앞에서 멈춘다'는 것은 학생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학생은 학교의 주인이라면서, 실상 아무 권리도 주지 않는 현실에, 가장 많이 기만당하는 것은 학생이다. 그러나 학부모, 특히 엄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런저런 일손이 필요할 때, 학교 주변 순찰이나 교통정리, 도서관 대출 사서, 시험 감독, 급식 모니터링 등 봉사라는 미명으로 무시로 무보수로 호출된다. 전업주부 엄마가 이 중 어떤 임무도 맡지 않으면 따가운 눈총을 받는다. 작장 다니는 엄마들의 고충 또한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학부모 아빠 중 이런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 있을까. 아빠가 어쩌다 학교 활동에 참여하기라도 하면, 대번 깨어있는 민주 시민 아빠로 등극하는 희극이 연출되기도 한다.

이런저런 학교의 필요로 엄마를 불러낼 때는 '좋은' 어머니로 대접받는다. 하지만 엄마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뭘 좀 해보겠다고 나서면, '마땅치 않은' 어머니가 된다. 학교 업무와는 상관없으니 지원은 기대도 못한다. 어머니는 오직 학교의 필요나 요구에 응답할 때만, 온전한 성원권을 받는다. 딸애 중학교까지 9년 동안 수많은 교사를 만나 봤다. 그간 '마땅치 않은' 엄마들의 자발성에 지지를 보내준 교사는 딱 두 분이었다.

전쟁에 나갈 용감한 전사를 키우는데 광분했던 일제는, 그 선봉에 어머니를 세운다. 아들을 낳고 키우는 일이 국가에 전사를 헌납하는 고귀한 일로 둔갑된다. 조선이라고 예외였겠는가? 해방 후에도 미 군정기 부녀국은 여성의 권익엔 아랑곳 하지 않고, 오직 '현모양처'라는 기치 아래 여성을 가두었다. 전후 남성의 실추된 젠더 권력을 회수하는 유일한 방법은, 여성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작전이었고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여성을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에 유폐시키고, 오로지 '희생과 헌신의 어머니 되기'를 국가적으로 규율했다. '어머니'가 되어서야 겨우 성원권을 부여받았던 질곡의 유래는 이리도 유구하다.

상냥한 말투 다감한 표정의 여성성으로 더 많은 자원을 확보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한마디로 여성성을 활용하면 일을 더 쉽게 풀 수도 있다는 뜻이다. 진보주의자 연하는 어떤 이는, 여성성은 전략적으로 필요하다, 여성성을 살려 더 많은 효과를 보라고, 옆구리를 찌르며 충고하기도 한다. 실상 여성성이 없다고 질타당할 때, 위축되지 않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다.

여성성 자체를 나무라는 것이 아니다. 타고난 혹은 연마한 여성성을 탑재하고 전략적 교두보를 확보한다고 치자. 여성성이라는 위장으로 상대를 안심시키거나 속이면서까지 얻어야 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위장'이라는 전술은 철저히 약자의 방식이다. 포식자들은 '위장'이란 전술을 쓸 필요가 없지 않은가. 또한 천부적이거나 후천적이거나 여성성을 표출하는 자체가 가능하지 않은 여성의 경우, 부드러운 말투, 온화한 표정의 획일화된 여성성으로 위장하라는 충고는 폭력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남성은 균질화된 태도를 취하라고 요구받지도 지적받지도 않는다. 그런데 왜, 여성에게만 태도를 규범화하도록 허용하는 걸까. '전략화된 여성성'이 차용될 때, 여성 개인의 고유함은 '여자답지 못하다'로 물리쳐질 것이다. 이것이 성 평등한 사회의 모습일까.

학교 미투가 터져 나올 때 이런 생각을 해봤다. 학부모, 특히 '엄마 미투'는 없어서 없는 걸까. 내가 알고 있는 것만도 몇 건이니, 그럴 리는 없다. 하지만 할 수 없을 것이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아이가 인질이기 때문이다. '아무개 엄마의 미투'가 당 여성만이 아닌, 그 아이에게 미칠 파장을 생각해보라. 학교에 이런저런 문제 제기를 꺼리는 것도 인질이 된 아이의 안위를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관행적으로 요구받는 젠더 규범이 여성 교사라고 비껴가겠는가. <'꼴찌' 전교조 페미 후보의 파티..."조직 새로고침 필요">(한겨레 2018년 12월 15일 자) 인터뷰 기사는 그 실체를 말해 주고 있다. 진보건 보수건 어느 조직에서건, 늘 남성 리더를 '엄마처럼, 아내처럼' 보좌하라는 암묵적 규범에 여성 구성원들은 놓여 있다. 젠더 규범이 성폭력으로 이어지는 고리임은 명백하다. 그 규범의 부정의함을 알고도 계속 좇는 것은, 여성 스스로 족쇄를 채우는 것과 같다. 학교 교실에서도, 운동장에서도, 교무실, 회의실에서도, 그 누구도 여자답게, 남자답게 행동하라고 감히 발설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학교 민주주의도 시작된다고 두 페미 후보는 통감한다. 이심전심이다. 비록 미약한 움직임일지라도, 젠더 불평등에 균열을 내는 시작이 된다고 믿는다.

엄마들이 뿔나서 모인 '정치하는 엄마들'에 ('엄마들'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기대가 크다. 엄마로 사는 일은 여성에게 가장 절박한 시간이기에, 엄마들의 보육, 육아, 교육에 대한 요구와 발언은 그 자체로, 억압된 여성의 해방과 무관하지 않기에 그렇다. '유치원 3법'으로 발동 걸린 뿔난 엄마들의 행보는 용감하다. 엄마여야만 대접받는 고리타분한 모성 이데올로기를 걷어차고, '사회적 모성'으로 뚜벅뚜벅 나아가기를 응원한다. 정작 문제는, 미적대는 국회의원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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