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애들 있는데 왜 룸살롱 가느냐" 그 후 10년

[운동하는 여자 17] 심석희 선수와 4년의 침묵... 스포츠계의 성폭력

등록 2019.01.11 07:58수정 2019.01.11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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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훈련 지켜보는 조재범 코치 지난 2018년 1월 10일 오후 충북 진천 국가대표선수촌 빙상장에서 쇼트트랙 조재범 코치가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훈련중인 선수들을 지켜보고 있다. 조재범 전 코치는 심석희 선수 등 쇼트트랙 선수들을 폭행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아 법정 구속되었다. ⓒ 권우성

 
기해년 새해가 밝았다. 한국 스포츠계는 역사상 가장 어둡고 가슴 아픈 일로 기록될 사건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맞았다. 사건의 중심에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쇼트트랙 2관왕에 오른 심석희 선수와 심 선수를 직접 발굴하고 국가대표로 키운 조재범 전 코치가 있다.

심석희 선수의 고발에 따르면, 조 전 코치는 2014년 심석희 선수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만 17살부터 강제 추행과 성폭력을 일삼았다고 한다. 무자비한 폭력과 성폭력은 평창 동계올림픽이 열리기 두 달 전까지도 계속됐다. 여기에 심 선수 외에도 빙상계 내 성폭력 피해자가 대여섯 명이 더 있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이는 가해자가 자신의 우월한 지위와 위계, 나이를 악용해서 저지른 악질적인 성범죄라는 점에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스포츠계의 성폭력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 2007년에도 스포츠계의 성폭력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충격을 주었다. 우리은행 여자 농구팀의 박명수 전 감독이 소속 선수들에게 성폭력을 일삼은 것을 발단으로 곳곳에서 폭로가 이어졌다.

이때 널리 알려진 것이 '우리 애들이 있는데 왜 룸살롱에 가느냐'는 말과 '선수는 종이며 성관계는 선수 장악을 위한 주된 방법'이라는, 범죄자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남성 지도자들의 가치관이다. 당시에도 비난 여론이 만만치 않았으나 정부와 대한체육회는 별다른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고 사건은 흐지부지 잊히고 말았다.

그리고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또 다시 성폭력 문제가 불거졌다. 그것도 올림픽 무대에서 세계 정상에 오른 선수를 통해서. 흔히 한국 사회 곳곳에, 전 분야에 걸쳐서 성폭력이 없는 곳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해당 사건으로 인해서 스포츠계의 성폭력이 매우 빈번하고 심각하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극명하게 드러난 셈이다.

그렇다면 스포츠계의 성폭력 문제가 끊이지 않고 반복되는 이유가 뭘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스포츠가 남성적인 지배논리가 굳건하게 작용하는 분야라는 데 있다. 이는 성폭력을 우리보다 엄중하게 처벌하는 국가에서도 스포츠계의 성폭력 문제가 끊이지 않고 발생한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세계 정상' 성적 낸 다음에야 목소리 낼 수밖에 없었던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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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훈련 지켜보는 조재범 코치 지난 2018년 1월 10일 오후 충북 진천 국가대표선수촌 빙상장에서 쇼트트랙 조재범 코치가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훈련중인 선수들을 지켜보고 있다. 조재범 전 코치는 심석희 선수 등 쇼트트랙 선수들을 폭행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아 법정 구속되었다. ⓒ 권우성

 
일례로 미국 미시간대 체조팀과 미국 체조대표팀 주치의를 지낸 나사르는 30년 가까운 기간 300명이 넘는 여성 선수들을 성추행,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돼 360년형을 받고 수감 중이다. 또 영국의 명문 축구구단 첼시 소속의 공격수 게리 존슨도 지난 2016년, 유소년 선수 시절에 스카우터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이렇게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지배적인 스포츠계에서는 선수를 키운다는 명목 아래 폭력을 묵인하고 지도자가 절대적인 권력을 갖는 식의 관행이 일반적이다. 어린 선수들은 운동 외에 다른 분야를 공부하거나 경험할 수 없고 합숙과 전지훈련이 빈번한 폐쇄적인 환경에서 지도자의 일방적인 가르침을 받들어야 한다.

여기에 여성 지도자가 진입하기 어려운 분위기 때문에 지도자의 대부분은 남성이다. 이렇게 남성적인 지배 논리가 공고한 분야에서 수많은 여성 선수들이 성폭력을 당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보다는 고질적으로 반복, 재생산되는 뿌리 깊은 병폐라고 봐야 할 것이다. 

결론은 성폭력에 취약한 것으로 알려진 특정 분야에는 그 분야에 적용할 수 있는 특수한 해결책과 재발 방지를 위한 예방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 제도적인 기반을 마련하지 못하면 십 년, 이십 년 후에도 여성 선수의 안전은 요원한 일이 된다.

덧붙여서 성폭력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우리 사회의 폭력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다. 최초로 이 사건을 전해 들었을 때 가장 먼저, 심 선수가 침묵해야 했던 4년의 세월과 그 지난한 고통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가족에게도 알리지 못하며 침묵했던 시간이 나에게까지 아프게 와닿았다. 

심 선수는 그 극심한 고통에 맞서서 세계 정상이라는 성적을 냈고 그런 다음에야 침묵을 깨고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신뢰할 만한 피해자가 되기 위해서, 이른바 꽃뱀을 골라내는 여론재판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자격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성이라면 누구나 이 악랄한 부조리를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정상을 꿈꾸는 어린 선수들과 무명의 아마추어, 비인기 종목에서 묵묵하게 훈련 중인 숱한 여성들이 꽃뱀으로 몰릴까 두려워서, 혹은 선수 생활을 중단하게 될까 봐 침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전문가들도 스포츠계는 종목마다 학연, 지연으로 촘촘하게 얽힌 탓에 실형을 받은 가해자가 지도자로 복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한다. 또 다수의 성폭력 피해자가 존재하지만, 이들을 지지하고 연대하려는 동료가 없기 때문에 연쇄적인 고발이 행해지기 어렵다. 

결국 어떤 사실을 말하고 타인의 공감과 신뢰를 얻는 것은 그 자체로 권력이다. 반면에 강요된 침묵은 억압이고 사회적인 죽음이다. 그래서 작가이자 역사학자인 리베카 솔닛은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The mother of all questions)'에서 여성이 강요받는 침묵에 관해서 이렇게 서술했다.
 
"침묵은 지난 수십년 동안 포식자들이 구속받지 않은 채로 제멋대로 날뛰도록 허락해주었다. 그들은 피해자를 물리치기 위해서 피해자를 목소리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고, 피해자가 못 믿을 말을 늘어놓는다는 누명을 씌웠다. 못 믿을 말이라는 건 힘을 가진 자들이 그 말을 알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믿고 싶지도 않는다는 뜻, 피해자가 목소리를 갖는 걸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만약 이 사회가 성폭력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왔다면, 피해자가 고발을 포기하고 침묵하도록 강요하지 않았다면 열일곱 살의 어린 여성이 스무 살이 되도록 침묵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오랜 공포와 두려움을 떨치고 목소리를 낸 심석희 선수에게 지지를 보낸다. 그의 용기를 헛되지 않게 하려면 우리의 역할이 공분하기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보다는 피해자를 진짜와 가짜로 나누지 않는 태도, 피해자의 말에 귀기울이고 연대하는 자세, 그것부터 우선적으로 행해야 한다.  
#미투 #스포츠 #조재범 #성폭력 #운동하는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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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하는 여자>를 썼습니다. 한겨레ESC '오늘하루운동', 오마이뉴스 '한 솔로', 여성신문 '운동사이' 연재 중입니다. 노는 거 다음으로 쓰는 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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