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5분 전에 찾아온 손님... 만나서 다행이다

[상주작가의 서점에세이 6] 20대 청년 은산씨와 광웅씨

등록 2018.12.31 15:26수정 2018.12.31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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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부터 군산 한길문고 상주작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작가회의가 운영하는 '2018년 작가와 함께하는 작은서점 지원사업')가 되었습니다. 문학 코디네이터로 작은서점의 문학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작가와 독자가 만나는 자리를 만듭니다. 이 연재는 그 기록입니다. - 기자말
 

뭐라도 읽고 쓰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고민 상담소.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연다. 장소는 한길문고 ⓒ 배지영

  
'뭐라도 읽고 쓰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고민 상담소'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연다. 페이스북과 교차로, 그리고 독서모임 몇 곳에 상담소 개업 소식을 알렸다. 그런 다음에는 한길문고 한쪽에서 노트북을 켜고 앉아 있기. 누군가는 반드시 왔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와 비슷한 종류의 책을 추천해달라는 중학생, 은퇴 후에 책을 쓰고 싶다는 50대 후반 직장인, 고등학생 아들과 대화하기 위해서 책을 읽고 싶다는 전업주부, 달마다 소식지에 칼럼을 쓰고 있는 시민단체 대표가 찾아왔다.

"상담해요?"라고 묻는 사람이 아예 없던 날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등지고 앉은 서가에서 책을 고르고 돌아갔다. 할 수 없이 노트북 전원을 끄고 가방을 쌌다. 퇴근 5분 전이었다. 그때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한길문고 문지영 대표가 "좋은 책 많이 읽는 청년이야.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더라"면서 전화번호를 알려준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서점 왔는데요, 이 시간도 괜찮나요?"  

'칼퇴'를 할 것인가(야박하잖아). 상담소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것인가(연장근무 하잖아). 뜸 들이지 않고 말해야 하는 긴박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서점 상주작가라면, 책 읽겠다고 찾아온 젊은이를 환영하는 게 도리겠지. "오세요. 반가울 거예요." 나는 보통 때보다 조금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까 고등학교 남학생 두 명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아까 전화 통화했던..."이라고 말을 거는 게 아닌가. 헐! 소년의 얼굴을 한 청년들이었다(그날 밤 내 인스타그램에 두 사람 사진을 올렸더니 고등학생인 줄 알았다는 댓글이 네 개 달렸음).
 

은산씨와 광웅씨 칼퇴냐 연장근무냐. 두 사람은 퇴근 5분 전에 찾아왔다. ⓒ 배지영

  
공군 제대한 지 한 달쯤 된 김은산씨는 2019년 3월에 초등학교 교사 발령을 받는다고 했다. 나한테 전화를 걸었던 남궁광웅씨는 2019년 3월에 아빠가 된다고 했다.


"와이프가 아기 태어날 때까지 많이 놀라고 했어요. 근데 저는 책도 읽고 글도 잘 쓰고 싶어요. 독서모임도 만들어서 하고 있거든요."

삶의 토대를 다져가는 독서

1992년생인 두 사람은 군산고등학교 다닐 때에 만난 친구다. 고등학생 은산씨는 오전 7시 40분까지 등교해서 1시간씩 책을 읽었다. 장르를 따지지 않는 독서를 했다. 일본의 버블 경제나 부동산 전망에 대한 책도 재미있게 읽었다. 소설가 김훈이 쓴 <칼의 노래>, <현의 노래>, <화장>을 읽으면서 문체가 주는 아름다움에 빠졌다.

광웅씨는 그런 은산씨를 '언어 1등급', '언어의 마술사'라고 치켜세워주었다. 그러나 자신은 독서를 거의 하지 않고 10대 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다독가인 어머니가 건네던 말은 광웅씨가 스무 살 넘었을 때야 와 닿았다.

"어머니가 항상 저한테 책 좀 읽으라고 했어요. <리딩으로 리드하라>를 읽고는 <국가론>을 샀어요. 재미없어 하니까 어머니가 교육방송 특강을 추천해 주시더라고요. 활자 말고 영상으로 보니까 쉽고 재미있었어요. 강사들이 다 유명한 대학의 교수들이잖아요. '나는 그 대학 안 다녀서 강의 못 듣는데 잘 됐다' 싶었죠."

광웅씨는 철학을 시대 순으로 풀어주는 강의를 가장 재미있어 했다. 읽다 말았던 <국가론>을 다시 꺼내 읽었다. 마지막에 가서는 큰 충격을 받았단다. '이 답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그런 질문들을 던진 거였어?'

탄복한 광웅씨는 마음먹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때가 스물한 살이었다. 독서하다가 부닥치는 어려운 말들은 높은 허들처럼 보였다. 광웅씨는 팟캐스트를 듣고, 책모임에 나가면서 장애물들을 뛰어넘었다. 그러고 나니까 글도 잘 쓰고 싶어졌다.

"제 아이한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어요. 나중에 제가 없어도 같이 있는 기분이 들 수 있잖아요."
 

광웅씨는 자기 삶의 토대를 다져가고 있다. 독서는 그 중의 하나다. 퇴근하면 책을 읽는다. 아내도 광웅씨가 선물해준 책 <부모 공부>를 읽는다. 물론 젊고 예쁜 이 부부는 한 번 들여다보면 1~2시간을 훅 빼앗아가는 스마트폰한테도 곁을 주고 있다.

은산씨도 책만 읽는 젊은이는 아니다. 그가 복무한 공군은 6주에 한 번씩 휴가를 나올 수 있었다. 은산씨는 광웅씨를 비롯한 친구들을 만나서 알차게 놀다가 복귀했다. 지금도 게임을 더 좋아하지만 책을 끼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뚜렷하다.

"임용고시 합격하고 군대 가기 전에 3개월간 계약직 교사로 일했어요. 현장에 가보니까, 제가 꿈꾸던 교사랑 제 모습이 많이 다르더라고요. '어떤 교사가 좋은가.'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원래 책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알아야 할 게 많으니까 읽는 면도 있어요."

'뭐라도 읽고 쓰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고민상담소'를 열고 처음으로 한 연장근무. "만나서 반가웠어요"로 끝나면 안 될 것 같았다. 현실에서 만난 멋진 청년들을 나 혼자만 알고 지내기는 싫었다. 어떻게라도 연결고리를 찾아내고 싶었다.

책을 사랑하는 두 남자
 

나는 한길문고에서 에세이 쓰기와 북클럽을 진행하고 있다. 정원은 꽉 찼다. 그래도 메신저 단체채팅방에 물어봤다. 글도 잘 쓰고 싶고, 책도 꾸준히 읽는 이 청년들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회원들이 대환영 한다는 문자와 이모티콘을 실시간으로 달았다.

"어머니한테 물어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거든요."

<소년의 레시피>를 읽고 이야기하는 시간에 광웅씨는 말했다. 예비 부모들과 만나면 출산준비물에 대한 정보는 얻었지만 뭔가 빠진 것 같았다고 했다. 부모 경력 십 수 년째인 북클럽 회원들은 책 이야기를 하다가도 아기 아빠가 되는 광웅씨에게 삶의 지혜를 곁들여줬다.

은산씨는 에세이 쓰기 수업에 두 편의 글을 냈다.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 바다처럼 살지 못한다는 글과 "선생님, 맹인은 무슨 꿈을 꾸나요?"라고 초등학생이 물었을 때 교사로서 답을 찾아가는 글. 각자 써 온 글을 읽고 얘기하는 자리에서 은산씨는 이모나 부모님 연배의 회원들이 하는 말을 주로 듣고만 있었다.

"어른들 이야기에는 자녀 교육이 빠질 수가 없잖아요. 교사로서 '애들은 집에서 저렇게 생활하는 구나'를 배워요. 제가 심각하게 여기는 일을 아이들은 사소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고요."
 

김은산씨의 책꽂이 ⓒ 김은산

  
상주작가도 직장인. 연장근무 할 일은 생겼다. 전교생이 열한 명인 군산 내흥초등학교에서 한길문고에 온다고 하니까 쉬는 날(수요일)에 일부러 출근해서 만났다. 크리스마스라서 할 수 없었던 에세이 쓰기 수업도 휴일에 나가서 했다. 그러니 은산씨와 광웅씨를 따로 만날 때도 퇴근했다가 밤에 다시 서점으로 출근했다.

두 사람은 책 이외의 이야기를 더 많이 한다고 했다. 농대를 다녔고, '병역특례 후계농업인 산업기능요원'으로 복무한 광웅씨는 하고 싶은 게 많다. 팽이버섯 일을 하다가 지금은 굼벵이를 기른다. 마케팅을 잘하고 싶으니까 책 속에서도 길을 찾고 있다. 그 옆에서 은산씨는 '제갈량' 역할을 맡고 있다.

두 사람은 그 또래의 남자들 같지 않았다. 친구의 단점은 대머리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듯 잽싸게 붙잡아서 놀려먹지 않았다. 삶을 아름답게 꾸려가는 청년들의 이야기는 마치 여운이 남는 다큐멘터리 같았다. 그때 광웅씨가 웃으면서 말했다.

"(웃음) 제가 독서모임 만들었는데 은산이는 안 나왔어요. 모르는 사람들이랑 만나기 싫다고요."
 

2주 전에나 먹힐 공격이었다. 은산씨는 완전히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에세이 쓰기와 북클럽까지 하고 있다. 맞받아칠 자격은 충분하게 갖췄다.

"공군은 복무 기간이 길잖아요. 광웅이는 제 면회 한 번도 안 왔어요."

서로의 치부를 폭로한다고 한들, 두 사람이 갖고 있는 매력은 손톱만큼도 훼손되지 않았다. 20대 남성들은 출판시장에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는데 군산에는 은산씨와 광웅씨가 있다. 
 

군산 한길문고 에세이 쓰기 회원들. 은산씨와 광웅씨는 이모나 부모님 연배의 사람들 속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쓴다 ⓒ 배지영

#군산 한길문고 #작가와 함께하는 작은서점 지원사업 #20대 남성 독서 #김은산 남궁광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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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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