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벌한 초등생들의 좌우명... 학교에서 군대가 떠오르다

[아이들은 나의 스승 154] 아이의 초등학교 졸업식 참관기

등록 2019.01.09 19:01수정 2019.01.09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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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월 13일 서울 종로구 재동초등학교에서 열린 졸업식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졸업생들이 미소 짓고 있다(이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 연합뉴스

 
지난 금요일, 딸아이의 초등학교 졸업식에 다녀왔다. 예전엔 겨울방학이 끝난 뒤인 2월 초가 초중고의 졸업 시즌이었지만, 요샌 1월 초로 옮겨가는 모양새다. 졸업식과 동시에 겨울방학이 시작되는 셈인데, 졸업하는 아이들에겐 자동적으로 개학식이라는 말도 사라졌다.

개학식이 곧 상급학교의 입학식인 까닭이다. 2월 말 일주일 남짓 쉬던 봄방학도 이젠 없다. 되짚어보면 졸업하는 아이들에게 봄방학은 초등학생도 아니고, 중학생도 아닌 어정쩡한 시기였다. 대개 단축수업을 하며 시간만 죽이다 하교하곤 했다.

초등학교 졸업식은 고등학교와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자녀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대부분의 부모가 바쁜 시간을 쪼개 찾는다는 것이다. 요즘 고등학교 졸업식에는 자녀가 단상에 올라 수상하는 경우라면 모를까 부러 연차를 쓰고 찾아오는 부모가 그다지 많지 않다.

하긴 졸업하는 당사자들도 불참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부모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나마 초등학교 졸업식장이 북적이는 건 자녀가 학교생활을 시작한 뒤 맞는 '첫 번째 졸업식'이라는 점 때문일 듯싶다. 실제로 졸업식 내내 연신 눈물을 훔치는 젊은 부모들이 적지 않았다.

졸업생들이 몇 안 돼 보일 정도로 강당은 온통 학부모들 차지였다. 발 디딜 틈조차 없이 꽉 들어차 학교가 졸업생들이 입장과 퇴장할 때 밟도록 마련한 레드카펫은 막상 보이지도 않았다. 미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부모들은 밖에서 졸업식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졸업식은 예나 지금이나 국민의례와 함께 시작된다. 대개 국기에 대한 경례만 하고 나머지 의식은 생략하는 경우가 많은데,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까지 빠짐없이 진행됐다. 순간 애국가 4절까지 모두 제창할까 싶어 살짝 긴장이 되기도 했다.

학교장이 단상 위에서 아이들 각자에게 졸업장을 직접 수여하는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졸업생 수가 많지 않은 이유겠지만, 한 명 한 명 호명해 졸업장을 건넨 뒤 포옹하고 덕담을 건넨다는 건 학교장 입장에서 쉬운 일이 아니다. 요즘엔 대규모 학교도 이렇게 하는 게 '대세'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아이가 단상 위에 오르면 대형 스크린에는 그의 앳된 사진과 함께 장래희망과 좌우명이 뜬다. 각자가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직접 만들어서인지 형식도 내용도 각양각색이다. 그것들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요즘 아이들의 삶과 꿈이 무엇인지 대략 가늠해볼 수 있다.

요즘 아이들의 삶과 꿈

장래희망이 '좋은 아빠'나 '좋은 엄마', '치킨집 사장'이라며 장난스럽게 적은 아이도 더러 있지만, 대개는 어떻게 탐색한 건지 의아할 만큼 구체적이고 진지했다. 유튜버, 법의학자, 미술치료사, 심리과학자, 스포츠마케터, IoT 전문가, 통계분석가 등 수많은 직업들이 등장했다. 여전히 교사나 경찰 등이 많다고 해도, 그만큼 아이들의 관심사가 넓어졌다는 방증이다.

아이들의 장래희망은 같은 걸 찾기 힘들 정도로 다양했지만, 함께 적은 좌우명은 마치 입이라도 맞춘 듯 천편일률적이었다.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No pains, no gains)'는 식의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순간 대학입시를 코앞에 둔 고3 수험생의 그것처럼 비장하게 느껴져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지금 잠을 자면 꿈을 꾸지만, 공부하면 꿈을 이룬다.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뛰어야 한다. 불가능이란 노력하지 않는 자의 변명일 뿐이다. 피와 땀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피할 수 없는 건 즐겨라.'

새삼스러울 만큼 식상한 표현이지만,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이들에게 어울리는 말은 분명 아닌 성싶었다. 그들은 한창 꿈을 꿀 나이지, 공부해야 꿈을 이룬다고 스스로 다그칠 나이는 아니잖은가. 천연덕스럽게 실패는 자신의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못 박아버리는 아이들의 성정이 낯설고도 조금 두려웠다.

하긴 학교의 교훈과 교실의 급훈, 회사의 사훈과 심지어 가훈에서까지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명언'들이니 마냥 아이들을 탓할 순 없다. 지금껏 그들에게 '넘어져도 괜찮다'고 다독여준 어른들이 아무도 없었던 걸까. 아이들의 입에서 '피할 수 없는 건 즐겨라'는 말이 스스럼없이 나올 정도면, 학교와 군대가 다를 게 뭔가.

개중에는 '살벌한' 좌우명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속뜻이야 앞선 것들과 별반 다를 바 없지만, 너무 노골적이어서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사진 속 해맑게 웃는 아이의 천진난만한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 과연 그가 적어낸 좌우명이 맞나 싶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적들의 책장은 넘어가고 있다. 가장 위대한 일은 남들이 잠자고 있을 때 이루어진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닐지 몰라도 성공은 성적순이다. 남 탓하지 마라, 자신의 적은 오로지 자신뿐이다.'  

초등학교 시절은 또래집단과의 놀이가 사회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우린 배웠다. 하지만 그들의 좌우명만 놓고 보면, 초등학생 때부터 철저히 무한경쟁의식을 내면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언뜻 20여 년 전 외환위기(IMF)를 직접 겪은 기성세대보다 더욱 맹목적이고 잔혹해진 면도 느껴진다.

공부에 관한 한 친구들을 모두 적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친구들이 잠잘 때 공부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며, 친구들과의 경쟁과 갈등을 노골적으로 부추기고 있다. 아이들의 마음속 다짐인 좌우명이 이럴진대, 서로 가진 것을 나누고, 아는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협동학습이 애초 끼어들 틈이 없다.

더욱 안타까운 건, 기성세대의 잘못된 가치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적순으로 성공하는 걸 당연시하고, 행복보다 성공을 상위 개념으로 여기는 듯하다. 성공과 행복에 대한 의미를 성찰해볼 겨를도 없이 어릴 적부터 밑도 끝도 없이 점수 경쟁을 벌이는 걸 마치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행복은 성적순'

아이들은 좌우명이 담고 있는 '행간'을 단순하게 해석할 여지가 커서, 자신이 겪게 될 고통을 모두 스스로의 책임으로 여기게 될 우려도 있다. 불가항력의 사회구조적인 문제조차 개인의 탓으로 돌리게 되면, 결국 사사건건 '을과 을의 전쟁'으로 비화될 수밖에 없다. 그렇듯 각박한 좌우명의 힘으로 그들의 꿈이 실현된다고 한들, 그런 세상이 아름다울 것 같진 않다.

졸업장 수여식을 마치고 학교장의 축하말씀이 이어졌다. 분명 덕담이지만, 듣는 내내 불편했다. 불굴의 의지로 고통을 이겨내고 뜻을 이룬 한 위인의 일대기를 소개했는데, 맥락상 아이들마다 적어낸 좌우명들과 하등 다를 바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의 학교운영방침과 가치관이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프레젠테이션 자료로 표현됐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아직 어린 초등학생들에게는 교사의 말과 행동이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창구다. 아닌 게 아니라, 식장을 가득 메운 부모들의 심드렁한 얼굴과는 달리 아이들의 경청하는 눈빛은 초롱초롱했다.

'네 성적에 잠이 오냐'거나 '열심히 공부하면 마누라의 얼굴이 바뀐다'는 등의 일부 고등학교의 천박한 급훈들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지금은 모두 내려지고 없지만, 아이들의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남아 힘을 발휘하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각인돼온 '하면 된다'는 식의 맹목적인 주문을 과연 아이들의 머릿속에서 지워낼 수 있을까.

졸업식 때 '미래에 꼭 성공해서 다시 만나자'고 부담을 주기보다 '네가 어떤 삶을 살든 항상 널 위해 기도하고 응원하겠다'고 격려하는 학교장을 한 번 만나봤으면 좋겠다. 아이들의 적어낸 좌우명만 놓고 보면, 이곳은 초등학생의 졸업식이라기보다 전장에 출전하는 어린 병사들의 환송식 같았다. 졸업식이 끝나고 나오는 길, 건물 벽면에 적힌 글귀가 생뚱맞게 느껴졌다.

'배움과 나눔으로 함께 성장하는 행복한 학교.'
#졸업식 #좌우명 #초등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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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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