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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 아들 저주? 실제 선조-광해군이 나눈 대화는...

[사극으로 역사읽기] tvN 월화 드라마 <왕이 된 남자>

19.01.14 18:39최종업데이트19.01.14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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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된 남자>. ⓒ tvN

  
이병헌 주연의 7년 전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리메이크한 tvN 월화드라마 <왕이 된 남자>는 세자 이헌(여진구 분)이 아버지(장혁 분) 임종을 지켜보는 모습을 첫 장면으로 묘사했다. 이복동생 경인대군 및 내시 한 명과 함께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키는 이 광경은, 세자의 처지와 미래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한 편의 그림이었다.
 
자리에 누운 아버지는 어린 경인대군이 "아바마마!" 하며 울먹이자 "네가 장성하는 것을 못 보고 가는 것이 참으로 애통하구나"라고 말한 뒤, 멀찍이 앉아 있던 큰아들을 가까이 불러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아버지 "세자, 이리 가까이 와라."
아들 "(가까이 다가가며) 말씀하십시오. 전하."
아버지 "내 피눈물로 지켜온 용상을 네깐 놈한테 물려준다는 생각을 하니, 분통이 터져 차마 눈을 감을 수가 없구나. 네 놈이 나에 대한 원망으로 저 어린 경인대군을 핍박할까 그것이 걱정이다. 이놈, 약조하거라. 아우를 지켜주겠노라고."
아들 "(얼굴을 약간 들이대며 낮은 소리로) 전하, 부탁은 그리 하는 게 아닙니다. 눈물로 애원하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비셔야지요."
 
그러자 위독한 중에도 화가 치솟은 아버지는 기운 없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더니, 아들의 목덜미를 잡으며 몇 마디를 토해냈다. 이것이 드라마 속 아버지의 마지막 한마디, 일종의 유언이었다.
 
"그래, 내 지켜보마. 네 놈의 세상은 어찌 되는지, 네 놈은, 네 놈은 어찌할지. 돼먹지 못한 놈!"
  

tvN 드라마 <왕이 된 남자>의 한 장면 ⓒ tvN

  
'네 놈의 세상은 어찌 될지 지켜보겠다'며 곧 등극할 아들에게 불길한 예언을 던진 아버지는, 그대로 아들 품에 쓰러져 마지막 기운을 소진했다. 뒤이어 내시가 지붕 위에 올라가 임금의 옷을 흔들어대며 "상위복(上位復)"을 외치는 장면이 나왔다.
 
"주상께서는(上位) 돌아오소서(復)"라는 그 외침을 들었다면, 아버지는 작은아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승으로 되돌아오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오지 못한 채 '네깐 놈의 세상'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왕이 된 남자>가 첫 회에 보여준 이 장면은, 아버지가 죽는 순간까지도 지위의 불안을 느껴야 했던 광해군의 처지를 보여줌과 더불어, 아버지로 인해 촉발된 새어머니 인목대비 및 이복동생 영창대군과의 갈등이 광해군의 향후 운명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될 것을 예고하기에 충분했다. 장면 자체는 허구에 지나지 않지만, 광해군 정권의 존립 기반과 향후 운명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의미가 꽤 있지만, 드라마이다 보니 역사적 사실과 많이 벗어나는 점이 없지 않다. 선조의 건강 문제는 죽기 11개월 전부터 악화됐다. 1607년 4월부터는 침을 맞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선조실록>에는 '3월'로 나오지만, 이는 음력이다. 양력 4월부터 건강이 악화되는 속에서 선조와 광해군의 부자관계가 나빠진 적도 있지만, 드라마처럼 그렇게 심각한 수준까지는 발전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뒤 태도를 돌연 바꾼 선조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에 세자로 책봉됐다. 광해군을 책봉하라는 건의를 평소에 외면해 왔던 선조는 전쟁 발발 16일 만에 세자 책봉을 서둘러 단행한 뒤, 광해군에게 전쟁 지휘를 맡기고 북으로 피난했다.
 
하지만 1598년에 전쟁이 끝난 뒤로 선조는 태도를 바꿨다. 광해군의 전공을 인정하지 않았다. 도리어 첩인 후궁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광해군을 흔들어댔다. 광해군처럼 첩의 아들인 신성군에게는 총애를 표시했던 점을 보면, 광해군을 미워한 게 꼭 서자였기 때문은 아니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부자지간이라도 그냥 싫었을 수도 있다.
 
한 번은 신하들이 세자 책봉에 대한 중국의 승인을 받기 위해 절차를 추진하자고 건의하자, '공석이 된 왕비 자리를 채우는 게 더 중요하다'며 건의를 묵살하기도 했다. 일반적인 아버지와 정반대였던 것이다.
 
1602년 50세 나이로 18세 된 인목왕후(인목대비)를 새로 들인 선조는, 4년 뒤인 1606년 꿈에도 고대하던 적장자 영창대군을 두 손으로 끌어안았다. 그러자 광해군을 대하는 태도가 아주 노골적으로 싸늘해졌다. 적장자라는 정통성을 갖고 태어난 영창대군한테 보위를 물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북인당의 분파인 소북당이 영창대군을 지지하고 광해군을 견제하는 양상까지 나타났다.
 
그렇지만 건강문제가 악화된 1607년 하반기에, 선조는 광해군에 대한 지지를 재차 천명할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과의 관계가 악화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나면 갓난아이 영창대군이 왕위를 이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목숨까지 위태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이때 상황을 역사학자 이덕일의 <조선 왕을 말하다 1권> '광해군 편'은 이렇게 정리했다. 와병 중에 방문을 나서다가 쓰러진 지 2일 뒤의 상황을 정리한 것이다.
 
회복될 가망이 없자 만 서른두 살의 세자를 제치고 만 두 살짜리 아이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 없다고 판단한 선조는 이틀 후 원임·시임(전·현직 관리) 대신들을 불러 '세자가 장성했으니 고사에 따라 전위하는 것이 좋다. 만일 전위가 어렵다면 섭정도 가하다' 하며 광해군에게 왕위계승을 명하였다.
 
이미 세자가 된 사람한테 이렇게 다시 한번 왕위 이양을 약속한 뒤에도 선조는 여전히 심술을 부렸다. 영창대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광해군을 훼방하는 영의정 유영경을 겨냥해 친(親)광해군파 정인홍이 비판 상소를 올리자, 선조는 정인홍과 더불어 광해군까지 다시 미워졌다.
 
그래서 선조는 그 와중에도 광해군을 괴롭혔다.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다시 다짐하긴 했지만, '친광 세력'이 득세하는 것 같아 심기가 불편해졌던 것이다. 이때 벌어진 일을, 조선 당쟁사를 정리한 이건창(1852~1898년)의 <당의통략>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러한 일(정인홍의 상소)이 있은 뒤에, 광해군이 매일 문안을 하면 선조 임금이 느닷없이 꾸짖곤 했다. '중국의 책봉도 받지 못했는데, 왜 세자라고 칭하는가? 앞으로 문안하러 오지 말라.' 이 말을 들은 광해군은 땅에 엎드려 피를 토하였다.
 
죽기 직전 선조가 내린 현실적인 선택

광해군이 끝내 명나라의 승인을 받지 않고도 임금이 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의 승인은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것이었다. 세자 책봉은 조선 내부의 법적 절차에 따라 마무리되는 일이었다. 중국의 승인이 임명 요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승인을 못 받으면, 중국을 상대로 조선 세자의 지위를 주장할 수 없을 뿐이었다.
 
병석에 누운 선조는 그처럼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것을 핑계 삼아 광해군의 마음을 흔들어댔다. 중국의 승인이 필수가 아니라는 점은 선조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병석에 누운 뒤에 광해군에 대한 왕권 이양을 재확인해준 것은 그 자신도 중국의 승인을 크게 중시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때는 그래 놓고도, 이따금 기분이 틀어지면 '명나라의 승인도 받지 못한 놈' 하면서 광해군의 마음을 뒤집어놓곤 했던 것이다.
 
광해군이 막판까지 얼마나 노심초사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병석에 누운 아버지를 살려야 한다는 '아들의 마음'과, 아버지가 회복되면 자기가 쫓겨날 수 있다는 '정치인의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충돌하는 것을 느끼며 자괴감으로 무척 괴로워했을 수도 있다. 
 

결국 왕이 된 아들. ⓒ tvN

   
그러나 선조는 어디까지나 정치인이었다. 광해군 쪽으로 판세가 넘어갔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결국 현실적 선택을 내리고 만다. 이 선택이, 죽기 전날 인목대비에게 건넨 유서에서 잘 드러난다. 음력으로 선조 41년 2월 1일자(양력 1608년 3월 16일자) <선조실록>에 실린 유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동기 사랑하기를 내가 있을 때처럼 하고, 남들이 비방해도 절대 듣지 말라. 이렇게 너에게 맡기니, 내 뜻을 꼭 이행하라."
 
<왕이 된 남자>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했던 마지막 말은 "그래, 내 지켜보마. 네 놈의 세상은 어찌 되는지, 네 놈은, 네 놈은 어찌할지. 돼먹지 못한 놈!"이었지만, 실제로 선조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위와 같이 간곡한 당부의 말이었다. 눈물로 애원하는 부탁의 말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선조와 광해군의 부자관계는 <왕이 된 남자>에서 묘사한 수준까지는 되지 않았다. 그 정도로 막나가는 부자관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선조가 막판에 간절한 부탁까지 하면서 태도를 바꿨지만 그게 광해군을 감동시키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이 점은 훗날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영창대군을 죽게 내버려둔 사실에서뿐만 아니라, 광해군이 아버지상(喪) 중에 비상식적인 행동을 했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도 드러난다. 인목대비의 관점에서 집필된 작자 미상의 한글 서적 <계축일기>에 이런 일화가 소개돼 있다.
 
(선조가) 훙서하신 지 석 달 만에 대전(임금)이 수라를 못 자시기에, 대비께서 육찬을 권하시니 권하신 지 두 번 만에 잡수시었다. 양즙(소의 양)을 끓이거나 볶아 짜낸 물을 하여 가지고 갔더니, 자시고 물리면서 은근히 당부하기를 '이 즙에 가장 입맛이 당기니, 차게 채워두었다가 다음에 달라' 하니 ····
  
선조 사후에 광해군이 식욕을 잃은 것을 보고 인목대비가 한우의 양을 끓인 곰탕을 권유하자, 광해군이 딱 한 번만 사양하고 얼른 먹었다는 것이다. 부모상 중이니 육식을 피하거나, 부득이한 경우에는 여러 번 사양하다가 먹어야 하는데도, 딱 한 번만 사양하고 곰탕을 먹었다는 것이다. 부모상중에 육식을 자제하던 당시 관점에서 보면 불효자의 증표로 해석될 수 있는 일이었다.
 
인목대비의 관점에서 쓰인 것이라 과장되거나 조작됐을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그런 가능성을 입증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광해군이 아버지의 유언을 무시한 점을 감안하면, 이 이야기가 실제 사실일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광해군은 아버지의 유언을 버리고 새어머니와 이복동생한테 모질게 대한 것과 더불어, 이처럼 상중에 육식까지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점은, 죽기 전에 아버지가 왕위 이양을 재확인하고 이복동생을 간곡히 부탁한 것이 광해군의 가슴을 감동시키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드라마에서 묘사된 것처럼 그렇게 심각한 수준까지는 안 갔지만,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상당히 많이 품은 상태에서 임금 생활을 시작했던 것은 사실이다.
왕이 된 남자 광해군 선조 부자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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