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상록수' 박동혁 실제 모델, 심훈 조카 아니다"

윤성의 심훈기념관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당진문학> 통해 의문 제기

등록 2018.12.26 14:07수정 2018.12.26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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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상록수>의 실제 모델로 알려져 왔던 충남 당진 공동경작회 회원들(1937년 6월 촬영) ⓒ 심규상

 
심훈의 대표작 소설 <상록수>의 남 주인공은 박동혁이다. 그동안 박동혁은 심훈의 조카인 심재영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상록수> 속 박동혁이 실제 모델이 아니라는 주장이 나와 주목된다. 앞서 '심재영 모델론'에 대한 의문 제기는 있었지만 구체적 논거를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상록수>는 진취적인 박동혁이 채영신과 사랑을 나누면서 헌신적으로 농촌운동을 벌이며 민족의식과 저항정신을 보여주는 계몽적 농민소설이다. 박동혁은 경성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하라는 부모의 권유를 뿌리치고 농촌운동에 투신한 심훈의 조카 심재영을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채영신은 농촌계몽을 위해 순교자적 활동을 한 여성으로 평가받는, 감리교 전도사이자 농촌 운동가인 '최용신(1909~1935)'을 모델로 했다.

그런데 윤성의 심훈기념관 운영위원회 부위원장(당진문협 고문)이 최근 발간한 <당진문학> 제17호에 수록한 글(소설 '상록수'와 공동경작회)을 통해 "심재영의 농촌계몽 활동이 <상록수> 속 박동혁의 행적과 활동과 맞지 않다"며 "박동혁의 실제 모델이 심훈의 조카인 심재영이 아닐 수 있다"고 주장했다.

농민운동 위해 홀로 낙향? "처음 한 일은 할아버지 도움으로 대저택 짓기"

그는 우선 심재영(1912~1995)의 '농민운동을 위해 단신으로 낙향했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심재영은 1930년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당진으로 내려왔는데 그가 처음 한 일이 할아버지 뜻에 따라 대저택(45평 기와집)을 직접 지은 일이었다"며 "당시 농촌주택 대부분이 초가 3칸인 때에 내려오자마자 대저택부터 지은 것은 농촌운동을 위해 단신으로 내려왔다는 말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 고택에는 현재 심재영의 아들이 생활하고 있다.

심재영은 생전 자신이 쓴 글(사랑하는 나의 마을에 서서)에서 '당진에 내려와 증조부가 짓다가 만 문도 없는 초막에 포장을 치고 자취를 하며 약간의 산과 벌판을 개간하였다, 증조모께서 베등거리며 잠방이를 지어주셔 처음으로 입었을 때는 나도 이제 진짜 농군이 되었구나 하는 마음에 기뻤다'고 썼다.

이에 대해 윤 부위원장은 "(심재영의) 증조부는 1916년, 증조모는 1921년 각각 돌아가셨다"며 "14년 전 돌아가신 증조부가 짓다 만 초막에서 자취를 하고, 9년 전 돌아가신 증조모가 잠방이를 지어주셨다는 얘기가 된다"며 황당해 했다.
 

필경사(위)와 심훈 문학관. 필경사 왼쪽에 심훈의 묘가 있다. ⓒ 심규상

 
백승구는 <심훈의 재발견>에서 심재영에 대해 '19세가 되던 1930년에 당진으로 내려왔다가 뒤따라 내려온 할아버지와 합류한 후 새집을 크게 짓고 할아버지와 여유 있는 지주생활을 했다'고 썼다. 윤 부위원장이 기록을 통해 확인한 1948년 심재영 가의 소유토지는 밭 1200평(자작), 논 900평(자작),소작 1만 5000평으로 당진 부곡리에서 세 번째로 많은 대지주였다.

윤 부위원장은 "상록수 박동혁의 모델임을 내세우기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사실과 다르게 단신으로 내려와 초막에서 생활했다고 쓴게 아니었을까"하는 의문을 제기했다.

"소설 속 '농우회'와 '진흥회'는 갈등관계...심재영 공동경작회 활동 진흥회와 비슷"

윤 부위원장은 또 심재영의 활동한 공동경작회와 상록수 속 박동혁이 활동한 농우회의 성격이 사뭇 다르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소설 속 박동혁이 주도해 이끌어가는 지역 청년들의 자주적인 조직은 '농우회'다. 반면 조선총독부 주도 아래 조직된 관변조직은 '진흥회'다. 소설 속에서도 '농우회'와 '진흥회'는 갈등관계에 있는 단체로 진흥회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윤 부위원장은 "심재영이 활동한 조직은 '공동경작회'로 주요사업으로 못자리 개량, 줄모심기, 생활개선 등을 열거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총독부가 주도한 농촌진흥자력갱생운동으로 진흥회 사업"이라며 "이는 공동경작회 고유사업으로 보기 어렵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는 실제 심재영이 작성한 자료를 보면 진흥회는 1932년, 공동경작회는 1934년 설립됐다"며 "또 진흥회 사업과 공동경작회 사업이 많이 겹친다"고 덧붙였다. 진흥회와 공동경작회의 관계가 긴밀하고 사업 내용마저 비슷하다는 문제제기다.

윤 부위원장은 "<상록수> 속 박동혁은 자주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데 반해, 심재영은 실용주의 노선을 지향했다고 볼 수 있다"며 "심훈의 농촌관·시국관이 심재영과 상반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상록수> 닮은 꼴 <영원의 미소> 탈고 시기 '공동경작회 설립 이전'

 

심훈 동상(당진 심훈기념관) ⓒ 심규상

 
그는 "심훈이 <상록수>에 앞서 1933년 '조선 중앙일보'에 연재한 소설 '영원의 미소'에는 <상록수>와 닮은꼴인 야학이야기가 나온다"며 "'영원의 미소'의 탈고 시기는 공동경작회가 설립되기 전인 1933년 1월 이전에 쓰인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그는 "심훈이 야학에 대한 글을 쓰면서 야학을 가르치는 젊은이들을 '조선의 영웅'들이라고 극찬했지만 공동경작회에 대한 이야기는 일언반구도 없다"며 "만약 공동경작회가 상록수에 나오는 농우회의 모델이라면 왜 농우회의 일부였던 야학은 칭찬하면서 공동경작회는 일체 언급조차 없을까"하는 의문을 덧붙였다.

공동경작회에 대해 언급하는 '심재영 모델론'에 의문을 제기한 이가 또 있다. 류양선 가톨릭대 명예교수는 지난 2001년 아주대 논문에 발표한 '상록수 모델론'에서 "공동경작회를 조직한 심훈의 조카 심재영은 박동혁의 모델로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이에 대한 세밀한 조사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류 교수는 당시 박동혁 모델론을 연구하기 위해 여러 차례 당진을 방문했었다.

윤 부위원장은 자신의 글 말미에 "송악읍 부곡리에 위치한 심재영 선생이 살던 가옥이 그가 직접 지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의 저서와 글들을 다시 검토하다 여러 의문이 들어 글을 쓰게 됐다"며 " 이 글에 언급된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반론이 제기돼 부디 심재영 선생을 박동혁의 모델로 여기며 그를 존경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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