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원'에 따라 세웠다 뽑힌 중앙분리대

'영혼 없는' 공무원과 시민의식이 부족한 상인 중 누가 더 문제일까.

등록 2019.01.10 17:51수정 2019.01.10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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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뽑을 거라면 애초 세우지를 말지, 멀쩡한 예산 낭비 아니에요?"

최근 아파트 단지 진입도로에 세웠다 없앤 중앙분리대 이야기다. 진출로는 2차선이고, 진입로는 1차선이었는데, 분리대가 세워지기 전엔 양쪽 도로변은 이중 주차도 서슴지 않을 만큼 노상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중앙선은 있으나 마나였던 셈이다.

출퇴근 시간 정체는 그렇다 해도, 주민들은 아이들의 안전이 위협 받는 상황이라 더 이상 방치하기는 어렵다며 아우성이었다. 진입도로의 한쪽은 유치원이고, 다른 한쪽은 학원과 태권도장이 입주해있는 건물이라 아이들이 수시로 도로를 가로지른다. 중간쯤에 건널목이 그려져 있긴 해도 무용지물이다.

실제로 작년 초쯤 학원 가방을 맨 한 아이가 차량과 충돌하는 사고를 직접 목격한 적도 있다. 당시 급브레이크를 밟은 차량이 굉음을 내며 도로 가장자리로 미끄러지던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진입도로라 차량이 속도를 낼 수 없어서 망정이지 자칫 사망 사고로 이어질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던 모양이다. 급기야 주민들이 관리사무소에 조치를 요구했고, 도로를 관할하는 지방자치단체는 200미터 가량 되는 진입도로에 중앙분리대를 설치했다. 중간의 갈림길 회전 구간과 건널목을 제외하곤 노란색 중앙선 위에 도열하듯 주황색 봉이 세워졌다.

플라스틱 재질의 원통형 막대기 모양의 분리대는 사람의 통행에는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 도로변 주차를 막는 탁월한 효과를 냈다. 2차선의 진출로 방향의 바깥 차선에 주차는 여전하지만, 적어도 다른 한쪽의 불법 주차는 사라졌다. 기실 중앙분리대가 세워지기 전에 이랬어야 했다.

출퇴근 시간 정체도 풀렸고, 오가는 차량 운전자들의 시야가 확 트여 불안감이 해소되었다. 그만큼 아이들은 안전해졌고, 보행자들도 편리해졌다. 노상 주차장처럼 쓰였을 땐 도로변이 지저분했었는데, 차가 사라져서 그런지 훨씬 깨끗해진 느낌이다.

그런데, 불과 한 달쯤 지났을까. 줄지어 세워져 있던 봉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한두 개일 땐 몰랐는데, 절반가량 뽑히자 주민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앙분리대가 뽑힌 도로변에는 사라졌던 차들이 바다로 간 연어가 회귀하듯 돌아왔다.

곧장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캐물었다. 명쾌한 해답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전혀 예측 못한 엉뚱한 답변이 되돌아왔다. 하나는 도로는 자기 소관이 아니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중앙분리대 설치를 찬성하는 주민도 있고, 반대하는 주민 역시 있다는 사실을 알아달라는 것이다.

관할 지방자치단체에 전화를 걸어 분리대를 제거한 이유를 물었다. 두 사람을 건너서야 담당자와 가까스로 통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답변은 관리사무소 직원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세워달라는 민원이 들어와 저희가 설치한 것 맞고요. 얼마 후 다시 뽑아달라는 민원이 들어와 뽑았을 뿐입니다."
"도로에 중앙분리대를 설치하는 원칙이나 규정 같은 게 없나요? 그냥 민원이 들어오면 그때그때 달라진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럼 불법 주차도 민원이 들어오면 용서되는 건가요?"


하도 어이가 없어 한마디 던졌더니, 그는 대뜸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민의식이 부족한 게 문제라면서 애먼 주민들 탓으로 돌렸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한꺼번에 절반가량을 뽑진 않았다고 한다. 뽑아달라는 민원이 들어올 때마다 하나둘 제거하다보니 그렇게 된 거란다.

아무리 민원이 무섭다고 한들, 잘못된 요구라면 단호히 거절하고 그 이유를 납득시킬 수 있어야 제대로 된 공무원이라 할 수 있다. 전혀 상반된 민원을 두고 바람에 갈대 춤추듯 하는 건 신뢰를 스스로 허무는 꼴이다. 정권만 바뀌었을 뿐 '영혼 없는' 공무원은 여전히 도처에 널린 듯하다.

여하튼 뽑힌 분리대를 다시 설치해달라는 요구와 함께 불법 주차된 차량을 수시 견인해 달라고 건의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가 대처하는 방식대로라면 이내 다시 세워질 테지만 입맛이 쓰다. 노란 실선이 그어진 곳은 엄연히 주차를 해서는 안 되는 곳이고, 더욱이 아이들의 안전이 위협을 받는다면 법 운운하기에 앞서 자발적으로 지키는 게 공동체를 위한 도리다.
 

절반만 남은 진입로의 중앙분리대불법주차 문제로 설치되었다가 주변 상인들이 민원을 넣어 하나둘씩 뽑히고 있다. 뽑힌 곳엔 다시 예전처럼 차량이 돌아왔다. ⓒ 서부원


 
이 글을 쓰기 위해 사진을 찍을 요량으로 도로에 나섰다가 상인 두 사람과 언쟁을 벌였다. 한 사람은 아파트 주민이고, 다른 한 사람은 가게를 운영하는 외지인이다. 둘 모두 중앙분리대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면서, 불법인 줄 알지만 도로변 주차는 불가피하다고 목청을 돋웠다.

그들은 대안이랍시고, 차량 운전자들이 속도를 더 줄이고, 길을 건너는 아이들이 더 조심하면 된다고 말했다. 한쪽 보도를 없애고 차도를 넓히면 위험이 줄어들 테고, 건널목에 신호등을 설치해 아이들이 그곳으로만 통행하게 하면 문제될 것 없지 않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결국 중앙분리대를 없애야한다는 이야기다.

그들의 주장은 얼토당토 않는데다 불법을 용인해달라는 것이어서 일고의 가치도 없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대다수의 주민들보다 훨씬 더 크게 느껴진다. 극소수 상인의 절박함과 대다수 주민의 무관심의 차이라고나 할까. '영혼 없는' 공무원이라면 이윤에 눈먼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입에서 아이들의 안전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돈보다는 안전이, 차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건, TV 광고에서나 나오는 카피일 뿐이다. 5년 전 세월호 참사를 겪었고, '촛불'의 힘으로 부패한 권력을 몰아냈지만, 여전히 우리는 일상 속에서 구태와 잘못된 관행은 떨쳐내지 못했다.

중앙분리대가 원상 복구될 때까지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 것이고, 불법 주차된 차량이 보이면 그때마다 견인하라고 신고할 것이다. 아파트 상가의 상인들과 척을 지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 하는 게 옳다. 스스로의 삶이 바뀌지 않는 한 정권이 바뀐다고 세상이 좋아질 리 만무하다는 걸 그들도 모르진 않을 테니, 언젠가는 그들도 내 '모난' 행동을 이해할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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