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철아! 이젠 509호실에서 나올 수 있겠지?

[편지] 민주열사 박종철 32주기 추모제에 즈음하여 부친다

등록 2019.01.11 10:40수정 2019.01.15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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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장 안 되는 박종철 열사의 대학시절 사진 당시 학생운동하던 대학생들은 경찰의 수배에 대비하기 위해 사진을 잘 남기지 않았다. 위 사진은 박종철 열사가 2학년이던 1985년 백마역 근처에서 모꼬지를 하던 중 찍은 사진이다. ⓒ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보고싶다, 종철아!

철아!

32년이 지났음에도 너를 마지막으로 본 그날의 기억, 그때 안경 너머로 보이던 네 맑은 눈동자에 대한 기억은 오히려 더 생생해지고 있으니 참으로 이상하다.

그날, 1986년 10월 말의 어느날 우리는 성남 지역 주택가에 배포할 시국 관련 유인물을 만들기로 했다. 재주 많던 너는 그날 빼곡히 타이프를 친 유인물 제작용 청타지 7장을 나에게 은밀히 전달한 후 5동 건물 계단을 중간쯤 내려갔다. 내가 미처 하지 못한 말이 있어 "철아!" 너를 불러세웠었다. 바로 그때 계단을 내려가다 되돌아보던 네 모습, 안경 너머로 보이던 빨려들어갈 듯한 네 맑은 눈동자는 내평생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러고는 경찰에 수배중이던 나는 두 달 보름 정도 후 네가 전두환군사정권의 하수인인 파쇼 경찰의 혹독한 물고문에 의연히 맞서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끝내 사망했다는 소식을 다음날 <중앙일보> 석간을 통해 접할 수밖에 없었다. 충격과 분노, 그리고 두려움이 동시에 엄습해 오면서 내 몸은 묘한 감정에 휩싸였고, 먹먹한 상태로 한동안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철아!
이제 며칠 있으면 너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는 민주열사 박종철 32주기 추모제가 네가 물고문으로 스러져 간 그 남영동 대공분실 마당에서 열린다.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이번 민주열사 박종철 32주기 추모제는 이전과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번 32주기 추모제는 지난 32년간 이곳 남영동 대공분실을 지키고 있던 경찰이 떠나고, 남영동 대공분실이 마침내 시민의 품으로 온 상황에서 열리는 첫 추모제니 말이다.

32년 전 너의 의로운 죽음은 분명 우리 사회 민주화의 결정적 분수령이었다고 평가되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너는 지난 32년간 너 자신을 물고문으로 숨지게 한 그 경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6월 민주항쟁 이후에도 경찰이 운영하는 대공분실의 기능을 줄곧 계속하고 있는 걸 우리가 어쩌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2005년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인권단체를 중심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을 시민의 품으로!' 캠페인이 크게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 이후에도 남영동 대공분실은 경찰청 인권센터로 바뀌었을 뿐 경찰이 운영하는 곳이라는 기본 성격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반갑다, 종철아!

2018년 초 영화 < 1987 >을 계기로 다시 한 번 대대적인 '남영동 대공분실을 시민의 품으로!' 캠페인이 벌어졌고, 마침내 그 해 12월 경찰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완전히 떠났다.

지난해 12월 26일 이관식이 열리던 날, 민갑룡 경찰청장은 경과보고에서 "이 자리를 빌려 지난날 국민에게 고통을 안기고 공분을 일으켰던 경찰의 뼈아픈 과거에 대해 15만 경찰을 대표해 진심으로 고개 숙여 사과를 드린다"고 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국가폭력에 짓이겨진 민주화 운동가들의 절규와 신음이 들리는 듯하다"면서 "영령들의 헌신 위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서 있다는 것을, 지금 저희가 자유롭게 숨 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남영동 대공분실 이관식 장면 지난 2018년 12월 26일 그동안 (옛)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청 인권센터를 운영하고 있던 경찰이 떠나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이관하는 이관식이 열렸다. ⓒ 김학규

 
이렇게 해서 네가 32년만에야 가해자 경찰의 굴레에서 벗어나 마침내 509호실에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한 것도 억울한데, 지난 32년간 경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니 지난 32년의 세월, 생각만 해도 복장이 터진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이제라도 너를 가해자 경찰의 간섭없이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제 남영동 대공분실에 민주인권기념관이 조성되면 너를 쉽게 만날 수 있을테니 가슴 설레기조차 한다. 반갑다, 종철아!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줄은 몰랐어

철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이 떠나고 남영동 대공분실이 시민의 품으로 안기게 된 과정에는 정말 많은 이들이 노고가 있었다. 우선 영화 < 1987 > 제작진과 출연진의 분투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장준환 감독, 김경찬 작가, 우정필름의 이우정 대표에게 고맙다는 말 꼭 전하고 싶다. 영화 < 1987 >은 자칫 국민 속에서 희미해져 가던 너에 대한 기억을 다시 또렷하게 떠올리도록 하는 데, 그리고 국가폭력의 상징 남영동 대공분실에 관심을 갖게 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을 시민의 품으로!' 캠페인에 적극 나선 남영동대공분실인권기념관추진위원회 관계자 여러분도 큰 힘이 되었다. 그 추운 겨울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도 아랑곳하지 않고 너를 가해자인 경찰의 굴레에 더 이상 둬서는 안 된다고, 남영동 대공분실이 시민의 품으로 올 수 있어야 한다고 호소하며 거리 캠페인에 나섰다.

국회에서 인재근 의원, 소병훈 의원 같은 분들이 한 역할도 컸다. 이들 국회의원은 여론을 기반으로 경찰청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손을 떼도록 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경찰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손을 떼겠다는 결심을 한 이후에도 쉽지 않은 일이 많았는데, 이 어려운 상황을 풀어나가는 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역할도 대단히 중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온 국민이 힘을 모아 촛불혁명을 승리로 이끌지 못했다면 남영동 대공분실이 시민의 품에 안기는 일은 언제 가능할지 기약하기 쉽지 않았다는 점에서 촛불혁명을 승리로 이끈 국민 여러분께 고맙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

정말 긴 시간이었다. 네가 가해자인 경찰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줄은 미처 몰랐다.
  

영화 <1987> 영화 <1987>의 흥행으로 박종철 열사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고, 국가폭력의 상징 남영동 대공분실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 우정필름

 
검찰총장도 사과하고, 검찰 과거사위원회에서도 검찰의 잘못을 인정했단다

철아!
이번 32주기 추모제에서는 또 하나 자축할 일이 있다. 지난해 초 경찰청장과 함께 영화 < 1987 >을 관람한 문무일 검찰총장이 나중에 한 강연회에서 했던 말 기억날 것이다. "검찰의 역할은 미화된 면도 있었다, 옆에 있는 경찰청장을 보면서 민망해서 얼굴이 후끈 거렸다"고 했던 말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 < 1987 >은 경찰의 잘못은 분명히 드러내고 있지만, 검찰의 잘못은 거의 다루지 못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영화 < 1987 >은 영화 < 1987-경찰편 >이고, 이어서 영화 < 1987-검찰편 >을 만들어도 대히트를 칠 것"이라고 말하곤 했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지난 해에는 결국 문무일 검찰총장은 박정기 아버지 살아생전에 요양원을 찾아서 손을 꼭 잡은 채 과거 검찰의 잘못에 대해 사과했다. 법무부 산하에 만들어진 검찰 과거사위원회(위원장 김갑배)에서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통해 검찰이 축소·은폐·조작 과정에 개입한 잘못을 인정하고 '검찰의 통렬한 반성'과 '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검사나 수사관에 대한 교육과정에 반영할 것, 검찰의 중립성을 확립하고 검사 개개인의 직업적 소명의식을 확고히 정립할 수 있는 제도 및 대책을 수립할 것'을 권고하는 일도 있었다.

마침내 사건 당시부터 다음 해 1월까지 네 차례 수사가 벌어졌음에도 수사는커녕 조사받은 적도 없는 검찰이 32년 만에 조사 대상이 되면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검찰의 잘못을 전부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과 그 책임 문제는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위원회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관계기관대책회의의 은폐·조작 의혹' 조사에 이어 지난해 검찰 과거사위원회의 조사로 그 실체가 기본적으로 밝혀지고 정리된 셈이다.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다'고 했던가! 우리가 지난 30여 년 간 계속 제기해 왔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축소·은폐·조작의 실체를 결국에는 국가기관에서 다 수용하고 인정했으니 말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수사검사였던 박상옥(왼쪽), 안상수(가운데), 신창언 박상옥 당시 수사검사는 현직 대법관으로 재직 중인데, 검찰 과거사위원회의 발표가 있은 이후에도 입장표명조차 하지 않았다. ⓒ 안검사의 일기

     
그래도 남는 아쉬움은

철아!
너도 기뻐할 거라고 믿는다만, 그래도 아쉬움은 있다.

하나는 박정기 아버지가 좀 더 살아계셨더라면, 그래서 남영동 대공분실이 시민의 품에 안기는 장면을 보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그 누구도 신경 쓰지 못할 때도 남영동 대공분실을 지켜낸 분이 아버지였기에 더더욱 그렇다.

다른 하나는 검찰 과거사위원회에서 당시 검찰수사의 잘못을 인정했음에도, 당시 수사검사 중 한 명이었던 박상옥이 변함없이 현직 대법관의 직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박상옥의 입장에서 보면 당시 주임검사였던 신창언은 헌법재판관까지 지냈고, 함께 수사검사로 일했던 안상수는 마치 자신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파헤친 주역인 양 행세해서 4선 국회의원까지 지냈으니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사건 관계자 중 현재 유일하게 공직에 있는 인물로서 지금이라도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는 게 최소한의 도리라는 생각이다.

더군다나 박상옥은 2015년 국회 청문회 과정에서 "외압은 전혀 느끼지 못했고, 관계기관대책회의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다. 하루 4시간 자면서 소신껏 수사에 임했다"고 증언했던 인물이었으니 사실상 위증까지 했다고 보는 게 맞는데도 그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 모습이 나로서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13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반갑게 만나 회포나 풀자꾸나
 

민주열사 박종철 32주기 추모제 민주열사 박종철 32주기 추모제가 (옛)남영동 대공분실에서 1월 13일(일) 2시부터 열릴 예정이다. 가해자 경찰이 남영동 대공분실을 떠난 후 처음 열리는 박종철 열사 추모제여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행사이다. ⓒ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철아!
나의 지난 활동의 상당 부분은 그동안 여전히 은폐되어 있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작업과 남영동 대공분실을 시민의 품으로 돌려 509호에 갇혀 있는 너를 구출하는 일이었다.

이제 그 두 가지 과제가 완수된 셈이니 나도 이제 '해방'되고 싶다. 이제 좀 더 자유롭게 살면서 이제는 32년 전 너와 함께 꿈꿨던 '민중이 주인되는 나라' 만드는 일에 매진하고 싶다.

13일 남영동 대공분실에 가면 이전과 달리 내가 네가 있던 509호실로 갈 필요도 없이 아마도 너는 509호실에서 나와 대공분실 마당에서 나를 맞아주리라 믿는다.

민주열사 박종철 32주기 추모제가 끝나면 가까운 맥주집에 가서 술 한잔 기울이면서 그동안 쌓인 회포도 풀고, '민중이 주인되는 나라'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너의 고견도 듣고 싶다.

그리고 너만큼이나 밝고 맑은 하늘의 무수한 별을 보면서 또 헤어지자꾸나.

2019년 1월 11일
너의 젊은 벗 학규 씀
 
덧붙이는 글 글쓴이 김학규는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이며, 박종철 열사와는 대학 동기이고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동지였습니다.
#박종철 #남영동 대공분실 #추모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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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동작구 근현대 역사산책>(2022) <현충원 역사산책>(2022),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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