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악산에 뚫린 동굴... 누가 제주를 아프게 했나

[씨알소리의 근대문화유산 산책 9] 제주 송악산 해안 일제 동굴진지

등록 2019.01.05 14:10수정 2019.01.05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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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문화재는 지정문화재가 아닌 문화재 중 50년 이상이 지난 것으로서 보존과 활용을 위한 조치가 특별히 필요하여 등록한 문화재이다. 우리가 지금껏 살아왔던 그 삶의 현장이 이제 역사가 된 것이 근대문화유산이다. 현재의 우리를 있게 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한 근대문화유산의 자취를 찾아 나선다. 그곳에서 근대의 시간 속으로 산책하며 과거와 현재에 얽힌 이야기를 기사로 정리하여 남기고자 한다. - 기자 말

[제주 송악산 해안 일제 동굴진지]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313호
지정내역      일곽 면적 9,096㎡ 동굴 15기
지정(등록)일  2006년 12월 4일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194-2번지 및 지선 공유수면
시 대           일제강점기
 

제주 송악산 해안 ⓒ 박상준


 
산방산에서 송악산 쪽으로 가는 사계리 해안길은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길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절경이다. 숲길에서 나와 사계리 해안길에서 만나는 제주의 바다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탄성을 지르게 한다.

해안길의 끝자락에서 살짝 돌아드니 마치 화산 용암이 바다로 내달리다 멈춘 것 같은 웅장한 모습의 송악산 해안 절벽을 만난다. 절벽 위쪽으로 올라가면 얕은 오름과 둥그런 분지 모양이었는데 옆면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바다 쪽으로 뻗어 나가는 형상의 송악산 해안 바위 절벽이 눈길을 끈다. 화산지형 띠무늬가 마치 억겁의 세월로 새겨진 흔적인 양 보여 더욱 장관을 이룬다.

그런데 8년 전에 왔을 때도 보았을 이 풍광이 처음 본 듯 새롭다. 해안길이 끝나는 곳에 있는 선착장에는 마라도와 가파도로 떠나는 배가 있고, 그 배를 타러 가는 관광객들의 모습은 낯익다.

나도 그때는 마라도로 서둘러 가느라 다른 곳에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를 탄 후에야 송악산을 힐끔 보았고 그곳이 드라마 <대장금> 마지막 장면 촬영장이었다는 표지판을 본 것 같은 기억만 어렴풋이 날 뿐이다. 여행에서 돌아와 그때 찍은 사진을 보고서야 당시에 해안으로 내려가 동굴까지 산책하며 근처에서 사진을 찍은 기억을 떠올렸다.

주차장에서 해변 쪽으로 가면서 송악산을 쳐다보면 바위절벽 위로 뻗어 있는 나무들이 군인들의 짧은 스포츠머리를 연상시킨다. 소나무들이 있어 송악산이란 이름이 지어진 듯한데, 원래 이름은 '물결이 운다'는 뜻을 가진 '절울이오름'이었다고 한다. 파도가 절벽에 부딪쳐 울리는 울림이 얼마나 컸길래 그런 이름이 지어졌을까? 소나무가 있는 산이라는 '송악산'보다는 훨씬 더 이 일대의 풍광과 어울린다. 제주도와 어울리는 '절울이오름'이라는 이름을 다시 찾았으면 좋겠다.
 

드라마 '대장금' 촬영지임을 알리는 표지판 ⓒ 박상준

  

<대장금>이란 드라마가 방영된 후에는 마지막 장면을 촬영한 곳으로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많은 제주 여행기에도 이런 촬영 내용이 빠지지 않는다. 동굴진지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커다란 '대장금 촬영지' 간판이 서 있어 이곳의 상징처럼 보이기도 한다.

제주도에 남은 일제의 잔혹함

그러나 송악산 일제 동굴진지는 어두운 우리 역사의 시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곳은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제가 전쟁의 막바지인 1945년에 만든 군사시설이다. 일제는 '결7호(決七號) 작전'이라는 군사작전에 따라 일본 본토를 사수하기 위해 제주도를 최후의 방어기지로 삼았다. 자기영토를 지키기 위해 제주도를 희생양 삼았다는 것이다.

일제는 6~7만여 명의 군대를 제주도에 주둔시킬 정도로 총력을 기울였다. 이들이 주둔할 대규모 군사시설을 만들기 위해 제주 사람들에게 인적 물적 수탈을 강제하였다. 주민들을 강제 동원해 만든 이 시설물이 이제는 역설적으로 그들의 침략을 증언하고 있으며 죽음을 강요하는 전쟁의 잔혹함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1.제주 송악산 해안 일제 동굴진지 2.동굴진지의 내부 모습 ⓒ 1.박상준 2.문화재청

 

1.제주도 성산 일출봉 2.일출봉 일제 동굴진지 ⓒ 1.박상준 2.문화재청

 
일제강점기 말 패색이 짙어지자 일본으로 향하는 연합군 함대를 막기 위한 시설이었다. 소형 선박을 이용한 자살 폭파 공격을 하기 위해 만든 군사 시설이다. 천혜의 비경이랄 수 있는 송악산 해안 절벽에 흉측스런 구멍을 내었다.

그 모양은 '一'자형, 'H'자형, 'ㄷ'자형으로 된 동굴진지 형태로 17기나 만들었다. 동굴들은 너비 3∼4m, 길이 20여m 정도 되는 크기이다. 제주도 광치기해변에서 성산 일출봉을 바라보면 같은 목적의 인공동굴 진지를 볼 수 있다. 이러한 형태는 육지에 있는 일제시대 군사유적지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이다.
  

알뜨르 비행장 전경과 비행기 격납고 ⓒ 박상준

   

제주도 셋알오름 고사포진지와 제주 모슬포 알뜨르비행장 일제 지하벙크 ⓒ 문화재청

 
일제는 태평양 전쟁 이전부터 중국 본토를 침략하기 위해 1935년에 알뜨르 비행장을 송악산 인근에 세웠다. 태평양 전쟁 이후 1945년에는 비행장을 확장하면서 지하벙커(등록문화재 제312호)와 고사포 진지(등록문화재 제316호)를 설치했다. 전쟁 막바지에는 자살공격으로 악명이 높았던 가미가제호 조종사들을 훈련한 곳도 이곳이다.

송악산 외륜에는 전략 요충지인 알뜨르 비행장 일대를 경비하기 위한 군사 시설을 만들었다. 송악산 바깥쪽으로 뚫은 13개의 동굴로 이루어진 '제주 송악산 외륜 일제 동굴진지'(등록문화재 제317호)이다. 제주도의 일본군 동굴 진지 가운데 두 번째로 규모가 크고 동굴의 총 길이는 1433m, 출입구는 41개로 지하의 땅굴들을 이어지게 하여 내부는 지네 모양으로 돼 있다.

이렇게 전쟁에 광분한 일제는 송악산 일대의 아름다운 절경을 파헤쳐 땅굴과 지하 진지들을 만들었다. 자기들의 본토 사수를 위해 제주도를 오끼나와 같은 '옥쇄' 지역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연합군이 제주도까지 공격해 오기 전에 종전이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제주 송악산 외륜 일제 동굴진지 전경 ⓒ 문화재청

 
송악산은 수성화산활동(水性火山活動)으로 생성됐다. 지하에서 솟아 오른 뜨거운 마그마가 차가운 물과 만나면서 마그마가 급격히 냉각되고 부스러지면, 물은 급격히 기화하고 팽창하여 폭발이 일어난다. 이때 화산재와 분출물이 쌓이고 깎이면서 형성된 지형이라고 한다.

송악산은 특이하게 화산 지형인 현무암 위로 얕은 퇴적층이 있고 여기서 새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동굴 위에 형성된 띠모양의 화산지형 모습에서는 이 땅의 역사와 함께 한 억겁의 세월을 볼 수 있다. 지질학을 잘 모르는 문외한의 눈으로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풍광이다.

아픔의 섬, 제주

이러한 귀중한 자연을 일제는 침략전쟁 준비를 위해 서슴없이 파괴시키는 만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자연은 인류와 땅의 역사를 품고 있다. 이러한 자연은 한번 훼손되면 복구하기가 어렵다. 제주의 자연은 제주도민이나 한국인들만의 것이 아니라 인류의 보물이다. 일제의 만행은 우리에게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 씻을 수 없는 죄를 범한 것이다.

제주도에는 전쟁과 학살의 아픈 상처가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이런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제주도에는 '다크 투어'가 있다. '다크 투어'는 전쟁·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엄청난 재난과 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기 위하여 떠나는 여행이다. 
 

알뜨르비행장 남쪽 끝의 섯알오름 학살 터이다. 일본군의 폭탄 창고를 미군이 폭파하여 큰 구덩이가 만들어진 곳인데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미 폐기된 일제의 예비검속법으로 무고한 제주도민들을 체포하여 이 구덩이에서 학살하였다. 모슬포를 중심으로 한 서부지역의 예비검속자 212명이 집단 학살된 장소이다 ⓒ 박상준


일제의 만행을 보여주는 어두운 역사의 현장과 4.3 항쟁의 비극을 안고 있는 현장에서 역사를 되돌아보는 의식 있는 답사 여행이다. 일제에 의해 사람과 자연이 희생된 역사뿐만 아니라 권력과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어두운 역사를 기억하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의미있는 답사 여행의 명칭으로 꼭 '다크 투어'라는 외래어를 써야 하는지는 의문이지만.

역사적으로 섬사람들은 척박한 생활환경에 더해 육지보다 더한 수탈을 당하며 살아왔다. 자연재해에 대비한 시설이나 기구가 없어 어로생활 중 희생도 많았다. 먹고 살기에도 모자라는 어획물이나 농산물을 세금과 지방관의 탐욕에 의해 수탈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에 더해 왜구를 비롯한 외적 침략의 1차 대상이 되기도 했다.
제주도도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 제주도에서는 생산되는 감귤보다 더 많은 세금이 부과돼 오히려 짐이 됐을 정도였다고 한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식민지가 된 후에도 제주도민들의 삶은 마찬가지였다. 육지에 비해 더한 수탈과 압제를 당했다. 일본 본토와 한반도의 길목에 위치한 제주도는 일본 본토 방어를 위한 기지로서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일본은 제주도의 곳곳에 그들의 군사 기지를 건설했다. 그 과정에서 인적 물적 수탈은 물론 자연을 훼손해 제주의 땅과 사람 모두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1.제주의 어느 해변에서 만난 재일동포 공덕비 2.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미술관'은 폐교된 삼달분교를 개조하여 건립한 것인데 입구로 들어가다 보면 정원 오른쪽 담밑의 한 켠에 이 학교에 장학금을 보내주었던 재일동포들의 공덕비가 남아 있다. ⓒ 박상준

 
살기가 어려운 섬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주도민들이 일본으로 많이 가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과 가까운 제주도에서 징용으로 많이 끌려가기도 했다. 일본에 간 제주 사람들은 다른 지역 출신들과 달리 고향을 잊지 않고 후에 출신 지역이나 학교에 장학금을 비롯한 기부금을 많이 보내주었다.

그래서 제주도에는 다른 곳에서 잘 볼 수 없는 재일동포 공덕비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재일동포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해 정성을 모은 제주도만의 특별한 모습도 눈여겨 볼만 할 것이다.

제주도에 가해진 만행의 역사와 제주도민들의 아픔을 알고 나서 그 현장을 바라보며 듣는 제주의 파도소리는 예전과 같지 않음을 느끼며 다음 여행지로 발길을 돌렸다.

(*제주 전쟁 역사 평화 박물관에서는 이러한 일제의 만행 흔적을 잘 보존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chamjun0104)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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