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모르게 서점 다니는 순심씨의 사연

[상주작가의 서점에세이 7] 40년 만에 꿈 되찾은 '문학소녀' 유순심씨

등록 2019.01.13 19:59수정 2019.01.13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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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부터 군산 한길문고 상주작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작가회의가 운영하는 '2018년 작가와 함께하는 작은서점 지원사업')가 되었습니다. 문학 코디네이터로 작은서점의 문학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작가와 독자가 만나는 자리를 만듭니다. 이 연재는 그 기록입니다. - 기자 말
 

수십 년 전에 문학가의 꿈을 가졌던 유순심씨. '작가와 함께하는 작은서점 지원사업' 광고를 보고 이끌리듯 서점에 왔다고 한다. ⓒ 배지영

 
군산 우리문고 앞에는 버스정류장이 있다. 사람들은 버스 번호를 확인하고 재빨리 탄다. 유순심씨도 날마다 그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추우니까, 더우니까, 바쁘니까, 피곤하니까 타야 할 버스가 오면 얼른 올랐다. 딱 한 번만 빼고.


"<교차로> 보고 우리문고에서 작가 강연회 하는 걸 알았어요. 항상 그 앞에서 버스 타거든요. '책도 안 사 읽는 사람이 서점에 가서 물어봐도 되나?' 큰 용기를 낸 거예요."
 

버스정류장에서 우리문고 계단까지 스물여섯 걸음. 여섯 계단을 오른 다음에 작가 강연회 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는 로비까지 아홉 걸음. 작가들의 이름과 강연 제목을 읽으면서 떨리는 마음을 다잡은 뒤에 우리문고 문을 열려면 다시 다섯 걸음. 순심씨에게는 큰 산 하나를 넘는 것처럼 힘든 일이었다.

"제가 여기에 끼어도 되나요?"

순심씨가 우리문고 강연 테이블에 와서 건넨 첫 마디였다. 지난해 12월 1일 토요일 오후, 김기은 작가가 시를 여러 편 읽어주었다. 다들 처음 만난 사이지만 마음을 열고 얘기할 수 있게 이끌었다. "문학도 사람 사는 이야기잖아요"라고 말하는 순심씨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아이 셋을 낳고 기른 순심씨는 10년간 생산직 노동자로, 10년간은 요양보호사로 일했다고 한다. 먹고사는 일만이 중요했다. 다른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인들은 생활에 찌들었다고 자평하는 순심씨에게서 다른 면을 봤다. 메신저 단체 채팅방에 올린 순심씨의 글을 보고는 "꼭 시를 쓴 것 같네"라고들 했다.
 
"우리문고에 처음 왔을 때, 저 혼자 신나서 너무 말을 많이 한 것 같아요. 작가 강연회 자체가 옛날 친구처럼 반가웠거든요. 정말 뭔가에 끌린 듯이 왔어요."


여전히 살아 있는 '문학소녀'
 

군산 우리문고에서 진행했던 김기은 작가 강연회. 유순심씨는 이날 처음으로 왔다. "문학은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지요"라고 말할 때에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 배지영

  
순심씨는 중학교 때부터 교지에 글이 실리던 문학소녀였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75년 1월 1일. 순심씨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가에게 편지를 보냈다. "글의 배경이 강원도인데 왜 주인공은 표준말만 쓰나요?"라고 물었다.


편지를 읽은 이현 작가는 답장을 보내왔다. 고맙다고, 참고하겠다고. 그러면서 <설국>을 쓴 가와바타 야스나리도, 작품을 발표하고 난 뒤에 몇 번이나 고쳐 썼다는 말을 했다. 글이라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국어국문과에 가고 싶었지만 고등학교 3학년 2학기에 취업을 나가야 했던 순심씨.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출퇴근을 할 때는 문고판을 끼고 다니면서 읽었다. 차곡차곡 월급을 모아서 종로 2가에 있는 학원가로 가자고, 종합반에서 1년간 공부해 대학에 진학하자고 결심했다.

꼬박 3년간 회사에 다니다 1979년 퇴사한 순심씨. 대학입시 공부를 하겠다는 딸에게 아버지는 말했다. "시집갈 나이다!" 답답한 집안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순심씨는 친구의 외사촌 오빠와 결혼해서 전주에 정착했다. 큰 애가 여섯 살 때 군산으로 이사 왔다. 누구나 어려웠던 시절, 쌀독에 쌀이 얼마나 남았느냐를 계산하며 살았다.
 

국문학과를 가고 싶었던 문학소녀는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때 취업을 나가야 했다. 3년간 꼬박 모은 돈으로 종합입시학원에 가려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학공부를 시켜주겠다는 남자와 결혼했고, 세 아이를 낳아 열심히 길렀다. 예순 살이 넘어서야 작가 강연회를 하는 서점에 발을 들여놓았다. ⓒ 유순심

    
우리문고 앞 정류장. 처음으로 작가 강연회를 듣고 버스를 기다리던 순심씨는 가슴 속에서 아지랑이 같은 게 이는 듯했다. 그날 밤, 저녁을 먹고 하루의 살림을 마무리 짓고 잠자리에 들려는데 뭔가를 막 쓰고 싶었다. '이걸 어떻게 쓸까? 내일 아침에는 생각이 더 정리될까?' 문학적인 감수성이 충만한 밤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이야기가 연결이 안 돼요. 뭐라도 한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목이라도 적어 놓고 있어요."
 

순심씨의 수첩에는 '이제는 노인', '노령화를 사는 어르신들', '말로 할 수밖에 없는 자녀들의 현실', '나도 노인인데 노인을 케어하는 그런 입장'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다. 노인 돌보는 일을 하면서 겪었던 일, 간병일지를 쓰고 싶었던 마음이 담겨있는 거다.

격주마다 토요일 오후에 열리는 우리문고 작가 강연회. 2019년 1월 5일부터는 <할아버지의 뒤주>를 쓴 이준호 작가가 강연을 한다. 이 작가는 강의를 듣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었다. 글을 보내면 봐주겠다면서. 사람들은 "정말이요?" 하면서 작가의 이메일 주소를 받아 적었다.

손으로 글을 쓰는 순심씨만 얼굴에 그늘이 졌다. 사실 순심씨는 2년 전에 군장대학을 졸업했다. 전공은 실버상담복지학. 사람들은 "써먹지도 못할 공부를 왜 하는 거야?"라고 물었다. 순심씨의 걱정은 졸업 후 진로가 아니었다. 컴퓨터를 잘 다룰 줄 몰라서 공부하는 데 애를 먹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질문에는 의연하게 대처했다.

"써먹으려고 공부 하가니? (웃음) 대학 못 다닌 한풀이 했어."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그토록 다니고 싶었던 대학. 유순심씨는 2년 전에 대학을 졸업했다. ⓒ 유순심

  
대학 공부를 마친 순심씨에게 남은 한은 문학. 순심씨에게는 컴퓨터에 글을 써서 저장했다가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디지털 문학 세계'가 장벽처럼 느껴졌다. 도저히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았다. 수십 년 전에 꾸었던 꿈만 가지고 서점에 와서 기웃거리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작가 강연회가 끝나고, 사람들은 돌아갔다. 순심씨만 남았다. 나는 순심씨가 그토록 원했던 국문과를 다닌 사람. 작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보고 듣고 겪은 이야기를 책으로 쓴 사람. 다음 강연회 때도 순심씨를 만나고 싶은 사람. 순심씨의 가슴에 당장 닿을 수 없다고 해도, 나이 들어서 글을 쓴 사람들 얘기를 해주었다.

로라 잉걸스 와일더는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인 <초원의 집>을 예순다섯 살에 출간했다. 미국의 국민 화가 모지스 할머니는 일흔여섯 살에 그림을 시작했다. 여든한 살에 첫 전시회를 열고, 백 살에도 25점의 그림을 그렸다. 모지스 할머니가 아흔두 살에 쓴 책의 제목은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혼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순심씨. 작가 강연회에 오면 대화 상대가 있어서 좋았다. "당신은 아직도 세상살이를 잘 몰라"라고 말하는 남편에게는 언제쯤 서점에 다닌다고 얘기를 할까. 하지만 가슴 속에 든 이야기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글로 써보리라.

그날 밤, 순심씨는 오래된 앨범을 들추었다. 순식간에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갔다. 세 아이들도, 순심씨의 남편도 없는 시절의 사진은 흑백이어도 생생했다. 44년 전에 신춘문예 당선작가에게 받은 편지도 그대로 있었다. 순심씨는 편지와 젊은 시절의 사진을 찍어서 나한테 보내주며 말했다.

"지금까지는 살기 위해 애썼다면, 작가님이 주신 시간은 저만을 위한 것이기에 더욱 소중합니다. 내게 이런 일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너무나 소중한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 같아요. 여러 가지로 감사합니다."

나는 빛바랜 편지를 확대해 봤다. 거기에는 문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한 '유순심 양'이 있었다.
 

44년 전의 편지. 고등학교 2학년 '유순심 양'은 신춘문예 당선작가에게 편지를 보냈다. “글의 배경이 강원도인데 왜 주인공은 표준말만 쓰나요?”라고 물었다. 작가는 문학소녀에게 답장을 보냈고, 소녀는 할머니가 될 때까지 이 편지를 간직하고 있다. ⓒ 유순심

#작가와 함께하는 작은서점 지원사업 #군산 한길문고 #군산 우리문고 #군산 예스트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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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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