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버지의 월급봉투를 먹고 자랐다

[X의 오피스 살롱] 성실한 직장인으로 버텨야 했던 아버지, 당신의 냄새가 그립습니다

등록 2019.01.13 20:11수정 2019.01.13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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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는 못했지만 나만의 미래를 꿈꾸며 현재를 성실히 살아가는 낙관주의자입니다. 불안하지만 계속 나아가는 X세대 중년 아재의 좌충우돌 일상을 소개합니다.[편집자말]
이 세상에서 심리적 거리감이 가장 먼 길이 출근길과 퇴근길 사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온종일 회사에 머물다 회식까지 한 날의 퇴근길은 더 멀게 느껴진다. 중년이 됐지만 아직 회사 생활 20년도 못했다. 나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직장에서 견뎌낸 아버지도 이런 피로감을 느꼈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우리 아버지 설렁설렁 회사 다닌 줄 알았더니... 고생 많으셨겠네.'


그날은 한 번의 지하철 환승을 마치고 마을버스에 몸을 실었다. 화요일 저녁에 회식이라니! 주말까지 가야 할 길은 출근길과 퇴근길 사이보다 더 멀어 보인다.

그렇게 나도 아버지가 됐다

그래도, 오늘은 운 좋게 마을버스에 앉을 자리가 있었다. 지난 여름의 지독했던 더위는 어느새 물러갔고,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밖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라디오에서 처음 듣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나중에 제목을 찾아보니 장미여관의 <엄마 냄새>라는 노래였다. 너무나 애절하고 구슬픈 목소리에 귀가 먼저 열렸고, 열린 귀를 통해 가사가 가슴에 내려앉았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울 엄마 냄새
이 나이를 먹어도 그리워져요
뒷바라지하시다 등이 굽어져
그 고운 손 세월에 마디가 지네
이제 다시 맡을 수 없는 울 엄마 냄새
꿈에라도 다시 한번 울 엄마 냄새
 
육중완은 엄마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지만, 나는 6개월 전 돌아가신 아버지 냄새를 떠올려보았다. 아버지 장례식을 마치고 엄마가 들려준 아버지의 소년 시절 이야기와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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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배가 고팠던 아버지는 그렇게 삼 남매를 배불리 먹이는 가장이 됐다. (사진은 tvN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 스틸컷) ⓒ tvN

 
1944년생 소년이던 아버지는 늘 배가 고팠다. 그 시절 모두가 그랬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내 자식들은 반드시 굶기지 않고 배 터지게 먹여야지.'

아버지는 예술적 재능이 있었지만 이를 살릴 만한 기회도, 여유도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설움과 배고픔을 이겨내기에도 힘겨운 나날들이었다. 성인이 된 아버지는 자신의 꿈이나 삶보다는 가족들을 위해 직장에 매달렸다. 어쩌면 자신에게 성실한 직장인이 되는 것 외에 다른 재능이 있는지 평생 인지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환경은 남들보다 힘들었지만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갔다. 늘 배가 고팠던 아버지는 그렇게 삼 남매를 배불리 먹이는 가장이 됐다.


아버지는 장남에 대한 기대가 몹시 컸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장남이 대견하기도 하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교육의 기회가 없었던 자신과 달리 장남만은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랐다. 아버지는 월급날이면 양손 가득 책을 사 들고 집으로 왔다. 아버지의 장남은 밥만큼이나 책을 좋아했다. 아버지는 장남이 판검사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장남인 나는 회사원으로 살아간다. 

아버지는 일흔 살 생신 때, 우리 삼 남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했다.

"내 딴에는 한다고 했는데, 너희들한테 해 준 게 하나도 없어서 참말로 미안하다. 그래도 이리 잘 커줘서 참말로 고맙데이. 이제 내 소원은 하나다. 그저 죽을 때 안 아프고 죽는 거. 그래야 너희들 고생 안 시키지."

아빠 냄새가 그리운 날

아버지는 자신의 마지막 인생 계획을 무사히 이루었다. 중환자실 한 번 들어가지 않고, 급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내가 회사 다니며 쓴 글을 모아 출간한 역사책을 들고 고향 집을 방문했다. 배고픈 소년이었던 아버지는 다시 그 시절 소년처럼 야윈 상태였다. 나는 그렇게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우리 아들이 작가 됐다. 판검사보다 더 대단한 작가!"

나에게 글쓰기에 대한 재능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DNA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음이 분명하다. 아버지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들도 아버지 입에서 나오기 시작하면 서사를 가진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둔갑했다. 적절한 타이밍에 무심한 듯 던지는 유머는 좌중을 휘어잡았다. 스스로 '종환체'라 명명했던 붓글씨는 어린 내 눈에도 아름답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이야기꾼의 재능은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농담을 던지는 것에, 글씨의 재능은 제사를 지낼 때 지방 쓰는 것에 그쳤다.

아버지의 얇디얇은 월급봉투에서 사온 책이 없었다면, 나의 글쓰기 도전도 없었을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도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을까? 어쩌면 아버지도 글을 써보고 싶거나 그림을 그려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왜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걸까? 아버지도 나랑 같은 직장인이었는데 왜 그런 생각이 안 들었을까? 나는 무심한 자식일 뿐이다.

삼일장의 마지막 날, 어머니가 피를 토하듯 쏟아낸 말에 가족 모두가 오열했다.

"아이고 불쌍한 양반. 평생 단 한 번이라도 배부르게 못 먹고 이리 가노."

상대적으로 덜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엄마는 부부싸움 후에도 아버지 밥은 꼭 챙겨 드렸다. 아버지가 없을 때 우리 앞에서 아버지 흉을 보다가도 마지막 말은 정해져 있었다.

"너희 아버지는 못 먹은 게 한이 된 사람이라. 밉다가도, 그 생각만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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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도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을까? (사진은 tvN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 스틸컷 ⓒ tvN

 
장미여관의 노래를 들으며 나와 같은 직장인이었던 아빠 냄새를 떠올려 봤다. 그 냄새는 선지 해장국 냄새였다. 아버지는 힘든 날이면 선지 해장국에 소주를 마셨다. 어린 시절 나는 다짐을 했었다. 내가 어른이 되면 회사 다니느라 힘든 우리 아버지께 선지 해장국에 수육까지 꼭 사드려야지, 라고. 나는 그 쉬운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내일 점심은 오늘의 직장인과 퇴직한 어제의 직장인들로 여전히 붐비는 광화문의 노포에 가야겠다. 그 식당에서 선지 해장국을 주문하리라. 이제는 다시 맡을 수 없는 울 아빠 냄새 맡으러.
#아빠냄새 #엄마냄새 #직장인 #선지해장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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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직 안 죽었다. 출간 찌라시 한국사. 찌라시 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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