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면발에 시원한 국물, 이 계절에 어울리는 맛

[아빠의 레시피 3] 한겨울에 먹는 김치 칼국수

등록 2019.01.13 14:34수정 2019.01.13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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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이 늦어져서 허겁지겁 비빔밥을 입안에 밀어 넣었더니 속이 불편했다. 쉬는 날엔 소화가 잘되는데, 출근해서 환자를 보느라 조바심을 내는 날이나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면 어김없이 소화불량으로 고생한다.


진료하다 말고 원장실에 들어와 소화제를 먹어 봤지만, 복통이 계속 심기를 건드린다. 어찌어찌 하루 업무를 마치고, 퇴근길에 아내에게 누룽지라도 끓여서 달랠까 말까 하는데, 집사람은 한술 더 떠서 중3 아들 고입설명회에 자신을 태워다 줄 수 있는지 물어본다. 누룽지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아내도 아마 저녁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고 퇴근하자마자 부리나케 입시 설명회장으로 달려갈 걸 알기 때문이다.

설명회장 위치를 물어보니 자전거를 타고 가기엔 꺽정시럽고(걱정스럽다는 뜻의 전라도 사투리), 택시를 타고 가기엔 가까운 거리다. 태워달라는 사람을 모른 체할 수 없어 아파트 경비실 앞에 도착하자마자 아내를 태워서 학원 앞에 내려줬다.

내려준 곳은 도로 폭이 좁은 1차선 도로라 곧바로 우회전했는데, 이럴 수가. 대로변이라 밀리는 차들을 따라 직진할 수밖에 없는 도로 상황이다. 하는 수 없이 양평 방향으로 차를 운전했다. 속은 불편한데, 저녁은 먹어야겠고. 울며 겨자 먹기로 '그냥 이 동네에서 허기라도 채우자'하는 마음이 들었다.

화장실도 급해서 고가를 넘자마자 처음 만난 좁은 골목길로 우회전했다. 왼편에 작은 식당이 보였다. 차에서 내려 식당 문을 열고 주차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니 식당 앞에 개구리 주차를 하라고 했다. 개구리 주차는 자동차의 한쪽 두 바퀴는 땅에, 다른 쪽 두 바퀴는 보도에 걸쳐지도록 하는 주차방식이다. 주차하고 나니 개구리처럼 어색한 모양새다.

뱃속이 편해지는 맛
 

김치야~ 칼국수를 부탁해! 곁을 내주고 싶은 쌀쌀한 날씨에 두 아이를 위해 끓여낸 김치 칼국수입니다. ⓒ 임용철

 
식당 안은 세 명의 여자 손님이 주방 앞에 일렬로 앉아 왁자지껄 떠들며 흥겹게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주인은 음식을 준비하며 이들의 대화에 중간중간 추임새를 넣었다. 단골들이었다. 주방 벽면에 쓰임새에 따라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부엌칼들과 프라이팬들이 걸려 있어 시선을 끌었다.


'뭘 먹을까?' 메뉴판을 눈으로 흩다 보니, 속을 시원하게 풀어줄 수 있는 김치 칼국수가 구미를 당겼다. 칼국수를 주문하고 나니 식은 김밥이지만 맛있을 거라고 직원이 김밥을 갖다 주었다. 시장하지 않게, 허겁지겁 음식을 먹지 않게 배려하는 마음이 고맙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옆 사람들의 대화를 자연스레 듣게 되었다. 연장자인 듯 보이는 여자가 대화를 주도했다.

"지난번 일본 친구가 한국에 왔을 때 가보고 싶은 한식당이 어디였는 줄 아니? 나는 그곳에서 한식을 먹고 싶은 줄 꿈에도 몰랐어."

일행은 선뜻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자 음식을 준비하던 주인이 0.1초 이내에 정답을 던졌다.

"이태원?"

"와!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일본인 친구가 이태원 한식당에 가자고 했어요."


음식을 기다리던 나도 어느 곳일까 생각해봤지만, '한식당 하면 이태원' 하고 연상되진 않았다. 식당 주인의 '즉문즉답' 내공이 이 정도였다. 오늘은 낯선 사람의 이야기에 곁을 내주고 싶은 날이었다.

주문한 칼국수가 나왔다. 다른 밑반찬은 없었다. 칼국수 위에는 진녹색에 가까운 미역 줄기 같은 게 깨와 함께 얹혀 있었다. 얼핏 보았을 땐 미역 줄기였는데 먹어보니 파김치였다. 대파를 떡볶이 떡 크기로 큼직하게 썰어놓았다. 대파가 보약이라도 되는 양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어 치웠다. 대파가 달았다. 시원하고 칼칼한 국물도 그릇 바닥이 드러나게 다 마셨다. 국물이 줄어들 때마다 뱃속도 조금씩 편해져 갔다.

지금이야 집 근처 단지 내 슈퍼나 편의점이며 근거리에 할인점이 있지만, 어릴 때 자란 시골 동네는 과자나 얼음과자(아이스크림)를 사 먹으려면 아이 걸음으로 20분 거리 옆 마을까지 다녀와야 했다.

초등학교 수업 시간 깜밥(누룽지의 방언)만 생각하며 집에 돌아왔는데, 부모님은 들에 일하러 나가시고, 부엌 찬장이나 곳간을 뒤져봐도 마땅히 먹을 게 눈에 띄지 않을 때는 면발이 가는 국수를 끓여 먹었다. 국수는 굵기에 따라 얇은 것부터 차례로 세면, 소면, 중면이라고 부른다.

빨간색 석유풍로에 냄비를 얹고 물을 끓였다. 그때는 육수를 몰랐으니까, 물이 끓으면 둥글게 포장된 소면을 한 움큼 뽑아서 파스타 삶아낼 때처럼 서로 달라붙지 않도록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주고 묵은지를 적당하게 썰어 김칫국물과 함께 넣어줬다. 마법 육수 없이도 김치에 들어 있는 양념만으로 시원하고 맛이 칼칼한 김치 국수가 완성됐다. 국수는 조금만 넣어도 푸짐해서 시원한 국물까지 다 마시고 나면 금세 포만감이 찾아와 좋았다.

어머니를 모시고 식사하는 자리에서 작은 형이 '어릴 적 동생이 끓여주었던 김치 국수 맛이 좋았다'고 이야기한 적 있다. 시장이 반찬이던 시절, 국수만큼 고마운 음식도 없다.

국수와 생칼국수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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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와 생칼국수 면발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 wiki commons

 
토요일 퇴근길에 근처 시장에서 생칼국수 면을 샀다. '국수와 생칼국수 면발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호기심에 국수를 파는 주인에게 물어봤다.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저렇게 면을 가늘게 뽑아서 빨래처럼 널어 건조하면 국수가 되고 지금 손님이 사가는 칼국수면은 생면인 거죠."

요리책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에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 즐겨 먹었던 그 많은 음식을 누구에게 배우셨을까?

여름밤 늦은 저녁을 먹게 되면, 아버지는 마당 한쪽에 모깃불을 피우고 멍석을 펴셨다. 멍석 위에서 한 상에 둘러앉아 매캐한 연기와 함께 낭화를 먹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머니는 밀가루를 사다가 손수 반죽해서 국수보다 굵고 넓게 면을 만들어 푹 삶아 체에 걸러 소금 간한 팥물에 낭화를 자주 끓여내셨다. 낭화며 애호박을 넣은 수제비를 만드는 방법을 외할머니에게 배우셨을까? 아니면, 연세가 아흔이 넘었는데도 총기가 좋으시다는 앞집 혜자 누나 엄마에게 들으셨을까?

자전거를 타고 독서실에서 돌아오는 딸아이를 마중 나갔을 때였다. 집에 가면 아빠가 야식으로 김치 칼국수를 끓여줄 거라고 말하지 딸아이가 제안했다.

"아빠, 다음에는 수제비를 해보면 어때? 낙지수제비가 먹고 싶어."

다음 '아빠의 레시피'는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됐다.

시장에서 사 온 생면을 끓이기 전에 물에 헹궈서 넣었더니 칼국수 면끼리 달라붙고 면이 뚝뚝 끊어져서 짧아졌다.

칼국수 면은 보관 시에 밀가루나 전분을 입히는데, 밀가루는 물에 풀어지지만, 전분은 물에 엉기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그리됐나 싶다. 생면에 묻어 있는 전분을 솥에 넣을 때 털고 넣었어야 했는데… 그래도 두 아이가 세상 맛있게 먹어주니 아빠는 감읍할 따름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 치의신보, 시사인천에도 실립니다.
#김치칼국수 #곁을 내주다 #낭화 #수제비 #깜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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